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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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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러온 미사일, 박힌 인간 빼다

등록 2005-01-13 00:00 수정 2020-05-03 04:24

<font color="darkblue">미군기지 만들기 위해 데이고가르시아 주민들을 무자비하게 쫓아낸 미·영 정부 </font>

▣ 런던=줄리언 체인 전문위원 joimsook@hotmail.com

디에고가르시아는 인도양의 차고스 제도에 있는 작은 섬이다. 이라크전과 아프가니스탄전에서 미국의 B52폭격기와 스텔스기가 진격한 기지로서 중요한 역할을 한 곳이다. 여기에는 군인 4천명이 살고 있으며, 활주로와 핵잠수함을 위한 선창 두곳과 배 30척을 정박시킬 수 있는 항구 한곳이 있다. 그 밖에 위성 청취국을 비롯한 여러 군 시설이 배치돼 있다. 이 섬은 미국 행정부 관리들의 표현에 따르면 ‘필수불가결한 진격지’이며 ‘비할 데 없이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이다. 또 이곳은 시사주간지 <타임>과 <워싱턴포스트>의 주장에 따르면 테러 용의자들을 감금하고 있는 저스티스 기지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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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들을 ‘정화 대상’으로 몰아

그러나 이러한 막강한 위용을 자랑하는 미국의 군사기지라는 명성의 이면에는 영문도 모르고 고향에서 쫓겨난 원주민의 통한과 눈물이 있다. 이들은 원래 유럽의 식민지로서 코코넛 생산을 위해 아프리카와 인도에서 수입된 노예의 후예들이었다. 5천명이 넘는 이들 카오시안은 대부분 미국이 이곳에 미군기지를 설치하기로 계획하면서 살던 데서 쫓겨나 가까운 나라인 마우리티우스의 슬럼가에서 가난하게 살고 있다. 나머지는 인근 세이셀스와 영국에 흩어져 살고 있다.

디에고가르시아가 미국의 새 군사기지로 물망에 오른 것은 수에즈 동부에서 영국의 군사적 영향력이 서서히 퇴색함에 따라 이 공백을 대체하려던 미국과 영국이 1960년대 초 비밀 협상을 벌이면서부터다. 즉, 미국은 중동과 남아시아를 감시할 수 있는 곳을 물색하던 중이었다. 지금도 이 섬은 영국의 식민지로서 영국의 소유로 되어 있으나 영국은 전략적인 의미에서 동맹국 미국을 지원했고, 폴라리스 핵미사일까지 싸게 팔겠다는 미국의 제안을 포함한 비밀 거래의 대가로 이 섬에 미군기지의 주둔을 허용하게 된다.

30년 만에 해제되는 비밀 문서들이 공개되면서 영국과 미국이 이 섬 원주민들의 존재를 어떻게 인식했으며 어떻게 쫓아냈는가 등이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다. 식민지배국의 고위 공무원들은 1966년 “우리는 아주 냉철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섬엔 바위와 갈매기 말고는 토착민이란 없다”라고 쓰고 있다. 그러나 이들도 원주민의 존재를 영 무시할 순 없었는지 “불행히도, 어디서 흘러들어왔는지 근본도 모르는 타잔 무리들과 프라이데이(<로빈슨 크루소>에 나오는 원주민 시종)들이 갈매기들 사이에 꼽사리 끼어 살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고 쓰고 있다. 또 다른 메모에는 “영국과 미국은 현 거주자들을 다른 곳으로 옮겨놓는 일을 확실히 해야 한다” “어떤 상황에서도 어떤 (기지들)이 세워질 것인지를 말해서는 안 된다”라고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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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어떤 번거로운 일이라도 사전에 깨끗이 “정화돼야 한다”고 고집했다. 주민들의 허가를 얻고 거기에 함께 사는 입장이 아니라, 적반하장으로 주민들을 거추장스럽고 정화돼야 할 대상으로 처음부터 인식하고 몰아내기 작전을 시작한 것이다. 나아가 미·영 당국은 아예 주민들이 이후에도 발을 들이지 못하도록 법령을 만들었다. 1965년과 1971년 이민법령에는 ‘지방의회 명령’으로 누구도 제도에 허가 없이는 살거나 돌아가지 못하며 만약 이를 어기면 구금할 수도 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물자 공급 끊고, 개 도살하고…

이 법은 영국 국회의 심의를 거치지 않고 담당 관리 몇몇이 멋대로 만든 것으로 오직 소수의 구독자를 가진 영국령 인도양 관보(기관지)에 게재됨으로써 공표된 것으로 간주됐다. 결국 섬 주민들은 영문도 모르고 섬을 떠나라는 통고를 받게 된다. 식민지 관리들은 그들을 몰아내기 위해 물자 공급마저 끊어버렸고, 인근 마우리셔스섬으로 잠시 장을 보러 떠났던 사람들은 영영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게 되었다. 1971년 섬에 남아 있던 사람들이 키우던 1천여 마리의 개가 당국에 의해 도살되는 등 기지 건설을 위한 ‘정화’ 작업은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결국 1973년 남아 있던 사람들은 각자 보따리 하나씩을 지닌 채 물과 식량 부족으로 굶주림에 시달리면서 철제 화물칸에 실려 마우리셔스로 강제로 끌려가서는 아무도 없는 루이스항의 선창에 떨구어졌다.

