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경 맞댄 말레이시아 정부의 압박에 탁신 총리는 “게릴라 훈련장 제공 말라”며 역공세
▣ 타이-말레이시아 국경=정문태/ 국제분쟁 전문기자·아시아 네트워크 팀장 asianetwork@news.hani.co.kr
이자우(Ijau·풀빛), 비루(Biru·하늘빛), 웅우(Ungu·보랏빛), 꾸닝(Kuning·금빛), 그렇게 네 여왕이 이룩했던 빠따니 왕국의 황금기(1584~1635)는 어느덧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피로 물든 숭아이 꼴록(Sungai Kolok)강이 숨죽여 흐를 뿐이다. 한날 한곳에서 태어나 한 핏줄로 한 세월을 살아왔던 이들을 느닷없이 나타난 ‘국경’이라는 현대식 정치가 갈라놓은 날부터 그 강은 ‘전선’이 되고 말았다. 가족을 찾아 물살을 헤치는 이들, 날품을 팔고자 건너는 이들, 보따리 장사로 넘나드는 이들, 혁명을 꿈꾸며 타고 넘는 이들, 이들, 이들, 이들…. 그 모든 이들은 타이 깃발과 말레이시아 깃발을 휘날리는 국경수비대의 눈총을 받으며 죄인처럼 그 강을 건너고 있다.
‘탁바이 학살’ 기점으로 틀어져버려
그 강을 놓고 지난해부터 타이와 말레이시아는 총성 없는 전쟁을 벌여왔다. 지난해 초 ‘타이-말레이시아 연합국경수비대’처럼 폼 잡고 함께 찍은 사진을 뿌려대며 공조를 과시했던 두 나라는 10월25일 ‘탁바이 학살’을 기점으로 완전히 틀어져버렸다.
“타이 정부는 탁바이 학살에 대한 입장을 분명히 밝혀야 한다.” 말레이시아 총리 압둘라 바다위가 비교적 점잖게 성명서를 날린 일주일 뒤쯤, 여전히 나라 안팎에 상당한 영향력을 지닌 마하티르 전 총리가 최전방 공격수를 자임하고 나섰다. “타이 남부는 팔레스타인과 같다. 문제를 풀려면 남부 지역에 자치권을 부여해야 한다.”
이어 마하티르에게서 정치적 박해를 받았던 전 부총리 안와르 이브라힘도 “타이 남부 문제의 해결책은 자치권 부여뿐”이라며 기꺼이 지원 공격에 나섰다.
아시아에서 ‘제2의 마하티르’를 꿈꿔온 탁신 총리는 발끈했다. “그이 발언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남부를 더 이해할 필요가 있다.” 반격 기회를 노리던 탁신 총리는 아세안정상회의가 열리기 직전인 11월25일, “만약 아세안회의에서 탁바이 사안을 의제에 올린다면 나는 곧장 집으로 날아와버릴 것”이라며 아시아 정상들을 향해 선제공격을 감행했다.
그 무렵, 세계 최대 이슬람 국가인 인도네시아와 이슬람회의기구(OIC) 의장국인 말레이시아 정부는 강한 압박에 몰려 아세안정상회의에서 어떤 형태로든 타이 정부로부터 탁바이 학살에 대한 해명을 들어야 한다는 분위기였다. 탁신 총리는 외교관례를 깬 그 선제공격 때문에 나라 안팎에서 몰매를 맞았으나, 아세안정상회의에서 탁바이 학살을 건너뛰는 대성공을 거뒀다. “회원국의 국내 문제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전통적 ‘악습’을 지닌 아세안회의가 “밥만 축낸다”는 비난을 받으며 싱겁게 끝나자, 자신감을 얻은 탁신은 12월 중순 다시 외교적 관례를 깨고 포문을 열었다. “타이 무슬림 분리주의자들이 국경을 맞댄 말레이시아 북부 란딴(Kelantan) 정글에서 군사 훈련을 받아왔다. 쿠알라룸푸르는 그런 비밀 활동을 알지 못했다.”
