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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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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의 하늘에 한지가 하늘하늘

등록 2005-03-30 00:00 수정 2020-05-03 04:24

원주 한지축제가 열린 파리의 풍경…문화적 차이를 딛고 ‘느낄 수 있는’ 교류의 장 만들어야

▣ 파리= 이선주 전문위원 nowar@tiscali.fr

원주의 한지가 프랑스에 봄나들이를 왔다. 3월10일부터 4월 초까지 26일 동안 원주의 한지축제가 파리에서 열렸다. 원주의 참여자치시민단체인 ‘한지개발원’과 파리의 한불문화교류협회 ‘한국의 메아리’ 두 사단법인이 성사시킨 행사다. ‘파리 한지문화제’는 파리 북쪽의 징가로 극장과 파리 서쪽 불로뉴 숲 아클리마타시옹 공원에서 크게 열렸다.

‘동양 종이’는 ‘일본 종이’라는 편견

‘한국의 색깔’이라는 테마로 각종 한지행사가 열린 아클리마타시옹 공원엔 한지로 만든 대형 등이 마치 조각처럼 곳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야외전시회뿐 아니라 한지를 이해하고 한지공예를 체험할 수 있는 각종 행사들과 한국 영화 상영까지 곁들여졌다. 2002년 ‘서울정원’을 만들면서 한국식 연못과 누각을 설치해 한국과는 인연이 깊은 공원이다. 이번 행사의 개막식에서 열린 한지 패션쇼에 공원에서 500~600명, 징가로 극장에서 400여명이 참가해 성황을 이뤘고, 한국과 프랑스의 각종 언론들이 호응을 보였다.

언론의 영향력을 입증이라도 하듯, 공원에서 한지등을 구경하고 있는 한 프랑스인에게 “어떤 계기로 구경을 왔느냐”고 물었더니 “텔레비전에서 본 기억이 있어 공원에 놀러온 김에 구경하러 왔다”고 말했다. 원주 주최쪽의 한국 홍보와 프랑스 현지의 홍보 노력 덕에 이번 행사는 두 나라 매스컴의 사랑을 듬뿍 받을 수 있었다. 한국쪽에서 보면 파리로 진출한 한국 전통문화의 소개라는 측면 외에도 한국의 지역문화를 시민단체가 주축이 되어 열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프랑스에서는 담당 기획사쪽의 남다른 홍보활동이 돋보인 행사이기도 했다.

“한지로 예쁘게 포장된 초대장을 프랑스 현지 언론사에 500여개나 보냈다”며 파리 현지 기획자인 이미아씨는 그간의 고생을 숨기지 않았다. 다행히 애쓴 만큼 현지 언론들이 개막식에 많이 참석해 호평을 해주어서 흡족하단다. 그런가 하면 이번 행사의 원주쪽 집행위원장인 김진희씨는 “프랑스 주재 교민들이 눈물을 글썽이며 자랑스럽다고 격려해주실 때는 그동안 고생한 보람을 느꼈다”며 외국에서 느끼는 남다른 감회를 토로했다. 지난 1년간 한국과 프랑스를 전화선으로 이으며 기획해낸 두 사람의 얼굴엔 피곤함 뒤로 자부심이 느껴졌다.

원주 한지축제는 1990년대 말 한국의 민주화 여파를 타고 우여곡절 끝에 현지 시민단체가 주축이 되어 만들어졌다. 한국에선 점차 지역문화가 활성화되어 다양한 지역문화 행사들이 생겨나고 있지만, 원주 한지축제는 비정부기관이 자치적으로 이끌어오고 있다는 점 때문에 ‘지역문화의 민영화이자 시민화’라는 남다른 자부심을 갖고 있다. 하지만 원주시에서마저 잊혀지고 있던 한지를 다시 부각시켜 발전시키고 대외적으로 알리는 작업엔 피나는 노력이 따랐다. 그런 노력의 결실로 이제 원주 현지에서는 전국적 차원에서 열리는 한지축제가 되었다. 2000년엔 일본에 진출했는가 하면, 올해 파리 행사를 계기로 독일과 동유럽쪽 진출을 갈망하고 있다.

한국의 지역문화가 국제무대인 파리로 진출하는 목적에 대해 김진희씨는 이렇게 말했다. “그동안 ‘동양 종이’라면 ‘일본 종이’로만 세계적으로 알려져 있는데, 닥종이의 ‘한지’도 있다는 것을 널리 홍보하고 한지의 질적 우수성을 세계에 알려서 세계 시장을 개척하고자 한다.” 그래서 이번 행사에서도 ‘한지’의 발음을 그대로 따서 ‘Hanji’라고 부르고 있다. 그런데 유럽에선 한지의 존재조차 모르는 실정이라서 아무리 한지가 아름다워도 한지 판매의 앞길이 그렇게 순탄하지만은 않다. 특히 문화와 언어가 다른 곳에서 진행시키는 일인 만큼 현지에서는 까다로운 일들이 많이 생긴다.

