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도혁명당 치하 인권유린 수사하는 특별검사부 설치…책임자 처벌에 국민들의 관심 집중
▣ 멕시코=글·사진 박정훈 전문위원 ojala2004@naver.com
올해 멕시코인들은 전대미문의 뉴스를 접했다. 국가 정보기관의 수장이 체포되는 진풍경도 지켜보았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전직 대통령에게 체포영장이 신청됐다는 소식도 들었다. 과거사 진상 규명의 책임을 맡은 특별검사는 이를 ‘중요한 성과’라고 자평했지만 인권단체들과 희생자 가족들은 “처벌이 중요하다”면서 경계를 늦추지 않고 있다. 바야흐로 멕시코에서도 과거의 진상을 규명하려는 노력이 벌어지고 있다. 다른 라틴아메리카 국가들과 달리 정치 안정의 시대를 구가했다고 알려진 멕시코의 1960~80년대도 사실은 거짓 평화의 시대였음이 밝혀졌다. 2001년 말 국가인권위원회는 10년간의 조사 끝에 3천쪽에 달하는 분량의 조사보고서를 대통령에게 제출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70년대와 80년대에 멕시코에서 532명의 사람들이 정치적인 이유로 어디론가 사라졌다. 보고서를 받은 비센테 폭스 대통령은 옛 국가 정보기관의 문서를 공개하고 특별검사부를 설치하라고 명령했다.
68년 학살, 그 뒤…
2년간의 특검 조사 결과 연방행정부 지휘 아래 군경 합동작전으로 반정부 세력을 압살하려는 음모를 국가 정책으로 추진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1968년 10월2일 평화집회에 참석한 학생들과 시민들에게 군과 사복경찰이 발포해 200여명을 학살했고, 1971년 6월10일 사복경찰과 청부살인업자로 구성된 준군사조직이 거리를 행진하던 학생 30여명을 살해했으며, 그 뒤 무장운동을 전개하던 수많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강제 실종 범죄를 자행했다는 것이다. 정부 차원의 진상 규명 작업은 2002년 초 본격적으로 시작됐지만, 사실 민간 차원의 노력은 사건 발생 당시부터 지금까지 계속돼왔다. 1968년 10월2일의 학살 이후 지금까지 생존자들의 증언이 담긴 책들이 꾸준히 발간됐고, 가족들은 대책위원회를 조직해 사라진 가족들을 찾아나섰으며, 인권단체들은 책임자에 대한 고발은 물론이거니와 수많은 보고서를 작성해 정부에 진상 규명을 촉구해왔다.
이그나시아 로드리게스(60)도 지속적으로 학살 범죄를 고발해온 생존자 가운데 한명이었다. 1968년 10월2일 집회에 “별일이야 있겠는가”라고 생각하며 참가했다. 당시 정부와 학생대표들간의 대화가 이뤄지고 있었고, 집회장 주변의 탱크와 군인들도 아주 익숙한 풍경이었다. 그날 6시10분 헬리콥터가 녹색과 붉은색의 조명탄을 연달아 쏘았을 때도 그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늘 집회장에는 헬리콥터가 선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내 그것이 순진한 생각에 불과했음을 알게 됐다. 집회가 열리던 광장 주변 건물 옥상에서 총격이 개시됐기 때문이다. 곧 사람들이 쓰러지기 시작했다.
열흘 뒤에 개발도상국 최초로 열리는 올림픽을 취재하기 위해 전세계에서 몰려든 외신기자 수백명도 현장에 있었다. 이탈리아의 저명한 여기자 오리아나 팔라치도 그 중 하나였다. 그는 훗날 그날은 베트남 전쟁과 다를 바 없는 ‘전쟁’이라고 묘사했다. 그러나 그것은 전쟁이 아니었다. 그날 죽은 사람들은 돌멩이 한 조각 들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보름 전 라틴아메리카 최대의 대학 멕시코 국립자치대학에 군이 난입해서 학생들을 체포했다. 이것에 항의하기 위해서 무려 40만명의 학생들과 시민들이 제도혁명당(PRI)이 모든 제도를 동원해 민주화 요구를 억누르는 ‘제도억압당’에 불과하다고 비난하며 거리를 행진했다. 10월2일의 시위도 그 연장선이었다. 게다가 집회가 열린 광장 주변에 사는 아파트 주민들도 함께 가랑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광장에 앉거나 서서 지켜보고 있었다.