이번에는 말레이시아 총리 바다위가 흥분했다. “탁신의 말에 충격을 받았다. 만약 탁신이 그런 정보를 갖고 있다면 외교 경로를 통해 말레이시아에 통보했어야 한다. 탁신이 그렇게 말한 진의가 무엇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맞선 타이 정부는 다시 사진 몇장을 공개하며 게릴라 훈련장이 말레이시아에 있다는 사실을 거듭 강조했다. 소재가 불명확한 그 사진을 놓고 말레이시아 교육부 장관은 “탁신이 타이 남부 분쟁에 몰린 국제사회의 눈길을 돌리고자 말레이시아를 비난하고 있다”고 대들었다.
한 꺼풀만 벗겨놓고 보면 ‘코미디’
그리고 아시아를 몰아친 쓰나미로 잠시 잠잠하던 ‘방콕-쿠알라룸푸르 전선’은 2005년 1월26일 탁신 총리가 포문을 열면서 다시 가열되었다. “제꾸매 꾸떼(Jehkumae Kuteh)가 말레이시아에서 체포되었고, 곧 타이로 데려올 것이다.”
기자들 사이에 1월 중순부터 제꾸매 꾸떼(GMIP 지도자) 체포 소문이 은밀하게 나돌던 터에, 탁신 총리가 언론을 통해 사실을 확인해버리자 말레이시아 정부는 직격탄으로 반격했다. “이건 상호 협조가 아니다. 타이 정부가 적법한 경로를 이용한다면 우리가 그에 따라 대응하겠지만, 절차를 무시한 채 언론 플레이를 한다면 우린 그 체포설을 확인해줄 수 없다.”
그 뒤 방콕과 쿠알라룸푸르 양쪽은 이중 국적을 지닌 것으로 알려진 제꾸매 꾸떼의 인도 문제를 놓고 두 총리와 외교부가 총동원된 가운데 연일 설전을 벌이고 있다. “제꾸매는 타이에서 태어나 교육받은 인물이고, 따라서 말레이시아는 마땅히 그를 타이로 인도해야 한다”며 탁신 총리가 거듭 권리를 주장하자, 말레이시아 외교부는 “제꾸매는 말레이시아 국적자다. 그이가 만에 하나 타이 국적을 지녔다 하더라도 두 나라 사이에는 ‘범인인도협정’이 없다”고 맞받아쳤다. 그러자 타이 외무장관은 20세기 초 말레이시아 식민종주국이었던 영국과 시암 정부가 맺은 협정을 디밀고 나서, 바야흐로 격전은 진흙탕으로 옮겨가고 있다.
이렇게 타이 남부 분쟁을 낀 방콕과 쿠알라룸푸르의 대결 국면은 말할 나위도 없이 두 정부가 지닌 정치 지형 탓이다. 다가온 총선을 앞두고 자신의 아킬레스건인 남부 문제에 대한 책임을 말레이시아에 떠넘기며 대외 공격으로 인기몰이를 하겠다는 탁신 총리의 전략과, 마하티르 전 총리의 그늘을 걷어내고 국내 정치적 기반을 확고히 다지고자 대외강경책을 구사하는 바다위 총리의 전략이 맞붙은 것이다.
그러나 한 꺼풀만 벗겨놓고 보면, 두 나라가 벌이는 ‘격전’은 코미디 수준이다. 이미 1970~80년대부터 타이 남부 무슬림 분리주의자들이 말레이시아 국경을 무장투쟁의 발판으로 삼아왔던 일도, 또 지금도 수많은 이들이 말레이시아를 정치투쟁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는 사실도 모두 너무 잘 알려진 ‘비밀’인 탓이다. 두 정부가 새삼스레 서로 치고받을 만큼 중대한 사안이 전혀 아니라는 뜻이다.
