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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의 왕 | 캄보디아] 왕자들의 뒤통수를 치다

등록 2004-11-18 00:00 수정 2020-05-03 04:23
[아시아 네트워크]

<font color="darkblue">급작스레 자진 퇴위 결심한 시하누크 국왕이 시하모니를 단독 후보자로 선언하기까지 </font>

▣ 프놈펜=푸 키아(Puy Kea)/ 특파원

오랫동안 후계자를 기다려왔던 노로돔 시하누크 국왕은 결국 최근 급하게 훈센 총리를 비롯한 최고위급 정치가들 사이에서 예비 협상과 협정을 거쳐 후계자를 뽑았다. 후계자 선출은 시하누크 왕이 자진 퇴위를 발표하고 1주일 만에 매듭지어졌다.

지난 10월14일 왕위회의는 왕궁에서 45분간 회의 끝에 시하누크 전 국왕과 모니니트 왕비 사이에서 태어난 시하모니(51)를 새 국왕으로 발표했다. 그러자 캄보디아 사회에서는 수많은 의문이 일었다. “왜 시하누크 국왕이 자진 퇴위를 결정했는가? 왜 여럿 왕자들 가운데 시하모니를 단독 후보자로 선언했는가?”

캄보디아 현대사와 시하누크

자신의 아들을 새 국왕에 앉히고 싶어했던 모니니트 왕비를 기억하는 많은 시민들은 시하모니가 새 국왕에 선출되자 곧장 그녀쪽으로 화살을 돌렸다. “오랜 꿈이 이뤄진 거지. 안사람 힘이 세긴 세구만!” 시하누크 국왕은 다른 왕자들과 달리 늘 자신과 여행을 함께 다니며 가장 가깝게 지냈던 시하모니 왕자를 전폭적으로 성원하며 그에 대한 총애를 드러낸 셈이다.

이제 역사의 저편으로 넘어가고 있는 시하누크 국왕의 일생은 지난 반세기 동안 캄보디아 현대사에서 정치적 제휴를 통한 숨바꼭질의 연속이었다. 18살 때인 1941년 프랑스 섭정 아래 즉위한 그는 1970년 론놀의 쿠데타로 쫓겨난 뒤, 1975~79년 민주캄푸치아(이른바 크메르 루즈) 정권, 1979~93년 베트남 괴뢰정권을 거쳐 1993년 다시 국왕으로 돌아왔다.

흔히 외국 정치 평론가들이 그동안 정치를 직접 관장하지 않는 그를 ‘허수아비’로만 봐왔던 것과 달리, 캄보디아에서는 그의 영향력을 부정할 수 없다. 실제로 시하누크 국왕이 지난 몇년 동안 정치와 거리를 두자 그 결과가 2003년 총선에서 곧바로 드러나기도 했다. 국왕에 대한 충성파인 푼신펙당(Funcinpec Party)이 일대 타격을 받아 전에 없던 참패를 당했다. 그리고 그 결과 캄보디아에서는 1년 동안이나 연립정부를 구성하지 못해 애를 먹었지만, 국왕은 전과 달리 개입하지도 않았다. 또 지난 6월 각 정당이 가까스로 협상을 맺었지만 정치 지도자들에 대한 어떤 신임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런 상황 속에서 자진 퇴위를 통해 정부에 불쾌감을 표시한 셈이다.

사실 이미 지난 몇년 동안 차기 국왕을 놓고 여러 가지 가능성이 떠돌았다. 그 가운데 가장 가까이 다가가 있었던 후보는 새 국왕으로 선출된 시하모니 왕자의 이복형이자 푼신펙당 당수이며 또 국회의장인 노로돔 라나리드(Norodom Ranariddh) 왕자였다. 그 다음으로는 시하누크 국왕의 이복형제인 노로돔 시리유드(Norodom Sirivudh)와 왕비인 모니니트가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다.

라나리드-훈센 밀약 있었을까

차기 군주 자리에 가장 가능성이 많았던 라나리드 왕자와 정치적 실권자인 훈센 총리 사이에 연립정부 구성과 군주의 미래를 놓고 어떤 ‘밀약’이 있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시하누크 국왕은 뜻밖에도 지난 10월6일 훈센 총리와 라나리드 왕자, 그리고 불교계에 보낸 팩스 한장으로 자신의 퇴위를 선언하고 만 셈이다. 그 팩스는 훈센과 라나리드를 비롯한 모든 이들을 충격에 빠뜨렸다고 한다. 이름 밝히기를 꺼리는 훈센 총리 측근은 “국왕이 너무나 갑작스레 퇴위를 선언하는 바람에 라나리드 왕자를 비롯해 가능성을 지녔던 후보들이 ‘왕관’을 잡을 준비조차 못한 채 뒤통수를 맞았다”고 배경을 전했다.

그렇게 해서 캄보디아에서는 새로운 왕이 탄생했다. 시민들이 아무도 그 선출 과정이나 배경을 속 시원히 알지 못하는 가운데. 그렇게 캄보디아 군주제는 시민들과 먼 거리에서 21세기를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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