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nt color="darkblue"> 킨윤 장군 체포로 소용돌이친 버마 정국… 탄쉐 장군 정점으로 한 강압통치 도를 더해갈 듯</font>
▣ 정문태/ 국제분쟁 전문기자 · 아시아 네트워크 팀장
asianetwork@news.hani.co.kr
“랑군 아무개 장소에 대표단이 모두 감금당한 상태다.”
10월21일치 를 비롯한 타이 언론들은 을 인용해 랑군에서 버마 군사정부와 평화협상을 벌이던 카렌민족연합(KNU) 대표단이 감금당했다는 기사를 대문짝만 하게 올렸다. 그러나 그런 보도가 나가기 하루 전, 카렌 협상 대표단장 소 투투레이(Saw Htoo Htoo Lay)를 비롯한 대표단은 이미 육로로 타이-버마 국경에 되돌아와 있었다.
가장 먼저 핵심정보를 잡은 중국
“난 랑군의 한 교회에 가서 예배까지 드렸는데….” 소 투투레이(카렌민족연합 제2사무총장)는 전화통에 대고 웃음을 터트렸다.
“10월18일 우린 군정보국(MIA) 부국장 초테인 준장(Brig-Gen Kyaw Thein)을 비롯한 랑군쪽 대표단 4명과 만났고, 그 뒤로는 친지 방문까지 할 수 있었다. 19일에는 협상 조정자인 산 피안트 대령(Col. San Pwint)이 찾아와서 심상찮은 일이 벌어졌으니 회담을 연기하고 되돌아가는 게 좋겠다고 얘기했다.” 카렌쪽 협상단 부대표인 소 데이비드 토우(Saw David Htaw·카렌민족연합 외무책임자)는 지난 10월18일부터 20일 사이에 벌어졌던 일을 인터뷰를 통해 상세하게 설명해주었다.
이런 ‘황당한’ 기사가 나가기 시작한 건 지난 10월19일 저녁 랑군 국영 텔레비전과 라디오가 총리인 킨윤 장군(Gen Khin Nyunt)이 건강상 이유로 총리직에서 물러났다는 보도를 하면서부터다. 같은 날, 타이-버마 국경 딱(Tak) 지역에서 이동내각회의를 주재하던 탁신 시나왓 타이 총리는 “버마 총리 킨윤 장군이 쫓겨나 가택연금 상태에 있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이때부터 국제언론들은 화끈 달아올랐다. 그동안 랑군 군사당국으로부터 정보를 캐내는 일이 ‘하늘의 별 따기’로 통해왔던 외신에서는 19일부터 ‘무늬’만 비슷해도 마구잡이 기사들을 흘리기 시작했다.
이런 과정에서 가장 먼저 핵심 정보를 잡은 쪽은 중국 정보당국임이 이번 취재에서 드러났다. “18일 밤과 19일 아침 사이에 벌써 중국-버마 국경쪽 민족해방 · 민주혁명 세력들 사이에서는 킨윤 장군 체포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그 무렵 우연찮게 중국-버마 국경 지역을 취재하고 있던 버마 출신 저널리스트 옹 나잉(Aung Naing)의 말에 따르면, 중국 정보기관이 이미 10월18일 저녁 랑군의 국가평화개발회의(SPDC)에서 킨윤 장군 체포 결정을 첩보한 뒤 곧장 중국-버마 국경 지역의 전직 버마공산당(CPB) 고위직들에게 사실 확인 작업을 벌였던 탓이다.
아무튼 현재 분명한 건 지난 10월19일 체포된 킨윤 장군이 가택연금 상태에 있다는 사실과 후임 총리로 실질적인 권력기구인 국가평화개발회의 제1사무총장이었던 소윈 중장(Lt-Gen Soe Win)이 임명됐다는 사실뿐이다. 이 두 가지 사실을 놓고 국제언론과 버마 전문가들 사이에 수많은 말들이 오가고 있다. 그러나 현 시점에서 버마 정국의 추이를 정확히 짚어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무엇보다 군사당국의 철저한 통제에 따른 정보 부재로 ‘분석용’ 밑감을 찾아내기가 어려운 탓이다. 그러다 보니 킨윤 장군이 체포되고 나흘이 지난 23일 현재까지 접촉한 버마 내 민족해방·민주혁명 세력들마저 저마다 “말하기엔 너무 이르다”는 답답한 소리들만 되풀이하고 있다.
‘쿠데타’로 규정하기엔 무리
1948년 버마 독립 뒤부터 독립투쟁을 벌여왔던 카렌민족연합이 발표한 “누가 권력을 잡더라도 킨윤 장군이 주도했던 평화회담이 지속되기를 바란다”는 성명서나 아웅산 수치가 이끄는 민족민주동맹(NLD)의 재외망명 조직인 민족민주동맹-해방구(NLD-LA)가 발표한 “현 상황에서 아웅산 수치의 안전이 크게 염려되므로 유엔을 비롯한 국제사회가 개입해주기를 바란다”는 성명서처럼.
