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엄령 치하에서 숨죽여온 빠따니·얄라·나라티왓 주민들, 학살 책임자 탁신을 표로 응징하다
▣ 빠따니·방콕=정문태/ 국제분쟁 전문기자·아시아 네트워크 팀장 asianetwork@news.hani.co.kr
“치앙마이 싹쓸이한다. 전체적으로 80% 쓸어담고!”
총선을 2주 앞둔 지난 1월23일, 북부 산사이(San Sai)를 찾은 탁신 시나왓 총리는 ‘예상치’를 묻는 내게 거침없이 내뱉었다. “단독정부라고 독재정권이라 부르는 곳이 세상에 어딨나? 사람들이 날 믿는 게 잘못이냐?” 총선을 이틀 앞둔 2월4일, 탁신 총리는 자신의 타이락타이당 압승을 예상하는 엄청난 자신감을 뿜어냈다. “날 비판해온 야당과 학계가 앞으로 4년 동안 내 충실한 노력을 더 잘 알게 될 것이다.”
2월6일 총선이 끝나자마자 탁신 총리는 일찌감치 압승을 자축하며 반대자들을 몰아붙였다.
그리고 2월16일 현재, 비공식 발표에 따르면 탁신 총리의 타이락타이당은 하원 의석 500석 가운데 375석을 차지하며 1932년 입헌군주제를 도입한 타이 현대사에서 처음으로 단독정부 구성 요건을 갖추는 신기록을 세웠다. 그래서, 비록 이번 총선이 “최악의 부정 금권·관권 선거였다”며 여기저기서 비난을 쏟아내고 있지만, 야당과 시민운동쪽에서도 ‘완패’만은 인정하는 분위기다.
완승 거둔 탁신, 남부 3개 주에서만 완패하다
그럼에도 탁신 총리가 정치적 승리를 장담하기에는 아직 이른 감이 든다. 탁신 총리의 아킬레스건으로 여겨진 남부 무슬림 3개 주 분쟁 지역인 빠따니, 얄라, 나라티왓의 11석 가운데 타이락타이당이 단 1석도 건지지 못한 채 ‘전멸’했기 때문이다. 탁신 총리는 ‘남부 승리’를 내걸고 선거전에 돌입하기 전부터 천문학적인 돈을 들이대며 막대한 프로젝트를 약속했고, 심지어 남부 3개 주의 민주당 현역 의원 5명 가운데 4명을 타이락타이당으로 빼가기까지 하면서 ‘사생결단식’ 총력전을 벌였으나, 결국 ‘남부 원정’에 실패함으로써 대남부 무력강경책이 치명타를 입고 말았다. 따라서 탁신 총리는 전국적 압승과는 상관없이 단 ‘1석의 부재’로 씁쓸한 축배를 들 수밖에 없는 꼴이다.
“이건 매우 실망스런 결과다. 몇석은 우리(타이락타이당)가 건졌어야 하는데….”
선거 결과가 드러나기 시작한 2월7일 기자들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은 탁신 총리는 다음날 내각회의에서 “타이락타이당이 3개 주에서 전멸한 건 ‘주민들이 타이락타이당 후보를 찍으면 (분리주의자들이) 종교 지도자들을 납치해갈 것’이라는 악소문이 돌았던 탓”이라고 느닷없이 ‘소문’을 때리며 매우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이어 탁신 총리는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2월9일로 잡아두었던 남부 3개 주 방문 계획마저 취소했다.
그러나 선거 결과를 놓고 남부 민심은 탁신 총리와 전혀 다른 반응을 보였다. “악소문 탓이 아니라 남부 시민들이 탁신의 무력강공책을 심판한 결과다. 탁신이 남부 분쟁을 해결하겠다면 이번 선거 결과를 정확히 보고, 발상과 정책을 모두 바꿔야 한다.” 송클라 대학 정치학 교수로서 민주당 남부 3개 주 선거대책본부장을 맡았던 삐라욧(Pirayot Rahimmula)은 숨죽여온 시민들이 투표를 통해 속마음을 드러낸 것으로 분석했다. “난 투표로 탁신을 공격했다. 그이가 돈다발을 약속했지만 목숨보다 중요한 건 없다.”
얄라주 농민 모하맛 유숩(48)의 말은 많은 현지 시민들의 것이기도 했다.