다만, 국경을 맞댄 강대국 정부가 벌여온 이기적인 잇속 다툼 속에서 빠따니와 같은 ‘소수’ 문제의 본질이 늘 왜곡되었고, 그 해결책은 늘 뒤로 밀려났다는 점을 국경은 말하고 싶어했다.
|
타이 남부 분쟁을 놓고 방콕과 쿠알라룸푸르 사이에 벌어지고 있는 ‘격전’을 어떻게 보나?
우리 정부가 너무 외교적 수사만 좇고 있다. 남부 분쟁은 인권과 민주적 가치로 다뤄야 할 부분이지 수사로 해결할 수 없다.
그럼 야당인 말레이시아 이슬람당의 입장은 무엇인가?
앞서 말했듯이, 외교적 수사보다는 실질적인 민주적 절차가 더 중요하다. 난 남부 분쟁을 타이 정부가 정치적으로 이용해온 게임으로 보고 있다. 그래서 우린 탁신 총리에게 ‘탁바이 학살’ 수사를 국제적 중립단체에 맡겨 공정한 검정을 받을 수 있도록 하라고 제의해왔다.
‘탁바이 학살’을 당신은 어떻게 규정하고 있나?
그건 단순한 인권유린 행위가 아니다. 인종청소다.
남부 분쟁을 접으려면 무슨 해결책이 있어야 하지 않겠나?
민주적 전망으로 본다면, 지름길도 해결책도 ‘국민투표’뿐이다. 동티모르가 좋은 본보기다. 독립을 하든 자치를 하든, 남부 주민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도록 기회를 줘야 한다.
말레이시아 이슬람당이 남부 무슬림 투쟁단체들을 지원한다고 눈총을 받아왔는데?
외국 사안에 개입할 수 없도록 규정한 말레이시아 법에 따라 우리 당은 남부를 지원할 수도 없고, 지원하지도 않는다. 다만, 같은 무슬림으로서 남부를 눈여겨보고 있을 뿐이다.
그럼 남부 무슬림 무장투쟁에 대해서는 어떤 입장인가?
우린 처음부터 대화를 요구해왔고 민주적 절차에 따른 국민투표를 제의해왔다. 시급히 국제사회와 타이 정부가 함께 나서 남부 시민들과 대화를 해야 한다.
현실성이 별로 없어 보이는데, 타이 정부가 그런 제안을 받아들이라고 보는가?
그건 그쪽 몫이다. 타이 정부가 문제를 풀려면 태도와 문화부터 바꿔야 한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일본에 붙었다가 종전과 함께 바로 미국에 붙었던 타이의 이중적 태도로는 어렵다.
타이 남부 분쟁 성격에 대한 이해를 위해 한마디 들어보자. 만약 종교(이슬람)와 국가가 충돌하면 무슬림은 어떤 선택을 하게 되나?
무슬림들에게는 국가나 정부가 종교에 우선할 수 없다. 국가는 종교를 지탱하는 장치일 뿐이다. 무슬림에게는 타이나 말레이시아라는 국가보다 이슬람이라는 종교가 더 중요하다.
한겨레21 인기기사
한겨레 인기기사
박종준 경호처장 “대통령 신분 걸맞은 수사해야”
고립되는 윤석열…경찰 1천명 총동원령, 경호처는 최대 700명
윤석열 탄핵 찬성 64%, 반대 32%…국힘 34%, 민주 36% [갤럽]
경호처 직원의 ‘SOS’ “춥고 불안, 빨리 끝나길…지휘부 발악”
또 튀려고요? [그림판]
25년 경호 공무원의 조언 “대통령 ‘개인’ 아닌 ‘공인’ 지키는 것”
‘윤석열 체포 저지’ 박종준 경호처장 경찰 출석
“최전방 6명 제압하면 무너진다”…윤석열 체포 ‘장기전’ 시작
경찰, 윤석열 체포 동원령…조폭·마약사범 잡던 베테랑 1천명
권성동 “포장만 바꾼 박스갈이법”…두번째 내란 특검법도 반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