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대한 정책 탓에 담뱃값도 저렴…담배회사 자금 받고 연구한 ‘힐랜더 사건’ 이후 금연운동 활발
▣ 제네바=윤석준/ 자유기고가 semio@naver.com
스위스를 생각하면 사람들은 ‘시계의 나라’ ‘알프스의 나라’ ‘퐁듀와 초콜릿의 나라’ 등의 수식어들을 떠올린다. 하지만 최근 스위스는 ‘담배의 나라’라는 다소 색다른 수식어를 새로 갖게 되었다. 세계 굴지의 다국적 담배회사들이 본사를 스위스로 옮겨오고 있기 때문이다. 1999년에 재팬 토바코가 제네바로 본사를 이전한 것을 시작으로 2002년에는 필립모리스가 뉴욕에서 로잔으로 본부를 이전하고, 인근 도시인 뇌샤텔에 연구개발(R&D)센터를 설치한 것이다. 브리티시 아메리카 토바코도 본사 이전을 검토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일단 현재까지는 두 경쟁 업체의 본사가 위치한 인근 지역에 생산공장만을 운영하고 있다. 이 회사가 본사를 스위스로 이전한다면 세계 3대 다국적 담배회사들의 본사가 모두 스위스에 자리잡게 되는 셈이다.
두터운 흡연자층, 유럽 3위
이처럼 스위스에 주요 다국적 담배회사들이 속속 둥지를 틀고 있는 까닭은 무얼까. 우선은 스위스의 ‘친담배적인 사업환경’ 때문이다. 스위스는 애연가층이 상당히 두껍다. 전체 인구는 700만명 정도의 중소 규모 나라지만 인구당 흡연자 비율은 헝가리, 그리스에 이어 유럽에서 세 번째로 높다. 성인 한 사람당 하루에 평균 8개비의 담배를 피우는 것으로 나타나 개인 담배 소비량으로도 세계에서 1~2위를 다투고 있다. 담배 광고 규제도 다른 나라들에 견줘 상당히 너그러워 흡연 인구가 지속적으로 늘어나는 추세다. 스위스는 담배 가격도 상당히 싼 편이다. 담배에 붙는 세율이 다른 국가들보다 상대적으로 낮기 때문이다. 이렇다 보니 빅맥지수(영국의 경제전문지 <이코노미스트>가 미국 맥도널드사의 햄버거 제품인 빅맥을 기준으로 각국 물가와 통화가치를 비교해 매년 발표하는 지수)나 김치찌개 지수 발표시에는 항상 세계 최고의 고물가 지역으로 선정됨에도, 담뱃값은 주요 선진국들은 물론 유럽 내에서도 가장 낮은 편에 속한다. 2002년에 <토바코 컨트롤>(Tobacco control)이라는 학술잡지가 ‘담배 한갑을 사기 위해 일해야 하는 시간’을 나라별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미국인이나 독일인은 18분, 프랑스인은 20분, 영국인은 무려 40분이나 일을 해야 담배 한갑을 살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스위스인들은 단 12분만 일을 하면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실제로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담배 상품을 예로 들면 스위스는 고율의 담배세를 부과하는 미국 하와이주보다 최소 3배 이상이나 싸다. 이렇다 보니 인터넷을 통해 스위스에서 담배를 판매하는 회사도 생겨났다. 실정법상으로 여전히 논란의 여지가 많지만 일반 우편을 통해 면세 범위 내 소량 단위로 포장해 미국 등지의 소비자들에게 판매·발송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스위스가 주요 다국적 담배회사들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스위스 연방정부의 ‘친담배적인 정책’ 때문이다. 스위스의 연방보건청장이 “우리의 금연정책은 유럽 내에서 가장 낙후돼 있다”고 고백할 정도로 스위스의 담배산업에 대한 규제는 너그러운 편이다. 아니, 너그럽다기보다는 오히려 담배라는 특수성에 주목하지 않고 다른 산업 분야와 큰 차별을 두지 않아 상대적으로 호의적이라고 느껴질 수도 있다. 이러한 스위스의 담배산업에 대한 ‘중립성’은 미국이나 유럽에서 담배산업에 대한 여러 가지 법적인 규제들과 잇단 소송들로 고민하던 다국적 담배회사들에게 스위스행 티켓 구입을 주저하지 않게 하는 동기가 되었다. 스위스 연방정부도 상당한 재정수입 등을 이유로 이들의 스위스 본사 이전을 적극 지지했다. 그런데 문제는 이후에 발생하기 시작했다. 스위스로 본사를 이전한 다국적 담배회사들이 스위스 연방정부의 정책 결정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 것이다.