이같은 주민 소개 작전을 정당화하기 위해 영국 정부는 유엔에 그 섬에는 원주민이 없으며 카고시안들은 임시 노동자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원주민들은 거기에서 몇백년 동안 살았던 사람들이고, 사실 대영제국에 속한 주민들이었다. 비록 65만파운드의 보상을 받았다고는 하나 아무런 사전 대책 없이 쫓겨난 이들은 타향 땅 마우리셔스에서 그저 이방인으로서 생계수단이나 일자리조차 찾기가 어렵다. 이들은 곧 빈민으로 전락했고 많은 사람들이 가난과 슬픔으로 죽어갔다. 또 일부는 자살을 택하고 말았다.

이 비극은 우연히도 포클랜드 전쟁으로 알려지게 된다. 1982년 아르헨티나가 영국 식민지 포클랜드를 침공하자 당시 마거릿 대처 총리가 전쟁으로 맞섰을 때 인권운동가들은 영국이 포클랜드의 백인은 대영제국 시민으로 취급해 전쟁까지 치르면서, 디에고가르시아의 흑인 카고시안들은 대영제국 주민이기는커녕 사정없이 다른 나라로 내쳐버린 영국의 이중적 태도를 비판하고 나선 것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카고시안들에 대한 몰인정한 태도를 인종주의로만 설명할 순 없다. 전쟁 직전 영국 정부는 포클랜드를 아르헨티나에 이양하려는 협상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리고 대처는 포클랜드 주민들에게 영국시민권을 주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막상 아르헨티나가 먼저 전쟁을 일으키자 기존 정책을 바꿔 대처는 영유권을 주장한 것이다.

인권운동가들, 미국 법정으로

아무튼 포클랜드 전쟁 이후 디에고가르시아를 둘러싼 논쟁이 불거지자 영국 정부가 카고시안들에게 보상금으로 400만파운드를 더 지불했으나 여전히 자기 조상의 무덤을 방문하는 것조차 허가해주지 않았다. 원주민들은 자기들이 읽지도 못하는 영어로 쓰인 문서에 서명을 함으로써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고향에 돌아갈 권리를 양도해주고 말았다. 해묵은 비밀 문서가 해제되고 과거사가 햇빛을 보게 되자 원주민인 올리비에 밴콜트는 이 사건을 법정에 고발했다. 2000년 11월 담당 판사들이 “원주민들을 쫓아내는 행위를 합리화할 만한 아무런 근거가 없다”고 판정함으로써 귀향을 원하는 원주민들에게 한줄기 서광이 비치는 듯했다. 그러나 2003년 청문회에서 판사는 정부의 행위가 법에 어긋나는 것은 아니라고 애초 판결을 뒤집는 결정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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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6월10일 외무부 차관 빌 램멜은 “원주민들은 섬으로 돌아가도록 허락되지 않을 것”이라면서 이 섬은 홍수 피해 때문에 주민들이 살기에는 위험해 원주민들을 소개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그 섬은 사실 세계에서 가장 습한 섬 가운데 하나임에도 담수가 부족하고, 사람이 살기에는 너무 많은 비용이 들며, 주민들이 자연환경을 파괴할 것이라는 등 앞뒤가 맞지 않는 궤변을 늘어놓았다. 이는 미국 정부가 미군기지를 외부에 “천연의 모래사장, 낚시와 다이빙을 즐길 수 있는 곳”이라고 선전한 것과는 딴판이었다.

인권운동가들은 이 사건을 미국 법정으로 갖고 들어갈 것이라고 말한다. 이제 원주민들은 고향을 강제로 떠나게 되었을 때의 고통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우리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전에 결국 미쳐버리고 말았다.” “우리는 이국에서 제대로 적응할 수 없었다. 우리는 돌아가고 싶다. 비록 그곳의 삶이 단순할지라도 우리의 고향 땅이다. 우리는 우리의 아이들이 거기서 살기를 원한다.”

미국은 아무리 군사기지가 필요하다 하더라도 꼭 주민들을 다 몰아내고 미군들만의 천지를 만들어야 직성이 풀리는 걸까. 오만불손한 식민정책의 과거사가 서서히 껍질을 벗으면서 많은 이들의 분노를 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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