그렇다면 총리인 킨윤 장군이 가택연금당한 현 버마 정치 상황을 어떻게 부를 것인가? 이 기본적인 의문은 칠흑같이 어두운 버마 정국을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잣대가 될 수밖에 없다. 10월19일 킨윤 장군 체포 소식이 전해지자 외신들은 곧장 그 사건의 성격을 쿠데타(coup)로 또는 친위 쿠데타(palace coup)로 규정해 보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킨윤 장군이 비록 내각을 이끄는 총리였지만 버마 군사정부의 실질적인 최고권력기구이자 최고결정기구인 국가평화개발회의(SPDC) 의장이자 방위군 최고사령관이며 국방장관인 탄쉐 장군(Gen Than Shwe)이 버티고 있는 점을 감안할 때, 권력 찬탈용 쿠데타로 규정하기엔 무리가 따른다. 실제로 킨윤 장군을 체포하는 과정도 비록 형식적일지언정 10월18일 국가기구인 국가평화개발회의에서 결정한 것으로 미뤄볼 때, 상식적인 쿠데타로 부르기 어렵긴 마찬가지다. 따라서 이 사건은 군사정부 내부의 권력투쟁으로밖에는 달리 부를 길이 마땅찮다.
따지고 보면 킨윤 장군 축출 낌새는 이미 9월 중순부터 새나오기 시작했다. 다만 군정보국과 국가정보국(NIB) 양쪽을 모두 휘두르는 정보 최고책임자로서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힘을 지녔던 킨윤 장군을 연상하며 쉽사리 현실로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뿐.
9월 중순부터 이미 킨윤 장군 휘하에 있던 200명을 웃도는 군정보국 요원들과 국경 무역에 관여했던 측근들이 중국 국경 무세(Muse) 지역에서 체포되기 시작했고, 또 1998년부터 군사정부의 ‘얼굴’ 노릇을 해왔던 윈옹(Win Aung) 외무장관과 외무차관 킨몽윈(Khin Maung Win)이 10월8일 하노이에서 열리는 아시아유럽정상회의(ASEM)를 2주 앞둔 시점에 전격 교체될 때부터 심상찮은 기류가 감지됐다. 게다가 그 둘의 퇴진은 통상적인 절차를 따라 총리 킨윤 장군이 결정한 게 아니라, 국가평화개발회의 제1사무총장인 소윈 장군(Gen Soe Win)이 직접 명령을 내린 것으로 알려지면서 본격적인 ‘권력투쟁설’이 불거져나왔다.
윈옹 외무장관과 같은 날 쫓겨난 농업장관 틴 소장(Maj-Gen Nyunt Tin), 통상장관 피소네 준장(Brig-Gen Pyi Sone) 그리고 수송장관 라민스웨 소장(Mah-Gen Hla Myint Swe)은 모두 킨윤 장군 측근으로 불리던 이들이었다.
탄쉐, 2002년에도 킨윤에 직격탄
군부 내 권력투쟁설은 이미 1990년대 국경분쟁이 극에 달해 있던 시점에도 심심찮게 흘러다닌 단골 주제였다. 그 무렵 국가평화개발회의 제1사무총장으로서 모든 정보기관을 장악한 채 최고권력자로 군림했던 킨윤 장군과 국가평화개발회의 부의장 겸 방위군 부사령관 및 육군참모총장으로서 실질적인 병력동원 능력을 지녔던 몽예 장군(Gen Maung Aye)이 벌였던 힘겨루기는 지금까지 군부 내 권력투쟁의 산실 노릇을 해왔다. 그러다가 2002년 ‘이빨 빠진’ 독재자 네윈(Ne win)의 사위와 손자들이 낀 쿠데타군에게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 채 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처음으로 군부 내 권력 투쟁이 전면에 드러난 그 사건에서 정보력만 지녔던 킨윤 장군은 병력을 동원할 수 있는 탄쉐 장군에게 밀리며 고배를 들었던 셈이다.
그리고 6개월 뒤인 2002년 12월 네윈이 사망하면서부터 권력추는 급격히 탄쉐 장군쪽으로 쏠렸다. 몽예 장군은 탄쉐 장군 아래서 협력적 상하관계를 이루며 강경파를 주도해왔다. 그리고 지난 10월18일 탄쉐 장군의 결정에 이어 19일 몽예 장군이 직접 킨윤 장군 체포 명령을 내린 것으로 전해진다. 그동안 모든 정보를 독점해온 킨윤 장군은 국가평화개발회의가 10월18일 저녁 자신에 대한 체포 결정을 내린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 채, 10월19일 버마 중부 중심지 만달레이를 방문하고 있었다. 그리고 킨윤 장군은 지난 9월 중순 군에 체포돼 조사를 받고 있던 군정보국 측근 요원들을 만나기 위해 만달레이 형무소를 방문한 자리에서 전격 체포되고 말았다.