실제로 2001년 총선에서 60%에 머물렀던 남부 3개 주 투표율이 분쟁 상태로 치른 이번 총선에서 예상을 뒤엎고 70%를 웃돌았다는 건 ‘남부의 마음’을 대변하는 중요한 지표였다.
어쨌든 이번 남부 3개 주 총선 결과로 대남부 무력강공책을 어떤 형태로든 수정해야 할 처지가 된 탁신 총리는 “남부 주민들이 바라는 게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신호로 보내왔다”고 밝혔으나, 그 추상적인 표현이 담고 있는 속뜻을 정확히 해석해낼 만한 이는 아무도 없다. 오직 제왕적 권력을 누려온 탁신 총리 자신만 알고 있을 뿐, 남부는 총선에서 드러난 민심과 상관없이 여전히 계엄령에 눌린 채 날마다 폭탄과 총알세례를 받고 있다.
문 닫은 2500개 학교… 교사들은 총기 휴대
수십년 동안 끌어온 남부 분쟁이 다시 폭발한 건, 2004년 1월4일 정체불명의 괴한들이 나라티왓의 초 아이롱(Cho Airong) 소재 타이 제4군 개발대대본부를 습격해서 군인 넷을 살해하고 무기 413정을 탈취한 사건이 벌어지고부터다. 탁신 정부는 남부 3개 주에 곧장 계엄령을 선포한 뒤 2만명도 넘는 중무장 군인을 파견해 무력시위를 벌였으나, 정체불명의 괴한들이 저지르는 폭탄 공격과 총격 사건은 날마다 꼬리를 물었다. 그로부터 1년 동안 550명이 넘는 이들이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정부는 개발대대 습격을 비롯해 모든 사건을 “분리주의자들의 소행”이라고만 밝혔을 뿐, 지금까지 단 한건도 속시원히 해결하지 못했다.
“그 많은 사건들을 모두 분리주의자의 소행이라 볼 만한 증거가 없다. 정부는 괴한이든 폭도든 분리주의자든 체포해서 정체를 밝혀야 음모설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 전 타이청년무슬림회 회장을 지낸 만소운 살레(Mansour Salleh)는 음모론을 제기했다. “계엄령이 쓸모없는 짓이란 게 잘 드러났다. 대낮에 군인과 경찰들이 득실거리는 도심 한가운데서도 테러 사건이 벌어진다면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나?”
니라만(Niraman Sulaiman·빠따니) 변호사는 “지난 1년이 증명한다. 무력으로는 절대 남부 분쟁을 해결할 수 없다. 근본적으로 남부 문제는 분리주의자들 탓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실제로 많은 전문가들도 탁신 총리의 무력강공책이 남부 분쟁을 오히려 악화시켰다고 비난해왔다. 역사학자이자 사회운동가로 두루 존경받아온 니디(Nidhi Eoseewong·치앙마이) 교수는 “남부 문제의 본질을 왜곡해서는 안 된다. 탁신은 계엄령을 해제하고 군대를 철수해야 한다. 남부 분쟁은 정부의 야만적인 문화차별 정책과 경제 불평등이 낳은 결과”라고 강조했다.
남부를 둘러보면 니디 교수의 말이 아픈 현실로 성큼 다가온다. 최근 경찰로부터 가택수색을 당했다며 인터뷰 내내 불안에 떨던 송클라 대학 학생회 부회장 압둘라(Abdullah Tehlah)는 “시민 85~90%가 무슬림인 남부 3개 주를 대표하는 송클라 대학 빠따니분교 학생 가운데 무슬림은 기껏 5%다. 무슬림 학생들은 좋은 점수를 받고도 면접에서 떨어진다”며 흥분했다.
정부의 이런 교육차별 정책이 남부 분쟁의 핵심 요인으로 자리잡으면서 결국 타이식 학교마저 문을 닫게 만들어 현재 남부 3개 주는 교육이 마비된 상태다. 지난 1년 동안 ‘누군가’ 이런 교육 불평등을 보복 목표로 삼아 타이식 학교와 교사들을 공격해왔던 탓이다.
그사이 신변의 위협을 느낀 교사들의 총기 휴대 요구를 정부가 허락함으로써 총을 찬 교사가 등장하는 전대미문의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지만, 12월23일 ‘남부 국경주 교사회의’ 의장 분솜(Boonsom Thongsriphrai)은 “치안 상황이 개선될 때까지 2500여개 학교가 문을 열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하면서 기어이 학교 문을 걸어닫았다.