스위스식 ‘합의민주주의’에 기반한 연방 시스템은 사회 구성원들의 활발한 참여라는 큰 장점을 가지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정책결정 과정에서 이해 당사자인 민간 부문의 직접적 영향력을 통제하기 어려운 단점도 있다. 물론 기업들이 국가의 정책결정 과정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문제는 일상적인 로비라는 틀에서 관용적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수년 전 스위스의 카페나 식당, 호텔 등에 금연 구역을 의무적으로 설치하는 법안을 입안하려 할 때, 이들 기업이 일부 대형 호텔업자나 카페 점주단체 등과 제휴해 이 입법화를 제지한 것이다. 보는 시각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이는 오늘날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상적인 로비활동으로 여겨질 수 있다. 하지만 만약 흡연 관련 연구를 하는 과학자들에게 보수를 지급하고 그들의 연구에 자금 지원을 했다면, 이것도 통상적인 로비활동이라고 볼 수 있을까.
담배회사 로비도 치열
2001년에 발표된 세계보건기구(WHO)의 외부 용역 보고서에 따르면, 대부분의 유력 담배 제조업체들이 담배에 대한 사회적인 거부감을 줄이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는데, 특히 최근 수십년간 이들 업체가 흡연 관련 연구를 진행하는 일부 과학자들에게 자금을 제공해왔다고 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스위스에서 일어난 ‘힐랜더 스캔들’이다. 스위스 제네바대학 의대에서 환경의학 교수로 근무했던 스웨덴 출신의 과학자인 힐랜더씨는 자신의 연구 결과물을 통해 직·간접적인 흡연이 여러 가지 질병의 원인이 된다는 사실에 대한 반론을 제기해 주목을 받은 바 있다. 그런데 2001년 3월 제네바의 한 환경운동가가 “이 과학자가 스위스에 본사를 둔 한 다국적 담배회사에 비밀리에 고용된 사람이며, 정기적으로 음성적인 자금 지원을 받아왔다”고 폭로한 것이다. 이 과학자는 결백을 주장하며 적극 해명에 나섰고, 폭로에서 지목된 담배회사와 함께 명예훼손 혐의로 환경운동가를 고발하면서 수년간의 진실 싸움이 시작되었다.
우선 힐랜더씨가 소속돼 있던 제네바대학쪽에서 가장 먼저 내부 조사가 진행됐다. 외부에서 이 대학 연구 결과물 전체에 대해 학문적 중립성을 의심할 수도 있는 초유의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2001년 12월 발표된 조사보고서는 “그의 연구방법론에 다소의 문제는 있었지만, 독립적인 과학자로서 어떠한 부정도 발견할 수 없었다”라며 힐랜더씨의 손을 들어주었다. 법정에서도 이 과학자가 담배회사쪽과 만난 적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결정적으로 이 회사에서 금품을 받았거나, 그래서 이 회사를 위해 그의 과학적 연구 결과물을 남용했다는 주장은 인정되지 않았다. 이 사건을 폭로한 환경운동가가 궁지에 몰리자 지역 환경운동단체들과 금연운동단체들, 그리고 일부 과학자들이 합심해 증거를 수집하고 자료를 보충하면서 법정 싸움이 수년간 지속되었다. 결국 2003년 법원은 “이 과학자가 과거 담배회사쪽으로부터 상당한 자금을 지원받은 바 있으며, 이 사실을 숨긴 채 관련 연구를 진행해왔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었고, 오히려 그가 명예훼손 혐의로 고발했던 환경운동가의 주장이 모두 사실이었음이 밝혀졌다. 그리고 그가 소속됐던 대학쪽에서도 ‘힐랜더 사건 진상규명위원회’를 재조직해 그가 연구자가 갖추어야 할 학문적 중립성을 어겼다는 결론을 내리면서 이 사건은 사실상 종결되었다.
공공장소 금연 시행될까
4년여를 끌어온 ‘힐랜더 사건’은 담배의 천국이자 금연운동의 불모지였던 스위스에서도 금연운동이 활성화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가장 먼저 시발점이 된 곳은 바로 그 문제의 과학자가 소속돼 있던 제네바대학이다. 이 대학은 2004년 10월 새 학기가 시작됨과 동시에 학교 전역을 금연구역으로 선포했다. 대학 구성원들은 이를 준수할 것임을 다짐하는 서명을 했으며, 금연을 계획한 학생들을 돕기 위한 상담실도 운영하기 시작했다. 사실 우리에게는 익숙한 담배를 피우기 위해 건물 밖에 나갔다 오는 풍경이 이곳 스위스에서는 낯선 모습들이었지만, 이제 적어도 이 대학에서는 일상적인 일이 된 것이다. 최근 인근 국가인 이탈리아에서는 금연법이 전격 시행되어, 모든 공공장소에서의 흡연이 불가능해져 내부적으로 많은 논란이 일고 있다. 이를 계기로 최근 스위스에서도 이에 대한 논의가 금연운동단체들을 중심으로 서서히 부상하는 중이다. 그러나 다른 나라들에 비해 두꺼운 애연가층을 유권자로 가진, 그리고 세계 주요 담배회사들의 본사를 유치한 스위스로서는 결코 쉽지 않은 결정이 될 것이다. 과연 ‘담배의 나라’라는 수식어가 잠시 생겼다 사라지는 말이 될지, 아니면 스위스를 대표하는 또 하나의 상징이 될지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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