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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당 잔당, 타이군 용병이 되다

등록 2004-12-31 00:00 수정 2020-05-03 04:23

[아시아 네트워크 | 정문태의 비밀전쟁 발굴3]

70년대엔 ‘레드 메오’, 80년대엔 국경지역 타이공산당 박멸작전에 동원돼야 했던 기막힌 운명

▣ 타이-버마, 타이-라오스 국경·타이베이=정문태/ 국제분쟁 전문기자 · 아시아 네트워크 팀장 asianetwork@news.hani.co.kr

1967년 미국 중앙정보국(CIA) 정보보고서에 따르면 국민당 잔당들은 타이-버마 국경 지역을 잇는 거의 모든 마약루트를 장악한 것으로 드러난다. 그 시절, 국민당 잔당이 버마와 라오스 국경에서 생산한 마약은 타이 정부 실권자인 경찰 총수 파오 스리야논다(Gen. Pao Sriyanonda) 장군의 보호 아래 방콕을 거쳐 온 세상으로 퍼져나갔다.

그러나 1967년 국민당 잔당과 쿤사 사이에 ‘마약전쟁’이 벌어지자, 느닷없이 타이 정부는 “국민당이 타이 국경을 침범했다”며 수천명의 군대를 버마 국경지대로 파견해 국민당 잔당들의 산악 요새 마을을 모조리 접수했다. 이는 1961년부터 국민당 잔당들이 타이 정부와 CIA의 지원 아래 타이 영내에 기지를 차렸던 사실을 놓고 보면 그야말로 ‘국제적 코미디’였다. 어쨌든 국민당 잔당 마을을 장악한 타이 정부의 ‘코미디’는 계속 이어졌다. 타이 정부는 외국 군대인 국민당 잔당이 점령한 자국 영토를 ‘탈환’했지만, 그 외국 군대인 국민당 잔당을 무장 해제시키지 않음으로써 또 한번 세상을 웃겼다. 물론 타이 정부의 코미디에는 나름대로 말 못할 사정이 있었다. 그 무렵 타이 북부 지역에서 봉기한 ‘레드 메오’(Red Meo) 소탕전 때문에 타이 정부는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타이 정부군 산하의 준군사조직으로 편입

1967년 5월, 타이 경찰이 치앙라이(Chiang Rai) 지역 양귀비 재배를 단속하면서 실랑이를 벌이다 메오족- 타이인들이 몽족(Hmong)을 일컫는 말- 마을을 불태우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 일로 산악 민심이 흉흉해지자, 10월 들어 타이 정부는 치앙라이주와 난(Nan)주에 대해 ‘공산주의 진압작전’이라며 중무장 경찰과 군대를 파견해 메오족을 더욱 자극했다. 이어 1968년 초, 타이군이 네이팜탄으로 메오 마을들을 공격하자 흥분한 메오족들이 산악 ‘해방구’를 설치해 무장투쟁에 나섰다. 그러나 타이군이 ‘산악전투’에 치명적인 결함을 보이면서 사태가 더욱 꼬이자, 타이군과 타이군에 뒷돈을 대던 미국은 산악 게릴라전의 명수인 국민당 잔당을 동원하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해서 타이 정부는 외국 군대인 국민당 잔당을 불법자로 간주하면서도, 자신들의 필요에 의해 그 불법자들을 정부군 산하의 준군사조직으로 편입했다. 그리고 1970년 12월 국민당 잔당 제5군사령관 돤시원은 휘하 부대원들을 주력으로 아카(Akha), 리수(Lisu), 라후(Lahu) 같은 산악 소수민족을 조직해 타이군 대신 대 ‘레드 메오’ 박멸작전에 뛰어들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실제로 1970년부터 1974년까지 약 1500명에 이르는 국민당 잔당이 레드 메오 진압작전에 참여했다. 그이들이 없었다면 그 작전은 불가능했다. 그들 가운데 300여명이 전사했고 400여명이 중상을 입었다.” 레드 메오 진압작전 당시 진압본부에서 국민당 잔당을 타이군으로 조직했던 타이 육군 퇴역 대령 칸차나(Col. Kanchana Prakatvudhison)의 증언이다.

그러나 같은 작전에 참여했던 국민당 잔당 제3군 소속 돤궈샹(段國相·78) 대령의 말은 조금 달랐다.

“우리쪽 전사자만 거의 1천명이나 됐어.” 돤 대령의 말에 따르면 국민당 잔당(그이들이 조직했던 소수 산악민족 포함) 참전자 가운데 3분의 2가 죽거나 중상을 입었다는 결론이 나온다. 국민당 잔당 희생자 수를 통해 국민당 잔당이 어떻게 ‘전쟁 도구’로 활용됐는지, 또 그 산악 전투의 강도가 어떠했는지를 잘 알 수 있다.