불교 사찰이라면 무자비하게 공격했을까
그런 가운데 남부 경제도 직격탄을 맞았다. 타이 국민총생산에서 기껏 2%를 담당하며 가장 낙후된 지역으로 꼽혀온 남부 3개 주에서 경제를 말한다는 건 사치였다.
“말레이시아 관광객에 매달렸던 국경 3개 주 경제는 끝장난 판이고, 그나마 교육부문이 일부 밥줄을 제공했던 빠따니도 학교들이 모조리 문을 닫아버렸으니….”
빠따니주 상업회의소 부소장인 하이난 출신 중국계 수라차이(Surachai Chantarany)는 “남부 경제의 90% 이상을 쥐고 흔들어온 중국계든 무슬림 시민이든 어렵긴 모두 마찬가지”라며 기반 전체가 뒤흔들린 남부 경제를 한탄했다.
그런 상황에서 선거철 표심을 잘못 파악한 탁신 총리는 하루가 멀다 하고 ‘재원 불명’의 프로젝트를 마구잡이로 쏟아냈다. 아니나 다를까, 총선이 코앞에 다가온 1월 중순 정부는 타이은행(BOT)을 통해 200억바트(약 5600억원)를 남부 개인사업자 지원과 시민 부채 해결용으로 풀겠다는 초대형 공약을 내걸었다.
“시민들이 바라는 건 그런 대중 살포 전시용 정책이 아니다. 탁신이 선거에서 표를 얻는 것과 남부 문제 해결은 근본적으로 뿌리가 다른 문제다.” 추안 릭파이 전 총리는 “중요한 건 남부에 대한 이해다. 남부 사람과 무슬림에 대한 이해 없이는 어떤 정책도 성공할 수 없다”며 탁신 총리를 강하게 나무랐다.
그렇게 탁신 총리의 강공책에 휘둘린 남부 분쟁이 1년을 넘겼지만, 아직까지 남부의 분노가 수그러들 낌새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지난해 4월28일 정부군이 이슬람 성지이자 유적지인 크르세(Krue Se) 모스크로 피난한 젊은이 32명을 로켓포로 살해하면서 온 세상을 놀라게 한 ‘크르세 모스크 학살’ 현장은 정부가 나서 복구작업에 정열을 불태우고 있지만 남부 시민들에게는 여전히 지울 수 없는 상처로 남아 있었다.
“만약 그게 불교 사찰이었다면 군인들이 로켓포를 쏘며 진압했겠는가? 불교도들은 정부가 성스러운 불교 사찰을 파괴하고 사찰 안에서 시민을 살해한다면 용서할 수 있을까?” 나라티왓 이슬람위원회 의장인 압둘 로히만(Abdul Rohiman Abdul Samad)의 삭일 수 없는 분노는 남부 시민 모두의 것이었다.
그러나 방콕의 정서는 이런 남부를 결코 이해한 적이 없다. 돌이켜보면, 크르세 모스크 학살 뒤부터 방콕 시민들의 입에서는 “못된 무슬림”(bad muslim)이란 말이 자연스레 나돌았고, 그로부터 정부의 강공책이 탄력을 받기 시작했다.
어느 신문의 희한한 사진 조작
“남부 문제의 본질은 언론 탄압에서부터 비롯되었다. 정부가 언론을 장악해 시민들의 눈을 가렸기 때문에 무력강공책이 가능했다. 따라서 언론 자유 없이는 남부 문제 해결도 없다.” 우본랏(Ubornrat·출라롱콘대학 방송학) 교수의 지적처럼, 실제로 크르세 모스크 학살 다음날 타이 언론들은 ‘방콕 시민 90%가 무력 진압을 인정한다’는 긴급 여론조사를 결과를 일제히 내보내며 희생된 무슬림 젊은이들을 ‘폭도’로 만들기에 열을 올렸다. 그 과정에서 4월29일치 <끄룽텝 투라낏>(Krungthep Thurakij) 신문은 살해된 무슬림 젊은이의 손에 들려 있던 칼집을 지우고 대신 그 손에 칼을 쥔 조작 사진을 내보냈다. 그리고 말썽이 나자 하루 뒤인 4월30일, ‘기술적인 실수’였다는 희한한 사과문을 올렸다.
