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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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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송환을 거부한다”

등록 2004-12-24 00:00 수정 2020-05-03 04:23

[아시아 네트워크 | 정문태의 비밀전쟁 발굴2]

한국전쟁 휴전 뒤 미국에 버림받은 국민당 잔당, 상당수가 대만으로 안 가고 불법 무장세력으로 남아

▣ 타이페이= 정문태/ 국제분쟁 전문기자 asianetwork@news.hani.co.kr

1952년 말, 한국전쟁 휴전협상이 무르익어가는 가운데 ‘제2전선’에서 효과를 거두지 못한 워싱턴은 국민당 잔당을 유효한 도구가 아닌 부담으로 느끼기 시작했다. 워싱턴의 분위기는 국민당 잔당보다 버마 정부를 끼고 중국공산당을 견제하자는 쪽으로 서서히 기울어갔다. 1953년 초, 트루먼의 후임 대통령 아이젠하워 주변에서는 국민당 잔당을 빌미로 중국공산당이 버마를 침공하거나, 아니면 버마가 중국공산당과 손잡는 최악의 사태를 막아야 한다는 소리가 높아졌다. 그 무렵, 1950년부터 국민당 잔당과 버마공산당(CPB) 게릴라 양쪽을 상대로 벅찬 전쟁을 벌이면서 워싱턴을 향해 국민당 잔당 지원 철회를 요구해온 버마의 우누(U Nu) 총리 정부가 국민당 잔당 소탕을 위해 오히려 버마공산당과 연립정부를 수립할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았다. 아이젠하워는 곧장 국민당 잔당 철수를 결정했다.

그러나 장제스는 타이베이 주재 미국 대사 칼 랭킨이 들고 온 아이젠하워의 결정을 완곡하게 거부했다.

사진설명;한국전쟁 제2전선으로 윈난 내부를 공격했던 국민당 잔당들이 중국 국경을 넘기 전 동료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왼쪽). 국민당 잔당의 버마내 비밀전쟁으로 골머리를 앓았던 당시 버마총리 우누(오른쪽).

유엔, 대만과 국민당 잔당을 비난하다

“리미 장군과 그의 부대를 철수하는 건 고통스러운 일이다. 특히 리미를 최후의 구원자로 여겨온 윈난 사람들에게는….”

그러자 우누는 장제스가 버마를 공격하든지 아니면 자신이 총리직에서 쫓겨나든지 둘 중의 하나로 사태가 귀결될 것이라 믿으며 위기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하여 우누는 워싱턴이 국민당 잔당 해결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다고 성토하며 미국과 맺었던 경제협력협정을 1953년 3월 말 파기해버린 뒤 ‘버마 사안’을 유엔으로 끌고 갔다.

4월31일 유엔이 ‘버마 사안’을 놓고 토론을 시작하자 장제스는 “가능한 한 많은 리미 장군 잔당을 대만으로 철수시킨다”고 밝혔으나, 유엔은 대만과 국민당 잔당의 행위를 비난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켜버렸다. 유엔 결의안에 따라 대만, 버마, 미국, 타이가 참여하는 ‘4개국 위원회’가 결성되어 국민당 잔당 철수를 주관하게 되었다. 6월 들어 4개국 위원회는 버마가 공격을 중단하고 국민당 잔당은 타이를 거쳐 대만으로 철수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장제스가 리미 장군에게 철수 명령 내리기를 주저하면서 “35일 내에 최소 5천명을 철수시키라”는 버마의 요구를 2천명으로 하향하자, 분노한 우누는 4개국 위원회를 탈퇴했다.

사태가 다시 혼란에 빠져들자, 9월 초 아이젠하워는 장제스와 우누 사이를 중재했다. 그 결과 1953년부터 1954년 사이 11달 동안 리미 장군을 포함한 국민당 잔당 5700여명과 관련자 880여명이 대만으로 철수했다. 1954년 5월30일, 리미 장군은 대만으로 철수하면서 공식적으로 ‘윈난성반공구국군’ 해체를 선언했다.

그 과정에서 대만으로 철수하지 않고 국경에 잔류한 국민당 잔당은 리미 장군 후임으로 류위안린(柳元麟) 장군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한 뒤, 복잡하게 얽혀 있던 윈난성반공구국군을 제1군(사령관 뤼런하오·呂仁豪), 제2군(사령관 푸징윈·甫景雲), 제3군(사령관 리원환·李文煥), 제4군(사령관 장웨이청·張偉成), 제5군(사령관 돤시원·段希文)으로 재편했다. 그리고 1년 뒤인 1955년 6월, 대만으로 철수했던 국민당 잔당 가운데 600여명이 버마와 인접한 라오스 국경으로 되돌아왔다.