“군인으로서 국민당 잔당과 관련된 역사를 말하자면, 비록 타이군이 그이들의 도움을 받았던 건 사실이지만, 외국인이자 외국 군대였던 그이들을 국내 전투에 활용했던 건 부끄러운 과거임이 틀림없어. 게다가 정부가 그이들을 제대로 대접하지 못했던 건 더욱….” 칸차나 대령은 외국인인 당신은 그런 타이 역사를 어떻게 보느냐는 질문으로 자신의 심경을 대신했다.

살아남은 잔당들, 시민증을 얻다

그렇게 ‘용병’이 된 국민당 잔당은 엄청난 인명피해를 입으며 군사적으로 타이군에 편입됐음에도, 타이 정부와 CIA는 오히려 국민당 잔당 제5군 본부인 도이 매살롱과 제3군 본부인 탐 응옵을 최악의 마약 생산기지라 폭로하면서 국민당 잔당을 윽박질러 새로운 전장으로 내몰았다. 그리고 1981년 국민당 잔당들은 다시 전쟁에 휘말려들었다. 타이군은 입헌군주제와 군사독재를 부정하며 타이-라오스와 타이-말레이시아 국경에서 무장 봉기해온 타이공산당(CPT) 박멸작전에 국민당 잔당을 동원했다. 타이군은 1970년대 ‘레드 메오’ 봉기 때와 마찬가지로 국경 산악을 근거지로 저항하는 공산주의자들을 진압하고자 ‘공산주의 저격수’를 자임해온 국민당 잔당 400여명을 타이공산당의 마지막 산악 해방구였던 펫차분(Phetchabun)에 ‘의용대’란 이름으로 투입했다.

“그 작전은 비밀리에 진행돼 당시 시민들은 물론 군 내부에서도 핵심 지휘관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몰랐어. 왜냐하면 국민당 잔당들을 민간인처럼 꾸며 전선에 투입했기 때문이야.” 칸차나 대령은 타이 정부가 국민당 잔당이라는 외국 용병을 다시 한번 국내 분쟁에 투입한 사실을 증언했다.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 않아. 너무 고통스러운 과거였어. 이제 남은 시간 동안 다른 사람들을 도우면서 사는 게 내가 할 일이라고 생각해.”

펫차분 작전에서 공산당 300여명을 죽였다는 천마오슈(陳茂修·87·치앙라이) 대령은 “다시는 되새기고 싶지 않다”는 말로 한평생 ‘반공 비밀전쟁’에 바친 자신의 이야기를 닫았다. “펫차분이 마지막 전쟁이었어. 일생 동안 공산주의자들과 싸워왔고, 후회 같은 건 없어. 난 군인이었으니!”

레이위톈(雷雨田·87·도이 매살롱) 장군은 평생을 ‘반공 비밀전선’에 바친 대가로 얻은 도이 매살롱 산상 호텔의 정원을 거닐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 혼신의 힘을 다해 타이 정부를 위해 싸웠던 국민당 잔당들은, 살아남은 그 잔당들은 타이 정부에서 ‘시민증’을 얻었다. 남의 나라에서, 남의 전쟁을 위해 싸우다 죽은 전우들이 보상금도 없어 사라져버린 대가였다.

그렇게 반세기를 온갖 전쟁터에서 보낸 국민당 잔당들은 이제 대부분 사라지고, 그 후손들이 타이 국경지대에서 ‘KMT’(국민당·Kuomintang)라는 달갑잖은 이름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국민당 잔당들은 아시아의 비극사였고, 냉전의 희생자들이었다. 그러나 국민당 잔당들을 국제 반공전선의 용병으로 이용해먹었던 미국 정부도 대만 정부도 타이 정부도 모두 철저히 입을 닫았다. 그렇게 해서 국민당 잔당은 버림받은 역사로 묻혀져왔고, 그이들에게 남은 건 오직 ‘국제 마약시장의 원흉’이라는 꼬리표뿐이었다.

누가 그들에게 돌을 던질 것인가

국민당 잔당들의 역사를 온전히 복구하지 않고는 아시아를 말아먹었던 ‘제국주의 비밀 침략사’도 그리고 아시아를 불바다로 만들었던 미국의 ‘비밀 반공전쟁사’도 모두 어두운 세계사의 공백으로 남겨지고 말 것이다.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역사 속에서 과연 아시아의 미래가 있을까?’ ‘누가 국민당 잔당에게 돌을 던질 수 있겠는가?’ 이 두 가지 화두를 안고 일곱달에 걸친 취재를 마쳤다.