자, 어떤 기술을 실수해야만 사진에 찍힌 칼집이 칼로 둔갑할 수 있을까? 그렇게 언론이 제 몫을 못하는 사이에 크르세 모스크 학살은 타이 불교도와 남부 무슬림을 갈라놓는 예리한 칼날이 되었다. 결국 5월에 접어들자, ‘누군가’ 나라티왓의 불교 사찰을 불태웠고 또 승려 2명을 살해하면서 크르세 모스크 학살에 대한 보복성 공격을 감행했다.
공황 상태에 빠진 승려들이 다투어 떠났고 남부 무슬림 지역 절들은 텅텅 비기 시작했다.
그러자 정치권과 군부 일각에서는 남부 분쟁을 노골적으로 ‘불교 대 이슬람의 충돌’로 몰아갔다. 탁신 총리는 불교와 민족주의를 혼합한 ‘타이식 불교민족주의’를 목청껏 외쳐댔다.
“현지 무슬림 소행이라 볼 수 없다. 함께 살아온 그 승려들을 살해할 만한 이들도 없고, 또 그럴 만한 까닭도 전혀 없다. 수백년간 남부에서는 불교와 이슬람이 조화롭게 공존해왔다.” 니라만 변호사의 말처럼 남부 무슬림 시민들은 불교에 대한 공격을 인정하지도 않을뿐더러, 사찰과 승려 공격을 무슬림의 소행이라 믿지도 않았다.
“누가 승려를 살해했건, 사찰을 공격했건, 모두 탁신이 광적인 ‘불교민족주의’를 내걸면서부터 벌어진 사건이다. 무슬림을 무력으로 다스리겠다는 발상 자체가 정치적 결함이다.” ‘정치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타이불교의 해묵은 전통을 깨고 날카롭게 정치판을 비판해온 승려 끼띠삭(Kittsak Kittisophano)은 다수 불교도 중심 타이민족주의에 혐의를 씌웠다. 현 상황을 “탁신 정부가 통치행위 실패를 ‘종교분쟁’으로 몰아가는 중”이라 규정한 끼티삭은 불교민족주의 앞에 주눅든 진보 진영에서조차 몸을 사리는 매우 예민한 사안인 ‘국민투표’를 해결책으로 꺼내들었다. 그는 “(정부가 안전을 지켜주지 못한다면) 시민 스스로 생존을 지킬 권리가 있다고 헌법에 명시된 만큼, 그게 독립이든 자치든 남부 무슬림 시민들이 자결권을 행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렇게 탁신 정부의 다수중심주의 무력강경책은 기어이, 10월25일 ‘탁바이(Tak Bai)학살’을 낳고 말았다. 이날 정부군은 비무장 무슬림 시민 시위대에게 무차별 총격을 가해 현장에서 7명을 살해한 뒤, 시위 현장에 있던 1200여명에 이르는 시민을 군부대로 압송해갔다. 이어 빠따니 군부대에 도착한 군용트럭에서 주검 78구가 발견되었다.
“수송 중 78명이 질식사했다”는 정부 발표와 달리, 탁바이에서 만난 목격자들은 “트럭에 실리기 전 이미 목뼈가 부러지고 얼굴과 머리를 난타당한 주검들을 봤다”고 털어놓았다.
생뚱맞은 종이학 접기 운동
그러나 탁신 총리는 ‘현장 사병들의 실수’로 상황을 매듭지었다. 총리란 자와 군 지휘관들은 그 엄청난 학살 사건을 놓고 모든 책임을 사병들에게 뒤집어씌운 셈이다. 크르세 모스크 학살에 이어 탁바이 학살은 다시 한번 탁신 정부의 ‘책임지지 않는 정치’ ‘책임자 없는 정치’를 온 세상에 폭로했다. 대신 탁신 총리는 뜬금없이 거국적인 ‘종이학 접기 운동’을 폈다. 학생과 시민을 동원해 접은 종이학 수천만 마리를 남부 무슬림 지역에 ‘평화의 상징’으로 떨어뜨리겠다는 그이의 발상은 무슬림들의 강한 반발을 무시한 채 현실로 이어졌다.
“이슬람을 이해하지 못하는 처사다. 무슬림들은 어떤 형상도 상징도 인정하지 않는다.”
빠따니이슬람위원회 의장 와에디알라매(Waedee-alamae Mamengji)를 비롯한 종교 지도자들이 나서 ‘종이학’을 거부했으나, 탁신 총리는 12월5일 부미뽄(Bumipol Adulyadej) 국왕의 생일에 맞춰 군용기에 실어간 종이학을 남부 지역에 무차별 살포했다. 탁신 총리는 자신의 사인이 든 종이학을 줍는 자에게 ‘학비 공짜’와 ‘직업 알선’을 내걸었고, 시민들 가운데는 지폐로 종이학을 접거나 선물을 보장하는 사인을 적어 날려 남부를 ‘도박장’으로 만드는 이도 있었다.