해마다 10월2일이 되면 국화꽃을 들고 찾아오는 미겔 아기레 솔리스(50)는 당시 14살이었다. 집회가 열리고 있던 광장 정면에 자리잡고 있는 아파트에서 호기심으로 밖을 내려다보다가 학살 현장과 마주하게 되었다. 그는 왜 자기 친구를 비롯해 그 많은 사람들이 죽어야 했는지 조리 있게 설명하지 못한다. 그러나 “10월2일만 되면 고통 때문에 집에 앉아 있을 수가 없어요”라고 말한다. 그날 하루에만 2360명이 체포됐고, 200명이 넘는 이들이 감옥에 갇혔으며, 검찰은 이들 전체에게 총 3천년이 넘는 징역형을 구형했다.
고문 경찰들, 모의 총살형까지
그날 일로 감옥에 갇힌 파우스토 트레호(78)는 당시 멕시코 국립자치대학의 정신의학과 교수였다. 그는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교사연맹의 지도자였다. “그날은 내 생애를 결정한 사건”이었다고 회고한다. 총격이 개시되자 땅에 엎드려 있다가 두려움으로 다리가 떨려 도무지 일어날 수 없었던 그에게 한 청년이 다가왔다. “선생님! 어서 갑시다. 선생님을 보면 죽일 것입니다.” 그 청년의 부축을 받아 몇m를 걸었을까. 어디선가 날아온 총알이 청년의 머리를 관통했고 청년은 즉사했다. “그가 아니었으면 총알은 내 심장을 관통했을 것입니다.”
그는 무사히 학살 현장을 빠져나왔지만 곧 체포됐고 감옥에 갇혔다가 국외로 추방됐다. 우루과이, 칠레 등지에서 망명객의 신분으로 떠돌다가 멕시코로 돌아왔지만 1981년 게릴라에 연루됐다는 이유로 다시 납치됐다. 그때 고문 경찰들은 그를 세번이나 모의 총살형에 처하는 소름 끼치는 고문을 자행했다. 과거사 진상 규명을 맡은 특별검사부의 대변인조차 “당시의 조사 수단은 고문”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영장도 없이 납치한 뒤 눈을 가리고 안가로 끌고 가서 고문하고 날조된 범죄에 서명하도록 협박했다.
멕시코 국립자치대학의 법학부 투쟁위원회의 대표였고 10월2일 사건과 관련해 구속된 두명의 여자 대학생 가운데 한명이었던 이그나시아 로드리게스(60)도 체포영장도 없이 8명의 요원에게 납치되어 2년간 감옥에 갇혔다. 그는 옆방에서 들려오는 ‘단말마의 외침’이 어머니의 목소리라고 말하면서 “계속 고문할까? 아니면 서명하겠는가?”라고 협박하던 경찰의 요구에 굴복해 날조된 조서에 서명했다. 10월2일 학살 현장에 예술가연맹의 일원으로 참가했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시인 레오폴도 아얄라는 라는 잡지에 게릴라 관련 기사를 썼다는 이유로 1974년에 체포되어 비밀감옥에 갇혀 모의총살형에 처해지고 묘지에 산 채로 매장되기도 했다.
이들은 모두 자신들이 운이 좋아 살아남았다고 말한다. 국제사면위원회를 비롯한 국제인권단체들의 국제적인 캠페인과 가족의 끈질긴 노력이 아니었다면 그들도 강제 실종의 운명을 맞았을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마리오 카르타헤나(52)는 대학에서 농업공학을 전공한 뒤 ‘9월23일 공산주의 동맹’에 가입했다가 체포되고 나서 두달 동안 실종됐던 사람이다. 이 단체는 1968년과 71년의 학살 이후 멕시코 곳곳에서 등장한 비밀 게릴라 조직을 통합했다. 평화 투쟁이 잔인하게 진압되는 것을 지켜본 그는 “지하운동만이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해 비밀리에 노동자 정치 사업을 전개하다가 1978년 군경의 합동작전 일제 검거작전에서 체포됐다.
미국의 개입 밝혀질 것인가
검거 당시 7발의 총알을 맞았지만 의식은 멀쩡했던 그는 “벌집이 된 몸이 담긴 사진만을 보고서도 제 자식이라는 확신을 갖게 된” 어머니의 신속한 대응과 국제사면위원회가 보낸 3천통의 전보가 아니었다면 한명도 살아나오지 못한 제1군사기지의 비밀감옥에서 기적적으로 풀려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자기가 속했던 조직의 지도부 전원의 “주검을 찾지 못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그는 제1군사기지에 갇혔을 때 잠시 조우했던 지도자 한명의 얼굴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도시에서 학생들이 노동자들을 설득해 도시 봉기를 일으키려고 했다면, 농촌에선 학생들이 농민들을 조직해 억압적인 권력에 맞서려고 했다. 마리오 카르타헤나가 도시 게릴라였다면 다니엘 토랄바(42)의 큰형 라사로 토랄바는 오아하카주의 농촌에서 ‘에밀리아노 사파타 혁명여단’(BREZ)을 조직했다. 1968년 10월2일의 학살 현장에도 있었고 1971년 6월10일 백주대낮의 살해 현장에도 있었던 라사로 토랄바는 세상을 좀더 이해하기 위해 기계공학도에서 경제학도로 변신해 공부하다가 고향 오아하카의 농촌으로 향했다.