10월23일 오후 2시 현재(랑군 표준시) 아직까지 언론이나 바깥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지만, 국경 혁명단체들의 정보를 통해 확인한 체포자 명단 34명 가운데는 킨윤 장군뿐만 아니라 내무장관 틴 라잉 대령(Col. Tin Hlaing)과 이민·인구장관 세인트와 준장(Brig-Gen Sein Htwa)이 포함돼 있다. 그 체포자 명단에는 킨옹 준장(Brig-Gen Khin Aung)을 비롯한 군정보국 각 핵심부서 책임자인 준장 5명과 부책임자 격인 대령 6명도 포함돼 있다. 특히 체포자 명단에 포함된 테인윈 소령(Maj. Thein Win)은 버마 전체 인터넷 통신을 관장하는 파간 사이버테크(Pagan Cybertech) 관리자인데, 현 타이 총리 탁신 시나왓의 가족 회사인 신 새틀라잇(Shin Satellite Co.)과 킨 총리의 아들 예 나잉 윈(Ye Naing Win)이 추진하는 40억바트(1억달러)짜리 통신설비 프로젝트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인물이다.
군부 내 이권과 깊은 연관성
게다가 군이 킨윤 장군을 체포하면서 부정부패 혐의를 들고 나왔다는 점에서 이번 권력투쟁은 정치적인 마찰뿐만 아니라 군부 내 이권과도 깊은 연관성이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실제로 킨윤 장군을 체포하기 닷새 전인 10월14일 군부는 킨 장관이 직접 개입하고 있던 군정보국 사업 셋 가운데 피닉스 관광(Phoenix Tour)과 무역업으로 알려진 스리 스타(Three Star)라는 회사 둘을 폐쇄한 것으로 알려진다. 한편 군정보국 부국장 윈쵸(Win Kyaw)가 관리하며 중국과 거래해온 나머지 한 회사는 아직 기능하고 있는 것으로 볼 때, 이번 사건이 철저하게 킨윤 장군을 겨냥한 것임을 어렵잖게 짐작할 수 있다.
지금까지 드러난 정황을 종합해볼 때, 현 시점에서 킨윤 장군 체포와 가택연금은 버마 군부 내 강경파들의 완전한 승리를 뜻한다고 봐도 무리가 없을 듯싶다. 군부는 킨윤 장군 체포로 그동안 논란거리였던 “버마 정치에서 실권자가 누구인가?”라는 의문에 종지부를 찍음과 동시에 철권 강경파 탄쉐 장군(국가평화개발회의 의장 겸 방위군 최고사령관)을 정점에 놓고 몽예 장군(국가평화개발회의 부의장 겸 방위군 부사령관), 1988년 ‘랑군의 봄’ 당시 22사단장으로 민주화 운동을 학살하며 악명 떨친 새 총리 소윈 중장 그리고 이스라엘군으로부터 훈련받은 전 랑군사단장 민스웨(Brig-Gen Myint Swe) 신임 군정보국장으로 이어지는 최고 강경파 라인을 구축했다.
그리고 군부는 킨윤 장군 체포 하루 전인 지난 10월18일 저녁 일찌감치 군정보국을 장악한 데 이어, 22일 국가정보국을 폐쇄해 킨윤 장군의 두 날개를 완전히 잘라버렸다. 또 군부는 17개 언론 매체를 폐쇄했다. 그 가운데는 킨윤 장군의 아들인 예 나잉윈이 출판해온 월간 비즈니스 뉴스지 도 포함됐다.
킨윤 장군 체포와 가택연금으로 버마 정국은 초강경파들이 득세하며 일정 기간 강압통치에 도를 더해갈 것으로 여겨진다. 그동안 아웅산 수치가 이끄는 민족민주동맹을 비롯한 반정부세력들과 국제사회에 대해 ‘비교적’ 유화정책을 펴온 킨윤 장군을 노골적으로 부정해왔던 군 강경파들을 놓고 본다면, 다시 한번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들어갈 버마 정치의 미래를 짐작해볼 만하다. 그렇게, 1962년부터 이어져온 버마 군사철권 통치는 우두머리만 바뀐 채 여전히 어두운 길을 가고 있다. 이 군인에서 저 군인으로, 이 총에서 저 총으로 장면만 바뀌었을 뿐, 그게 정변이든 음모든 상관없이 시민사회는 길고도 답답한 길을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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