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네수엘라 소환투표에서 승리한 차베스 대통령… 석유 이익 빈민 분배로 곳곳에서 갈등
▣ 멕시코시티= 박정훈 전문위원 ojala2004@naver.com
서구 민주주의 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대통령 소환 국민투표가 8월15일 베네수엘라에서 실시됐다.
전체 유권자 1400만명 가운데 최소한 1천만명이 참가한 이번 국민투표는 우고 차베스 대통령이 2000년부터 추진해온 사회개혁 정책인 이른바 ‘볼리바르 혁명’에 대한 대중적 심판의 장이었으며, 또한 쿠데타, 노사 공동 파업, 그리고 국민투표로 전술을 바꿔가면서 현 정부에 맞서온 반정부 세력에 대한 베네수엘라 시민들의 국민적 심판의 장이었다.
무상교육 · 의료 서비스 · 토지 개혁
투표 결과 59%를 넘는 시민들이 여전히 대통령을 신임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으며, 약 41%의 적지 않은 시민들이 대통령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음이 드러났다. 대통령 집무실이 자리잡은 미라플로레스 대통령궁 발코니에서 차베스 대통령은 “오늘의 승리는 바로 볼리바르 헌법의 승리”라면서 자신이 제안한 1999년 헌법에 대통령 소환 국민투표가 포함돼 있음을 상기시켰다. 더불어 반정부 세력을 향해 이번 투표 결과를 패배로 간주하지 말 것을 요청했고, 자신의 국가 프로젝트는 그 누구도 배제하지 않는다며 대화를 제안했다. 그러나 반정부 세력의 결집체인 민주화추진위원회(CD)는 즉각 “대규모 선거부정”을 주장하면서 선거 결과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반박했다.
그러나 국제 감시단의 일원으로 참가한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과 세사르 가비리아 미주국가기구 사무총장은 선거 결과를 인정했고 콜롬비아, 브라질, 아르헨티나, 스페인 등 주변국들이 국민투표 결과를 환영하면서 정치경제적 안정을 회복하는 새로운 시대가 열리기를 기원했다. 또 다소 늦기는 했지만 미국마저 “베네수엘라가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중요한 계기이기를 바란다”고 선거 결과를 받아들였다. 현재 베네수엘라에선 2차 검표가 진행되고 있다. 카터 재단과 미주국가기구가 반정부 세력의 의구심을 해소하기 위해 베네수엘라 선거관리위원회에 제안한 것이다. 하지만 문제 제기의 당사자인 민주화추진위원회는 2차 검표에 참가하지 않기로 결정하고 전자투표 소프트웨어가 교체돼 ‘수학적으로 불가능한’ 통계 수치가 보인다며 관련 보고서를 국제감시단에 제출했다.
현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우선 차베스 대통령의 정책을 살펴봐야 한다. 소환 투표 직전에 차베스 대통령과 심층 인터뷰를 벌인 의 타릭 알리는 “차베스가 제안한 정책들은 2차대전 이후 (전쟁으로 궁핍해진 영국민을 상대로) 영국 정부가 추진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지적한다. 즉, 국가의 주요 자원인 석유에서 얻은 수익의 일부를 전체 인구의 약 70%를 차지하는 빈민들에게 교육과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는 데 쓰고 있다. 이에 따라 현재 약 100만명의 빈민 가정 소년·소녀들이 무상교육 혜택을 받고 있으며, 120만명의 문맹자들이 읽고 쓰는 것을 배우고 있다. 25만명의 청소년들이 전에는 받을 수 없었던 중등교육의 혜택을 받게 되었다. 또 지금까지 세개의 대학 캠퍼스가 지어졌고, 2006년까지 6개의 캠퍼스가 더 늘어난다. 의료 서비스로 쿠바에서 온 1만명의 의사들이 빈민지역에서 진료봉사 활동을 벌이고 있으며 1만1천개의 마을 병원이 들어섰다. 의료 부문 예산도 과거에 비해 3배 넘게 책정됐다. 여기에 소규모 기업에 대한 재정지원, 빈민을 위한 새로운 주택개발 사업을 추진해왔다. 그리고 경작 가능한 토지의 70%를 차지하고 있으나 농업 인구의 3%에 불과한 대지주들의 거센 저항을 뿌리치고 통과시킨 토지개혁법에 따라 2003년 말에 총 200만ha를 웃도는 토지를 10만명이 넘는 가구에 분배했다.
재계 등돌리며 중산층 몰락
이같은 사회개혁 조처는 세계 5위 석유수출국 베네수엘라의 막대한 석유 수익에서 비롯된 것이다. 차베스 대통령은 석유수출국기구(OPEC) 소속 국가들을 직접 방문해 기구의 위상을 강화하는 데 앞장섰으며, 고유가 정책으로 사회개발자금을 확보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베네수엘라 정부는 올해 석유 수익 가운데 32억달러를 사회 서비스, 농업생산 및 사회간접자본 분야에 투자하기로 결정했다. 이 액수는 베네수엘라 국내총생산의 32%에 이르는 큰 돈이다.
