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 네트워크 | 정문태의 비밀전쟁 발굴3]
CIA가 조직한 한국전쟁 참전 중공군 포로들… 60년대에 라오스와 중국 본토까지 투입되다
▣ 타이-버마, 타이-라오스 국경·타이베이=정문태/ 국제분쟁 전문기자 · 아시아 네트워크 팀장 asianetwork@news.hani.co.kr
몇해 전부터인가, 타이 사람들 사이에 ‘타이의 관문’이라는 뜻을 지닌 프라투 사이암이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타이에서 해가 가장 먼저 뜬다며 새해에는 제법 관광객들이 몰리기도 하는 곳인데, 라오스와 국경을 가르는 메콩강 협곡을 낀 푸치화산 일대를 일컫는다.
한 10년 전까지만 해도 바깥 세상과 단절된 그 험준한 산악에 파탕(Pha Tang)이라는 마을이 있다. 얼마 전부터 버찌술로 유명해진 파탕은 국민당 잔당들이 세운 마을로 현재 그 후손들 3천여명이 살고 있다.
파탕 마을 대형 불상의 비밀
파탕 마을에서 산꼭대기로 오르면 대형 불상과 정자가 안개에 가린 라오스와 타이쪽을 나란히 바라보고 있다. 대체 어떤 사연이 있었기에 오르기도 힘든 이 가파른 산악 국경에 부처를 앉혔을까?
아는지 모르는지, 황금빛 부처는 타이-라오스 국경을 바라보며 인자한 미소를 흘릴 뿐이다. 파탕 마을이 지닌 비밀스런 역사는 참으로 오랫동안 메콩강 협곡이 뿜어내는 짙은 안개에 감춰져왔다.
“우린 그런 거 잘 몰라요. 나이 많은 어른들께 여쭤보세요.” 집집을 돌아도 대답은 마찬가지다. 이미 1세대들이 대부분 세상을 뜨고 이제 2세대 손으로 넘어간 파탕 마을에서 국민당 잔당의 비밀을 캐낸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물론, 주민들 가운데는 냉전이 극으로 치달아가던 1960~70년대 이 산골짜기 파탕 마을이 국제 정치의 핵심에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도 없다.
중국 인민해방군에 쫓겨난 장제스의 국민당 잔당들이 1950년 초부터 윈난-버마 국경지대에서 미국과 대만 정부로부터 비밀 지원을 받으며 이른바 ‘반사회주의 방파제’ 노릇을 해오던 가운데, 1961년 1월 버마 정부군이 라오스 국경에 자리잡은 국민당 잔당 본부였던 켕랍(Keng Rap)과 몽 파리아오(Mong Pa-liao)를 공격해서 미국제 무기를 대량 발견하자 국제 사회에 큰 파문이 일었다. 그에 따라 비밀군사 작전이 탄로난 미국 대통령 케네디는 1961년 초 장제스를 압박해 이용가치가 떨어진 국민당 잔당 철수를 적극 추진했다. 그 결과, 1954년 6580명에 이어 다시 1961년 3월17일부터 4월12일 사이에 버마와 라오스 국경지대로부터 국민당 잔당 4196명이 대만으로 철수했다.
그러나 같은 시간, 미국 중앙정보부(CIA)는 대만으로의 송환을 거부한 채 타이 국경지대에 남은 돤시원(段希文) 장군의 제5군 소속 1800여명과 리원환(李文煥) 장군의 제3군 소속 1400여명 그리고 마쥔궈(馬俊國) 장군의 제1독립부대 정보요원을 포함한 총 3천명을 웃도는 국민당 잔당들을 재조직하고 있었다. 앞서 1959년 파테트 라오(Pathet Lao·라오스공산당)를 견제하기 위해 그린베레 8명을 라오스에 투입해서 소수민족인 몽족(Hmong)을 훈련시켜 정보요원으로 활용해오고 있던 CIA는 1960년부터 국민당 잔당들을 윈난에 투입해 중국의 대북베트남 지원 가능성을 염탐하고 있었다.