그의 막내 동생 다니엘 토랄바(42)는 1976년 6월 체포됐다는 소식을 신문에서 접한 것을 끝으로 다시는 큰형의 소식을 듣지 못했다. “어디에 있든지 반드시 큰형을 찾을 것”이라는 그는 큰형을 찾기 위해 가족을 모두 잡아다가 고문한 경찰의 범죄를 증언하면서 “우리가 원하는 것은 보복이 아니라 정의!”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학살과 실종의 국가 범죄에 멕시코군이 깊숙이 관여했다는 것은 이미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그러나 1993년 군장성이 양심선언을 하기 전까지 진상이 제대로 알려지지는 않았다. 기병장교학교의 교장이었던 가야르도 장군은 71년간 집권한 국가정당 제도혁명당은 멕시코 연방군이 사회운동과 반정부운동을 억압하는 수단으로 이용해왔다고 폭로했다. 그 사실을 공개했다는 이유로 8년3개월간 감옥에 갇혔다가 2002년이 돼서야 풀려났다.
가야르도 장군은 “멕시코군과 미군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면서 멕시코에서 벌어진 인권침해 범죄에 미군이 긴밀히 연루돼 있다고 전한다. 국제사면위원회의 멕시코 지부장인 마리오 고메스(36)에게도 직접적인 증거는 없지만 미국의 개입은 의심할 바 없는 사실이다. 1년 전에 발간한 국제사면위원회의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 내에는 250여개의 군사기관이 있고, 그곳에서 매년 10만명에 이르는 제3국 요원들을 훈련시켜왔으며, 파나마의 아메리카 학교에선 매년 800명의 멕시코 요원들이 군사훈련을 받았다. 군사훈련의 매뉴얼에는 강제 실종, 고문, 인질 잡아두기, 법외 처형 등의 내용이 담겨 있다.
또 영어 억양이 섞인 스페인어를 구사하는 취조요원을 만났다는 피해자들의 진술이 그치질 않았다. 인권변호사 엔리케 곤살레스는 “그들이(미국 요원) 신분증을 남기겠는가”라고 반문하면서도 가장 많은 실종자가 발생한 게레로주에 가면 “증인들이 부지기수로 많다”고 말했다. 즉, 미 정보기관과 군사기관은 군사요원을 훈련하고 교육하는 데서 나아가 직접 멕시코에서 벌어진 반인권 범죄에 관여했다는 것이다. 지금 멕시코에선 생존자들과 희생자 가족들, 인권단체들은 모두 한목소리로 “역사의 진실을 밝히고 책임자를 처벌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 대목에선 현 정부가 임명한 특별검사의 생각도 다르지 않다. 스페인의 진실위원회처럼 내전의 진실을 밝히는 것도, 남아프리카의 진실위원회처럼 흑백 갈등을 다루는 것도 아닌 멕시코는 ‘멕시코의 길’을 찾아야 했다. 그 결과가 역사적 진실과 법적 해결책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는 특별검사부의 설치라고 특검은 말한다.
전직 대통령 판결을 지켜보며
그러나 저명한 멕시코 인권단체 ‘미겔 아구스틴 프로 후아레스 인권센터’ 소속 인권변호사 안레한드라 안체이타는 “현재까지 최종 판결에 이른 사건은 단 한건도 없다. 특별검사부에는 제대로 된 법의학 지식을 갖춘 요원조차 배치되지 않았다. 현 정부의 해결 의지가 의심스럽다”고 비판한다. 멕시코 국립자치대학의 법학과 교수이기도 한 인권변호사 엔리케 곤살레스도 특별검사부는 과거의 진상을 들여보기엔 턱없이 부족한 자그만 창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먼저 1968년부터 1985년까지의 사건만 다루고 있으며 그 가운데서도 언론의 이목을 끌고 외국에 좋은 인상을 심어주기 위해 대규모 학살사건과 대표적인 실종사건만을 다루고 있다고 비판한다. 국제사면위원회 멕시코 지부장도 “멕시코 군형법이 군장성들의 책임을 면하게 하고 있다”고 덧붙이면서 민간법정에서 군장교들을 재판할 것을 요구한다.