그렇게 제1차 철수가 완료되었음에도 현지에 남은 국민당 잔당들로 인해 버마-라오스-중국-타이를 낀 국경지대 마찰은 잦아들지 않았다. 1954년과 1957년 버마정부군의 공격을 받은 국민당 잔당들은 라오스 국경쪽으로 후퇴해 매콩강을 낀 켕랍(Keng Lap)과 몽 팔리아오(Mong Pa-liao)에 새로운 본부를 마련했다. 1958년 버마 정부는 여전히 국경에 남아 있는 국민당 잔당 수를 1350명이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1958년 말 라오스 국경쪽에 있던 국민당 잔당들이 다시 버마 국경으로 되돌아오면서 상황이 돌변하기 시작했다. 그 무렵 중국 공산당이 ‘대약진운동’(1958~1961)을 벌이면서 정치·경제적 혼란이 일자, 본토 회복의 꿈을 버리지 못한 장제스는 다시 한번 기회라 여기며 아이젠하워와 그 후임 케네디에게 거듭 국민당 잔당 지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워싱턴은 더 이상 국민당 잔당에 관심이 없었다.

머릿수 채우려 몽족까지 송환시켜

그럼에도 국민당 잔당은 대약진운동의 여파에 따라 중국에서 버마로 넘어온 이들을 규합해 1960년 말 5천~6천명에 이르는 병력을 갖췄다. 위기로 판단한 우누는 1960년 10월 “인민해방군이 버마 영내 12마일까지 진격해서 국민당 잔당을 공격할 수 있다”는 조건을 내걸고 중국과 손을 잡았다. 결국 1961년 1월26일, 2만여명에 이르는 인민해방군이 버마의 샨(Shan)주 켕퉁(Kengtung)쪽으로 진격했고, 버마 정부군은 메콩강쪽 몽 팔리아오를 공격했다. 국민당 잔당은 300명이 넘는 전사자를 내고 타이와 라오스 국경으로 쫓겨났다. 그들 가운데 400~500명은 라오스군으로 편입되면서 살길을 찾아갔다.

한편 버마 정부군이 국민당 잔당들의 본거지였던 켕랍과 몽 팔리아오 공격에서 미국제 무기를 대량 발견한데다, 버마 공군이 국경지대에서 대만 소속 미국제 항공기(PBY)를 격추시키면서 워싱턴과 타이베이 사이에는 큰 혼선이 빚어졌다. 곧장 케네디는 버마 현지에 조사단을 파견했고, 장제스에게 강력한 항의 전보를 날려 국민당 잔당 소환을 압박했다. 동맹국 맹주의 압박을 못 이긴 장제스는 마침내 ‘꿈’을 접고 국민당 잔당 철수를 결정했다.

그렇게 해서 1961년 3월17일~4월12일에 버마와 라오스 국경지대에서 국민당 잔당 3371명과 그 관계자 825명이 대만으로 철수했다. 그러나 돤시원 장군의 제5군 소속 1800여명과 리원환 장군의 제3군 소속 1400여명, 마쥔궈(馬俊國) 장군의 제1독립부대 정보요원을 포함한 총 3천명을 웃도는 국민당 잔당들이 대만으로 송환을 거부한 채 타이 국경지대에 남았다. 그로부터 버마와 국경을 맞댄 타이의 도이 매살롱(Doi Mae Salong)은 국민당 잔당 제5군, 그리고 탐 응옵(Tam Ngop)은 제3군 본부가 되었다.

여기서 눈여겨볼 지점이 있다. 총 병력 수 4천~5천명으로 추산했던 국민당 잔당 가운데 공식적인 송환자 수가 4196명에 달했는데 어떻게 현지에 남은 잔당들이 3천여명이나 될 수 있는가라는 의문이다. 그건 한때 켕랍에서 무전병으로 근무하다 1961년 제2차 송환 때 대만으로 건너간 국민당 잔당 출신 친이후이(覃怡輝·중앙연구원 중산인문사회과학연구소) 교수의 증언을 통해 풀어낼 수 있다.

“머릿수를 채우려고 국민당과 관계없는 몽족(Hmong)을 비롯한 산악 소수민족들 아이나 여자들을 송환자에 포함시켜서 대만으로 보내고, 군인들은 국경에 남았던 거지.”

마약 루트를 끝까지 포기할 수 없었나

그렇다면 왜 국민당 잔당들은 대만으로 가지 않고 국경에 남았던가라는 의문이 또 남는다. 돤궈샹(段國相·78·제3군) 대령의 설명은 이랬다. “대부분 고향이 윈난인데 대만으로 가면 영영 되돌아오기 힘들다고 믿었기 때문이야.” 그러나 당시 국민당 잔당이 버마-타이-라오스를 잇는 국경지대의 마약 루트 90%를 장악하고 있었던 걸 보면, 돤 대령이 말하는 그런 개인적인 ‘감성’으로만 상황을 이해하기는 힘들다. 더구나 장제스가 여전히 잔당들을 직·간접적으로 지원하고 있던 상황을 염두에 둔다면.

아무튼, 제2차 철수가 끝나면서 대만 정부는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어떤 형태로든 국민당 잔당을 지원하지 않을 것이며, 국경에 남은 이들은 더 이상 대만 정부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로부터 국경에 남은 국민당 잔당들은 국적도 정체도 없는 불법 무장세력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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