CIA는 버마와 국경을 맞댄 라오스의 남유(Nam Yu)에 비밀공작 본거지를 설치해 중국과 라오스 공산당을 동시에 훑어나갔다. 그 과정에서 대만 국방부 본토정보작전부(IMOB)로부터 직접 명령을 받던 마쥔궈 장군이 이끄는 국민당 잔당 제1독립부대는 타이-버마-라오스-중국 국경지대를 비롯해 윈난 내부에까지 완벽하게 조직을 침투시켜 CIA의 정보전을 가능케 했고, 잔당 제3군과 제5군은 루트 개척으로 그 뒤를 받쳤다.
다시 한국전쟁으로 눈길을 돌리다
한편, CIA는 마쥔궈 장군의 정보조직과는 별개로 또 다른 특수 엘리트 부대를 조직했다.
세상에 거의 알려진 바 없는 이 특수부대는 인도차이나전쟁에서 프랑스군이 사용했던 부대 명칭을 그대로 베껴서 철저히 유령으로 위장했다. 이름하여 ‘특수대대 111’(Bataillon Special 111)이다. 1951~52년 비밀리에 국민당 잔당을 동원해 윈난을 공격했던 ‘한국전쟁 제2전선’이라는 실패작에 미련을 버리지 못한 CIA는 세계전사에 가장 비밀스런 부대 가운데 하나로 꼽을 만한 이 조직을 만들고자 다시 한번 한국전쟁으로 눈길을 돌렸다. CIA는 한국전쟁 때 포로로 잡힌 중공군 2만1300명 가운데 본국 귀환을 거부하고 대만을 선택했던 1만4715명 속에서 차출한 이들을 라오스 국경지대로 데려왔다. 그리고 ‘리텡’이라는 매우 유능한 부대장의 지휘 아래 1천여명으로 추정되는 요원을 지닌 ‘특수대대 111’을 창설했다. CIA가 조직한 이 ‘특수대대 111’은 라오스 북부를 거점 삼아 라오스와 중국 본토에까지 투입됐다.
“정확한 수는 기억할 수 없지만, ‘특수대대 111’에는 한국전쟁의 포로였던 중국인이 일부 있었던 게 사실이야.” CIA의 대라오스 비밀전쟁을 이끈 핵심요원 3명 가운데 한명으로 ‘특수대대 111’을 조직한 장본인이기도 했던 빌 영(Bill Young)은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기억력’ 탓으로 돌리며 피해갔지만, 그 부대의 존재와 중국인 전쟁포로의 활용 사실만큼은 정확하게 확인해주었다.
그러나 대라오스 비밀전쟁에 투입됐던 국민당 제3군 소속 잔당들이 세운 파탕 마을에서도 ‘특수대대 111’ 출신 요원들은 찾을 수 없었다. 딱 한 사람, 자신이 ‘특수대대 111’ 출신임을 밝히는 천싱지(陳興集·77살) 소령만이 생존해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이는 한국전쟁 포로와는 상관없는 윈난 출신 국민당 잔당이었다.
“이젠 모두 가고 없을 거야. 당시 중국 포로 출신으로 작전에 참여했던 이들은 모두 대만으로 되돌아가버렸으니 여기 타이 국경에서는 찾기 힘들걸세.” 천 소령은 대신 ‘마약왕’으로 불린 쿤사(Khun Sa)의 몽타이군(Mong Tai Army) 사령관이었던 장수취안(張書全)이 ‘특수대대 111’ 출신임을 증언했다. 만주 출신인 장수취안은 국민당 잔당으로 버마 국경에 쫓겨온 뒤 1952년 대만으로 갔고, 다시 1950년대에는 한국에서 정보원으로 일했던 인물이다. 그 뒤 1960년부터 1963년까지 ‘특수대대 111’ 요원으로 라오스 공작에 참여하다 1960년대 중반 버마 샨(Shan)주에서 쿤사와 손을 잡고 마약사업에 뛰어들었다. 장수취안은 현재 1996년 버마 정부에 투항한 쿤사를 따라 랑군으로 옮겨간 뒤 버마군병원에 입원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천 소령은 더 깊숙한 내막을 증언하지 못했다. 자신이 어느 전선에 투입됐는지, 그게 라오스였는지 중국이었는지도 정확히 더듬어내지 못했다. 그건 천 소령의 기억력만을 나무랄 문제가 아니었다. 이번 취재에서 만난 많은 증언자들 가운데 일반 장교나 사병 출신들은 당시 작전 내용과 작전 지역마저 정확히 알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CIA 이야기는 들어본 적도 없어. 우린 그냥 지휘관이 가자면 갔고 싸우라면 싸웠지. 산으로 뒤덮인 국경지대에서 어디가 어딘지 알 수도 없었어. 굳이 알 필요도 없었고.”