용병의 선물, 쓸쓸한 최후



타이-버마 국경을 맞댄 팡(Fang)의 반마이 마을 한 구석에는 룽민즈자(榮民之家)란 간판을 단 중국식 출입문이 하나 서 있다. 이 문을 지나 가파른 계단 300여개를 오르면 초라한 합숙소와 마주친다. 이곳에선 ‘레드 메오’ 진압작전과 ‘타이공산당’ 박멸작전에 참전했던 국민당 잔당 전상자들을 수용하고 있다. 1988년 대만 정부가 마련해준 룽민즈자에는 가족 없는 전상자 43명이 어디로 흘러가는지도 알 수 없는 시간만 꼽으며 ‘그냥’ 살아가고 있다.
“리미 장군은 우리한테 대만으로 가라고 말한 적이 없어. 그저 우린 리미 장군이 가는 곳만 쫓아다녔을 뿐이야. 난 말야,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 근데 사정이 이러니….”
윈난성 징구(景谷) 출신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양쑹녠(楊松年·78) 룽민즈자 책임자는 한숨부터 쏟아내며 자료를 챙겨갖고 나왔다. 그 자료에는 룽민즈자를 짓기 위해 대만 정부가 350만바트(약 1억원)를 들였다는 사실과, 대만 종교자선단체(慈淸功德基金會) 기부금으로 수용자들에게 매달 1100바트(약 3만원)를 주고 있다는 기록들이 빼곡히 담겨 있다.
“대만 정부는 10년쯤 전부터 아예 지원을 끊었다.”
양씨는 못내 아쉬워했다. 이는 대만 정부가 국민당 퇴역군인들에게는 계급에 따라 엄청난 돈을 지급해온 사실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 국민당 잔당으로 1954년 대만으로 철수한 리차오쿠이(李朝魁·73·타이베이 쭝신촌) 대령의 경우 한국 돈으로 매달 200만원쯤 되는 돈을 받고 있다. 리차오쿠이 대령과 똑같은 국민당 잔당 군인 출신으로, 본토 수복을 꿈꾸었던 대만 정부를 대신해 반공전선ㅇ르 뛰었던 룽민즈자의 전상자들은 매달 3만원을 받고 있다. 그 3만원마저도 대만 정부가 아니라 자선단체 기부금이다. 대만 정부는 한국전쟁 때 포로로 잡혔다가 대만을 택한 본토 출신 사병 퇴역자들에게도 매달 40만원이 넘는 돈을 지급하고 있다.
이게 대만 국민당 정부를 위해, 중국 본토 수복을 위해, 공산당 박멸을 위해 대만 국민당 군인들과 같은 군복을 입고 평생을 싸우다 중상을 입은 국민당 잔당들의 현실이다.
돈타령을 했지만, 사실은 룽민즈자 사람들에게 아무런 희망이 없다는 게 더 큰 문제다.
윈난성 겅마(耿馬) 출신인 자잉왕(査英旺·60)씨는 14살 소년병으로 국민당에 참전했다. 그는 1972년 파탕의 ‘레드 메오’ 진압작전 때 낙하산 부대원으로 투입됐다가 지뢰를 밟아 왼쪽 다리를 잃고 목발에 의지한 채 룽민즈자에 살고 있다. 불행하게도 그이는 정신마저 가물가물해서 보는 이를 더욱 안타깝게 한다. 그이에게 유일한 낙이라곤 타이 정부에서 받은 시민증(사실은 국민당 잔당임을 확인하는 증)을 훈장처럼 만지작거리는 일뿐이다.
피부염으로 온몸이 만신창이가 된 윈난성 롱링(瀧陵) 출신 자오잉파(趙英發·85)씨는 알아듣기조차 힘든 가녀린 소리로 하루 종일 세상을 원망하고 있다. “리미 장군은 우리를 초대한 적이 없어. 그리고 자신은 대만으로 떠났어. 갈 수만 있다면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 근데 난 시민증이 없으니….”
자오씨 같은 이들은 아예 시민증조차 받지 못한 채 살아온 무적자(無籍者)다.
이런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 룽민즈자에서 먹을거리나 입을거리를 눈여겨본다는 건 사치스런 일이 되고 만다. 룽민즈자에는 콧구멍만 한 콘크리트 방만 죽 만들어져 있을 뿐, 아무것도 없다. 이곳에 가족도 없고 돌보는 이도 없는 늙고 깨진 전사들 43명이 모여 마지막 가는 인생을 탓하고 있을 뿐이다. 누가 이들에게 냄새나는 몸뚱어리를 탓할 것이며, 누가 이들에게 지저분한 옷을 탓하겠는가.
이런 게, 대만 정부의 본토 수복 꿈을 위해 일생을 바친 국민당 잔당들의 현실이다.
이런 게, 타이 정부를 위해 반공전선에 목숨을 바친 국민당 잔당들의 인생이다.
이런 게, 미국 정부를 위해 국제 비밀전쟁에 신명을 바친 국민당 잔당들의 최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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