아무도 책임지는 이 없는 남부 분쟁은 지난 1년 동안 그렇게 많은 시민과 군인, 경찰, 공무원의 목숨을 앗아갔지만 여전히 ‘깜깜한’ 길을 달리고 있다. 그리고 남부 학살과 비극은 ‘음모’에 실려 어둠 속 신화로 넘어가고 있다. 그러나 그 피비린내 속에서도 “탁신 총리 제2기 정부가 무력강공책을 철회하지 않는 한 결코 남부의 평화는 없다”는 메시지만은 또렷이 들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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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전국시대 군주를 연상케 하는 이 ‘장엄한’ 발언은 탁신 총리 입에서 터져나왔다. “분리독립이라고? 탁신이 남부 분리독립에 영감을 주었다. 우린 그런 걸 미처 몰랐다.” 이건 남부 현지 무슬림들의 비아냥거림이다.
그러나 분명한 건 타이가 자신들 왕조사의 출발점으로 삼는 수코타이 왕국 이전부터 빠따니 왕국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또 하나, 타이인의 뿌리를 중국 남부에서 넘어온 이른바 ‘북-남라인’으로 본다면, 해양을 낀 빠따니 사람들은 인종적으로도 전혀 다르다는 사실이다.
일찍이 말레이반도와 수마트라를 잇는 힌두 부디스트 왕국 스리위자야의 중심지 노릇을 했던 빠따니 왕국은 13세기 무렵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이슬람을 받아들이며 17세기까지 남중국해를 끼고 빛나는 해양무역 문화를 건설했다. 1563년 빠따니 왕국은 버마로부터 공격받던 시암 왕국(현 타이) 수도 아유타야를 한때 장악하여 자신들의 군사력과 경제력을 과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17세기로 접어들면서 빠따니 왕국은 기울기 시작했다. 그 무렵 시암은 프라야 딱신 장군이 버마로부터 독립전쟁을 성공적으로 완수한 뒤, 후임 라마 1세가 현 타이 왕실의 뿌리인 차끄리 왕조를 열어 지역의 강국으로 떠올랐다. 이어 라마 1세의 왕자 수라시(Surasi)가 빠따니 왕국을 침공해 술탄 무하맛(Muhammad)을 살해하면서부터 빠따니 왕국은 차끄리 왕조에 조공을 바치는 관계가 되었다.
그러나 타이 역사학자 통차이(Thongchai Winichakul·위스콘신대학) 교수는 “타이 역사가 빠따니 왕국을 늘 타이 왕국의 일부로 표현해왔지만, 실제로 빠따니 왕국은 정치적으로 타이에 복속된 적이 없었다. 근대에 이르기까지 인도차이나-말레이반도에는 수많은 군주국들이 공존해왔고, 조공은 서로의 협력관계를 상징하는 장치일 뿐이었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아무튼, 빠따니 왕국이 독립성을 상실한 시기는 그보다 훨씬 뒤인 1902년 시암에 강제 합병되면서부터였고, 그 합병은 당시 말레이반도의 식민종주국인 영국과 시암 왕국 사이에 1909년 맺어진 방콕조약을 통해 다시 추인되었다. 식민지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나눠먹기’를 벌인 그 ‘방콕조약’에 따라 오늘날 타이-말레이시아 국경선이 그어졌고, 빠따니 왕국은 사라지고 말았다.
그렇게 시암에 합병된 빠따니 왕국은 제2차 세계대전을 통해 다시 독립의 기회를 맞았다. 일본과 동맹을 맺은 타이에 맞서 툰 마뭇(Tun Mahmud Mahyuddin)을 지휘자로 내세운 빠따니는 대빠따니말레이운동(Greater Pattani Malay Movement)을 통해 영국을 지원하는 대가로 전후 독립을 약속받았다. 1945년 8월15일 전쟁이 끝나고 빠따니에는 잠깐 동안 네게라 빠따니 라야(대빠따니국) 국기가 휘날렸지만, 영국이 독립 인정 약속을 깨고 떠나면서 빠따니는 다시 타이에 합병되었다. 그로부터 빠따니 독립을 추구해온 투쟁단체들이 타이 정부에 맞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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