파탕 마을에서 만난 장산(張山·89살·제3군 출신)의 말마따나, 험난한 산악으로 이뤄진 국경지대의 특성을 이용해 CIA가 작전에 참여한 이들에게마저도 정보를 노출하지 않은 채 철저한 비밀작전을 수행했던 탓이다. 특히, CIA는 ‘특수대대 111’의 존재 사실을 대만 군부의 핵심조차 모르게 진행했음이 드러났다. “그런 부대는 처음 들어본다. 장 총통이 직접 관리한 밀령이 아닌 다음에야, 국민당 군과 관련된 사실을 내가 모를 리 없어.”
1949년 장제스와 함께 대만으로 온 국민당 장군 가운데 한명이자 군 정보부에서 핵심 요직을 두루 거친 황젠츠(黃劍叱·94살·타이베이) 퇴역 소장마저도 ‘특수대대 111’의 존재 사실을 부정할 정도였다.
그렇게 CIA를 앞세운 미국은 암흑 속에서 대라오스 비밀전쟁을 감행했다.
“라오스를 인도차이나반도 사회주의 혁명을 막는 방파제로!” 미국은 1955년 이른바 ‘피의 사이공’ 시가전이 끝난 뒤 베트남에서 발을 빼는 프랑스를 대신해 ‘반공’을 내걸고 베트남에 개입했다. 그리고 1959년 라오스 북부 샹쾅주(Xieng Khouang)에 CIA 요원과 그린베레를 투입해 방파오(Vang Pao)를 지도자로 삼아 몽족 게릴라 2만여명을 조직했다. 이어 1960년에는 CIA를 통해 국민당 잔당을 재조직했다. 미국은 그 ‘비밀전쟁’을 통해 베트남전쟁 기간 동안 중국의 대북베트남의 지원 가능성을 차단하는 한편, 라오스 북부를 관통하는 북베트남 보급로인 ‘호치민 루트’를 격파하고 동시에 라오스 공산당의 박멸을 노렸다.
대라오스 공습으로 발전하다
그 ‘비밀전쟁’은 1964년 5월25일부터 대라오스 공습으로 발전해나갔다. 그로부터 미국은 1973년까지 9년간 대라오스 ‘비밀전쟁’에 무려 200만t에 이르는 각종 폭탄 700만개를 기껏 인구 400만명 남짓한 라오스에 투하했다. 미국의 대라오스 폭격은 역사상 유례없는 대규모였지만 모든 것을 비밀리에 진행한 탓에 심지어 미군 고위 당국자들마저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미군은 그 ‘비밀전쟁’을 통해 라오스 국민 한 사람의 머리 위에 0.5t에 이르는 폭탄 1.75개씩을 뒤집어씌운 셈이다. 지금까지 전사에 최대 규모 융단폭격으로 기록된 한국전쟁에서 미군이 사용한 폭탄과 포탄을 모두 합친 게 49만5천t이었으니, 대라오스 공습에 사용한 200만t이라는 규모를 짐작하고도 남을 듯하다. 그 비밀전쟁을 위해 미군은 9년 동안 평균 7분30초마다 전폭기를 띄워 무려 58만344회나 출격하는 대기록을 세웠다. 그 결과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달 분화구를 빼닮은 폭심지가 아직도 라오스의 온 천지를 뒤덮고 있지만, 미국은 여전히 ‘비밀전쟁’에 대해 시치미를 뗄 뿐 입을 연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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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여름 대만에는 유난히 태풍이 많았다. 한놈이 할퀴고 가면 일주일도 못 돼 또 다른 놈이 덮쳐왔다. 피해 복구를 할 겨를도 없이 마구 난타했다. 그 태풍과 태풍 사이를 뚫고 ‘특수대대 111’이라는 해묵은 과거사를 좇아 ‘타이베이 퇴역 군인의 집’(臺北榮譽國民之家)을 찾았다. 대만은 역시 잘사는 나라, 돈 많은 나라임에 틀림이 없었다. 국민당 잔당들 가운데 일부가 살고 있는 타이-버마 국경 팡(Fang) 지역 반마이(Ban Mai)의 낡아빠진 합숙소를 연상하며 타이베이 퇴역 군인의 집을 찾았던 나는 들머리에서부터 ‘어마어마’한 규모 앞에 넋을 잃었다. “크다” “깨끗하다” “좋다”… 안내자를 따라 장수런(張樹仁·퇴역 소장) 주임 방으로 가는 동안 나는 감탄사를 흘렸다.