“정작 한국의 우리 문화 연구가 아쉽다”

“서양문화, 특히 프랑스 문화가 우리와 아주 다르다는 것을 익히 들어오긴 했지만, 이처럼 문화 정서가 다른 줄은 몰랐다. 사람들의 일에 대한 개념도 그렇고, 진행 및 진척 상황이 우리와 아주 다르다. 그래서 작업의 가능과 불가능의 개념도 다른 것 같다. (웃음) 멀리서 옮겨온 작품들이다 보니 불가피하게 생긴 불상사를 해결하느라 한국인들이 밤을 새워서라도 작업을 하는 것을 보고 여기 사람들이 놀라더라.” 김진희씨는 힘든 고비들을 추억담으로 삼키며 얘기했다.

사실 세계에서 가장 적게 일하는 나라 가운데 하나인 프랑스인들과 그 반대의 한국인이 작업이나 일에 대한 진척 방법이나 철학이 다른 건 당연한 일이다. 게다가 시민단체의 남다른 노력으로 이제 갓 개발해서 발전시키고 있는 한지의 역사를 기리고 문화의 뒷얘기를 가꾸고 듣기 좋아하는 프랑스에 알리는 작업도 쉬운 일이 아니다. 이미아씨는 이렇게 어려움을 토한다. “한지의 문화적 가치는 자타가 공인하고 있고, 한지의 아름다움을 프랑스에 소개하는 것이 자랑스러운 일임에도 정작 한국 안에서 우리 문화에 대한 연구자료가 미비하다는 점이 정말 아쉽다. 한지를 파리에 소개하기 위해서 파리의 기획자가 한지 문화 연구까지 하며 자료들을 만들어야 했다.” 한국 문화 발전정책의 미비점를 보강하면서 프랑스식으로 한국 문화를 소개하는 작업을 하는 과정에서 절실하게 와닿는 현실적 장애를 잘 대변하는 말이다.

이미아씨는 해외로 진출하는 문화는 한국의 이미지를 만들기 때문에 국가적 차원의 준비나 후원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나라의 이미지를 좌우하는 ‘문화산업’인 만큼 민간이나 국가 가운데 누가 주최가 되든 정부의 적극적이고 다양한 문화 후원사업이 필요하다.” ‘문화’라는 단어의 어감이 나라와 환경에 따라 다르듯, 국가의 ‘문화정책’과 성격도 해당 나라의 역사적 배경에 따라 미묘한 차이를 보인다. 식민주의와 전쟁, 그리고 독재의 어두운 역사를 거치면서 자체적이고 자율적인 문화 발전보다는 공권력의 개입으로 문화 말살·저해 정책이 펼쳐져온 한국에서는 이제야 지역 전통문화가 민주화의 물결을 타고 서서히 활성화되고 있다. 그래서 한국 사회에서는 국가나 외부 자원금은 절실히 필요하지만, 되도록이면 이전과 같은 공권력의 간섭은 줄이면서 자율적으로 발전시키는 시민 문화가 이상적이다.

계몽주의 사상 전통을 이어오고 있는 프랑스에서는 일상에서도 ‘전통’ ‘문명’ ‘문화’ 개념이 한껏 미화돼 있다. 국가 정책이 각종 문화의 발전을 지원하고 보조하는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다. 앙드레 말로나 자크 랑 등 프랑스의 역대 문화부 장관들의 문화장려 정책들은 널리 알려져 있다. 이젠 세계화 여파로 미국 문화의 세계 점령에 맞서 자국 문화 보호를 위해 가장 강력하게 저항하고 있는 나라가 프랑스이기도 하다. 프랑스는 세계적인 연대를 외치며 ‘문화의 다양성’을 기치로 지역 전통문화 발전의 기수 역할을 하고 있다.

“국가는 문화가 획일화되고 경제적인 현실에 종속되는 것을 피할 수 있는 성벽”이라는 자크 시라크 대통령의 말은 프랑스적 문화환경을 잘 대변한다. 여기에 파리에 위치한 유네스코도 합세해 프랑스를 비롯해 유럽 및 세계적 차원에서 국가간 문화교류 행사를 진척시키고 있다. 이런 상황을 고려하면 앞으로 프랑스 등 유럽에 진출시킬 수 있는 한국 문화는 무궁무진하다. 물론 이를 위해서는 진출 국가에 대한 충분한 이해를 기반으로 철저한 준비가 뒤따라야 한다. 진출하는 개인이나 단체가 현지에서 겪을 문화적 충격을 최소한으로 하는 작업도 필요하다.

한국 정부 문화보조 정책 절실

이런 맥락에서 한국 정부의 문화보조 정책이 절실히 요구된다. 그동안 해오던 식의 일방적 서구 문화 답습이 아니라, 두 나라의 다른 점을 고찰·분석·정리해 자료로 남겨서 필요한 사람들이 참고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런 과정에서 우리의 특수성을 자각하게 되고, 상대적 차이점도 파악할 수 있다. 우리 것을 남에게 구체적으로 어떻게 소개하며 진출하느냐는 과제를 풀어나갈 수 있다. ‘느끼게 하다’라는 뜻의 불어 동사 ‘상시빌리제’(sensibiliser)는 문화체험 행사마다 단골로 붙는 단어다. 이번 행사의 성과도 파리에서 현지인들에게 원주 한지의 ‘상시빌리제’를 맘껏 제공한 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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