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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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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주의의 유산, 아시아의 마약

등록 2004-12-10 00:00 수정 2020-05-03 04:23

돌이켜보면, 아시아의 마약은 식민주의자들이 전해준 ‘유산’이었다. 인디아를 점령한 영국 식민주의자들이 동인도회사를 통해 인디아의 아편을 중국에 팔아먹기 전까지만 해도 인디아와 중국은 7세기경 아랍 상인들이 전해준 양귀비를 편의작물로 재배하는 수준이었다.

이어 제2차 앵글로-차이니즈전쟁(Anglo-Chinese War·1856∼58)을 승리로 이끈 영국은 강압 무역협정을 통해 중국에서 양귀비 재배와 판매를 합법화했다. 그 결과, 1875년 윈난성의 경작 가능한 땅 가운데 3분의 1이 양귀비로 뒤덮였고, 런던의회가 아편 판매를 제한했던 1886년 한해 동안에만도 영국 상인들이 중국에 팔아먹은 아편은 6500t에 달했고, 또 1500만명에 이르는 중독자를 양산했다. 그 뒤 1906년 런던의회가 마약거래를 ‘부도덕’한 사업으로 규정하자, 비슷한 시기에 중국 정부도 마약폐기 운동을 벌였다. 그 여파로 중국 내 아편 생산이 줄어들자 버마산 아편이 윈난성을 거쳐 중국 시장으로 밀려들었고, 윈난성 정부는 밀수한 아편을 인도차이나의 프랑스 전매회사에 팔아넘기기도 하면서 동남아시아의 마약거래 중심지로 떠올랐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전까지만 해도 식민 당국들이 아편 수입에서 거두는 세금으로 목돈을 만졌던 탓에 시암(타이), 버마(영국 식민지), 라오스(프랑스 식민지) 접경지대 트라이앵글에서는 대규모 양귀비 재배가 이뤄지지는 않았다. 그랬던 것이, 1950년 초 국민당 잔당들이 넘어오면서부터 그 접경지대가 양귀비로 뒤덮이며 결국 ‘골든 트라이앵글’로 변해갔다.

이렇듯 아시아 지역의 마약 생산은 식민주의 침략사와 정확히 괘를 같이해왔다. 한반도도 예외가 아니었다. 1920년부터 1930년까지 연간 1천kg 안팎의 아편을 생산해왔던 한반도에서 갑자기 1930년대를 지나면서 그 양이 폭발적으로 늘어나 1941년에는 무려 5만725kg에 이르렀다. 같은 기간, 경작지도 평균 300∼400ha에서 무려 8462ha로 늘어났다.

그 시절 한반도에서 생산한 대부분의 아편은 광저우와 만주로 수출됐다. 그 이유는 일본 식민주의자들이 한반도에서 아편 생산을 정책적으로 지원하며 전비를 마련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프랑스 식민주의자들도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전비에 쪼들리자 라오스와 북베트남에서 아편 세금을 거두고자 양귀비 생산을 독려하며 인도차이나를 마약창으로 만들었다. 특히 1946년 프랑스 식민 당국은 아편 전매를 폐지하며 표면상 아편근절운동을 시작했지만, 뒷구멍으로는 정보부를 통해 제1차 인도차이나전쟁(Indo-china War·1946∼54년)의 전비를 마련하고자 이른바 ‘오퍼레이션 X’라는 작전명 아래 인도차이나의 아편 재배와 운송을 지원하는 철저한 이중성을 드러내기도 했다. 당시 부패한 프랑스 정보국은 오늘날까지 악명을 떨치는 코르시카 마약 신디케이트와 손잡고 국제 마약시장을 휩쓸었다.

그 뒤 프랑스로부터 베트남 전쟁을 물려받은 미국도 1960년대 라오스를 인도차이나에서 사회주의 확장을 막는 방파제로 삼겠다며, 이른바 대라오스 비밀전쟁(Secret War)을 치르면서 프랑스 정보국을 본떠 마약을 ‘전략화’했다. 미 중앙정보국(CIA)은 라오스의 소수민족인 몽족 게릴라를 조직하면서 그 대가로 몽족의 아편 재배를 조직적으로 지원했고, 또 그이들이 생산한 마약을 자신들이 운영하는 에어아메리카(AA)로 사이공의 ‘안전지대’까지 실어다주었다. 그 결과, 베트남 전쟁판은 마약 소굴로 변했고, 참전 미군의 10∼15%가 마약을 복용하기에 이르렀다. 이건 1970년대를 지나면서 세계적으로 마약 소비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결국 식민주의 정보 당국과 무장세력들이 합작한 국제마약사(國際痲藥史)를 거쳐 오늘날 아시아는 마약 생산의 중심지로 또 마약 소비 시장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런데도 영국·미국·프랑스·일본으로 대표되는 이른바 잘나가는 ‘선진국’들은 시치미를 뗀 채 아시아를 마약의 원흉으로 지목해서 ‘아니꼽게’ 노려보고 있다.



국민당 관련 연표

1911년 : 신해혁명
1912년 : 청 멸망. 중화민국 수립
1916∼28년 : 군벌 춘추전국시대
1919년 : 5·4운동. 중국국민당 창당
1921년 : 중국공산당 창당
1924∼27년 : 제1차 국공합작
1927년 : 중국공산당 혁명정권 ‘중화소비에트’ 수립
1935년 : 중국공산당 8·1선언(항일민족통일전선 제창)
1936년 : 서안사건
1937년 : 중일전쟁 발발. 제2차 국공합작
1938년 : 국민당의 공산당 공격. 적전 내전 돌입
1945년 : 일본 패전. 제2차 세계대전 종전
1949년 :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패전 국민당 대만으로 도피
1949년 말 : 국민당 윈난 지역 잔당 버마 국경과 인도차이나반도로 도피
1950년 : 국민당 잔당 버마 정부군과 전투. 한국전쟁 발발
1951년 : 국민당 잔당 중국 남부 윈난 공격
1953년 : 한국전쟁 휴전
1954년 : 국민당 잔당 대만으로 제1차 철수. 국민당 잔당 해체 공식 선언
1954∼61년 : 잔류 국민당 잔당 버마 국경에서 전투 지속
1961년 : 국민당 잔당 대만으로 제2차 철수. 국민당 철수 완료 공식 선언
1961-1973년 : CIA, 국민당 잔당과 중공군 한국전쟁 포로 대라오스 비밀전쟁 투입
1967년 : 국민당 잔당과 쿤사 사이에 ‘마약전쟁’ 발발
1970∼74년 : 타이 정부, 대레드메오(Red Meo) 진압 작전에 국민당 잔당 동원
1981년 : 타이 정부, 대타이공산당(CPT) 박멸 작전에 국민당 잔당 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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