1975년 만든 이 퇴역 군인의 집은 현재 독신자 1083명을 수용하고 있다. 그이들 가운데 65%는 한국전쟁 때 포로로 잡혔던 중국 본토 출신의 군인들이다. 당시 중국인 전쟁포로 2만1300명 가운데 본국 송환을 거부하고 대만으로 ‘투항’한 이들은 70%에 이르는 1만4715명이나 되었다. 그 중국본토 출신의 전쟁포로들이 1954년 1월23일 지룽항에 내리자 대만 정부는 반공의사라 치켜세우며 거국적인 환영식을 베푼 뒤, 필요에 따라 국민당의 현역 군인으로 둔갑시켰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그 ‘반공 의사’들이 하나둘씩 현역에서 제대하자 대만 정부는 이 퇴역 군인의 집을 만들어 오갈 데 없는 이들을 수용해왔다. 그렇게 퇴역 군인의 집은 중국 본토 출신 전쟁포로들을 위해 만들어졌다. 그러다 1990년부터 더 이상 해당자들이 나오지 않자, 복무 중 부상당한 일반 전역자들을 함께 수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퇴역 군인의 집을 찾아가면서 지니고 갔던 ‘꿈’은 여지없이 깨졌다. 장 주임뿐만 아니라, 전쟁포로 퇴역 군인들 가운데 그 누구도 ‘특수대대 111’을 아는 이가 없었다. 타이-라오스 국경, 타이-버마 국경을 이 잡듯 뒤졌고, 이 분야의 연구자란 연구자는 모조리 수배했지만 ‘특수대대 111’이라는 이름조차 아는 이들이 없었던 터라, 퇴역 군인의 집을 마지막 ‘수색지’로 여겼던 탓이다.
“국민당 전사(戰史)는 누구보다 내가 잘 알고 있어. 그런 부대는 들어본 적도 없고, 여긴 그런 부대 출신자들도 없어. 만의 하나 그런 부대의 출신자가 있다면 그걸 내가 모르겠어?” ‘행정원국군퇴제역관병보도위원회’(行政院國軍退除役官兵輔導委員會)라는 거창한 직함을 지닌 장 주임을 의심하며 여러 차례 캐물었지만, 그이는 오히려 나를 답답하게 여겼다.
역사는 그렇게 답답하기만 했다. 적어도 “전쟁포로들이 국민당에 충성심을 과시하고, 또 그들 가운데 일부를 라오스 국경으로 투입했을 때 중국 공산당쪽으로 도망치지 못하도록 몸에 문신을 새겼다”는 CIA 요원 빌 영의 증언은 분명한 사실로 확인할 수 있었지만, 그곳에는 살아 있는 역사가 없었다.
모두 죽어버렸거나 아니면 아직도 누군가에 의해 깊이 감춰져 있거나!
한국전쟁은 아직도 온전한 역사로 기록되지 못한 채, 그렇게 멀고 먼 아시아 국경의 골짜기를 헤매고 있을 뿐이다. 국제 정치는 한국전쟁을 끼고 온갖 비밀공작을 통해 ‘마술’을 부려왔지만, 한국에서는 50년도 더 된 그 전쟁을 놓고 아직도 “방아쇠를 누가 먼저 당겼나”라는 입씨름만 하고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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