30년 넘는 기다림 끝에 멕시코는 지금 전직 대통령의 체포에 대한 대법원의 판결을 기다리고 있다. 인권단체들은 국내 재판에서 책임자들이 처벌되지 않으면 국제 법정으로 투쟁의 무대를 옮기겠다고 벼르고 있다. 특별검사부는 수십년간의 면책을 지켜보면서 국가의 사법제도에 대한 신뢰를 완전히 저버린 희생자들과 가족들을 납득시킬 수 있을까? 지금 거기에 멕시코 민주주의의 미래가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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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은 어떤 방식으로 ‘더러운 전쟁’에 개입했는가.
=군은 국가 정책에 따라 제도혁명당 정부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고문하고 투옥하고 강제 실종시키는 ‘더러운 전쟁’을 벌였다.
-미군과 멕시코군의 관계는 어떠했는가.
=멕시코군의 군사교육 프로그램은 미군 교육 프로그램의 완벽한 복제판이다. 1966년 내가 미국에 군사 연수를 갔을 때 그것을 내 눈으로 확인했다. 또 미군의 훈련기관에서 멕시코군 요원을 훈련시켰고 ‘더러운 전쟁’을 수행하는 방법을 가르쳤다. 그리고 멕시코군은 미군의 전폭적인 재정지원과 군사장비 지원을 받아왔다.
- 양심선언 이후 군 수뇌부는 당신을 어떻게 대우했는가.
= 군 수뇌부는 즉각 날 납치해 부정축재, 권력남용 등 21가지의 날조된 범죄로 군사재판에 회부했고 8년3개월 동안 가둬두었다.
- 폭스 대통령의 인권 정책을 어떻게 평가하는가.
= 특별검사부에 속해 있는 연방검찰청의 총수는 군사재판관 출신이다. 그 자신이 인권침해의 주요 책임자 가운데 한명이다. 또 인권침해 책임자들은 여전히 권력을 쥐고 있으며, 지금도 멕시코에는 600여명의 사람들이 정치적인 이유로 갇혀 있다. 3년 동안 특검이 조사했지만 한명의 정치가도 군인도 아직까지 최종판결까지 가지 않았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난 장담한다.
-그렇다면 해결책은 무엇인가.
= 도덕적 권위를 갖고 있는 사람들로 독립적인 진실위원회를 구성해 조사를 벌이고 책임자를 처벌해야 한다. 그리고 국가가 인권을 침해했다는 것을 인정하고 다시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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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검사로 임명되는 순간에 가장 걱정스러운 것은 무엇이었나.
=먼저 이 사안이 정치 문제로 비화돼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둘째 형법적인 차원에서는 군과 같은 국가기관 전체가 책임자일 수는 없다. 개인들이 책임자들이다. 우리는 책임 있는 군인들을 민간법정에 반드시 세울 것이다.
-지금까지 특별검사부가 이룬 성과는 무엇인가.
=불법적인 인신 구속에 공소시효가 적용되지 않고, 실종자가 사망 혹은 생존의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는 한 공소시효를 적용할 수 없다는 대법원 판결을 끌어냈다. 그 결과 강제 실종과 불법 체포 혐의로 연방보안국(국가 정보기관)의 수장 두명을 체포했다. 그리고 지금 학살 범죄로 전직 대통령과 고위 공직자들을 고발했다. 우리가 발견한 한 문서에는 ‘몰살’이라는 표현이 들어 있다는 점이다. 덧붙여 나는 학살 범죄에는 공소시효가 적용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특별검사부 활동을 하면서 가장 큰 장애물은 무엇인가.
=나는 형법학자 출신이다. 내 사촌 중 하나는 게릴라였다. 한쪽에선 내가 인권 문제에 대한 소양이 없다고 비판했고 다른 쪽에선 게릴라 가족이라고 비난했다. 이것은 초기에 아주 힘들었다. 두 번째로 뿌리 깊은 멕시코의 관료주의가 일을 더디게 만들고 있다.
-인권단체들과 희생자 가족들과 생존자들은 특별검사부의 활동에 대해 비판적이다.
=나는 법적 진실과 역사적 진실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페루의 진실위원회 보고서는 검찰의 서랍에서 잠자고 있지만 멕시코에선 그런 일이 없을 것이다. 또 연방정부는 특검부의 활동을 전폭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단 한번도 대통령이 내게 전화를 건 적이 없다.
- 그 역사적 진실에는 1990년대에 벌어진 원주민 학살사건들도 포함되는가.
=2001년 12월27일 이전에 벌어진 사건은 다 포함된다. 현 정부에서 벌어지는 사건들도 특별검사부를 설치해서 처벌해야 할 것이다.
-미국의 개입도 조사할 용의가 있는가.
=우린 미국의 문서들을 공개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현재로선 그 이상을 얘기하기는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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