바로 이런 정책의 혜택을 입은 서민들이 차베스 대통령의 지지기반이 되었다. 그러나 토지소유의 상한선을 정하는 정책으로 토지 소유자들은 물론 상공인들마저 “사유재산을 침해한다”고 즉각 반발했으며 국가 재정을 확충하기 위해 국채 발행을 늘려 은행이 구입하도록 요구하고 빈민들에게 소액대출을 보장하는 정책을 제시해 금융계의 원성을 들었다. ‘국가 속의 국가’로 불리는 국영석유회사의 수익금을 사회 분야에 투자하는 정책으로 국영석유회사의 노사 공동 파업에 직면했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재계는 투자를 기피하고 은행들도 대출을 꺼리면서 많은 기업이 도산했다. 실업자가 늘어났으며, 특히 노사 협조주의 관행 아래 비교적 안정적인 직장과 수입을 보장받던 중산층들이 몰락하게 되었다. 또 통치 과정에서 집권여당이 다수 의석을 점하고 있는데도 의회로부터 비상대권을 부여받아 행정부가 직접 개혁 법안을 승인하면서 헌법정신을 위배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반정부 세력들은 ‘독재정권’이라는 비난을 퍼붓기 시작했다. 또 석유수출국기구의 위상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리비아, 이라크 등 미국이 ‘악의 축’이라 명명한 국가 원수들을 직접 만났고,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 대한 침략을 비난하는 바람에 미국과의 관계가 악화됐다. 반면 라틴아메리카의 단결을 주창하면서 쿠바에 우호적인 정책을 펼쳐 마이애미로 휴가 여행을 떠나는 반대파들에게서 “쿠바 스타일의 전체주의 체제를 구축하려 한다”는 비난을 받았다.
차베스 대통령의 개인 스타일도 늘 논란거리다. 텔레비전과 라디오 방송, 그리고 공공집회에서 연설을 할 때는 늘 붉은 베레모를 쓰고 등장하며, 때론 노래를 부르기도 한다. 그리고 정치적 반대파에게 가차없이 “파시스트! 쿠데타 세력!”이라고 직설적 비난을 퍼붓는 거리 선동 스타일은 구미의 현대 문화에 심취한 베네수엘라 중산층과 상류층의 반감을 사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이런 그의 스타일은 빈민들에게 환영을 받았다. 가령 국민 소환투표 결과가 발표되던 날 대통령궁 발코니에서 그는 “우리가 받아친 공이 백악관 앞뜰에 떨어졌다. 홈런이었다”라면서 군중들을 열광시켰다.
요컨대 차베스 대통령은 수많은 지지자들 못지않게 적대자도 양산한 셈이다. 반정부 세력의 지도부는 대통령의 실수에 대해선 “전체주의자!” “독재자!” 심지어 “사탄!”이라고 비난을 퍼부었다. 하지만 정작 자신들의 실책은 인정하지 않았다. 특히 2002년 미국의 지지를 등에 업은 쿠데타가 벌어졌을 때 차베스를 반대하는 한 시민마저 ‘컨트리클럽의 결혼식’이라고 신랄한 비난을 퍼부을 정도였다. 2002년 말과 2003년 초에 두달 넘게 벌인 국영석유회사의 노사 공동 정치파업은 “분파적 이유로 국가 경제의 핵심 부문을 마비시키는 행위”라는 비난을 받았다. 그러자 결국 반정부 세력의 핵심 지도부들 스스로가 인정조차 하지 않던 ‘1999년 헌법’이 보장하는 국민소환투표를 채택하게 됐다.
“알려진 차악이 낫다”
반정부 세력엔 국민의 과반수를 빈민으로 만들면서 1958년부터 98년까지 나라를 통치해온 양당 체제(기독교민주당과 사회민주당)의 잔당들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차베스의 노선에 반대하는 좌파들까지 합류해 있고 차베스 정권이 만들어낸 정쟁과 경제적 불확실성에 지친 시민들도 지지를 보내고 있다. 하지만 반대파는 리더십을 갖춘 지도자를 보유하고 있지 못하며 대안적인 사회정책을 제시할 능력을 보여주지 못했다. “알려지지 않은 차선 혹은 최선보다도 알려진 차악이 낫다”는 한 분석가의 지적은 무시할 수 없는 진실을 담고 있다. 즉, 차베스가 승리했을 때보다 패배했을 때가 더욱 불확실한 미래를 낳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차베스가 패배할 때 국영석유회사의 차베스 지지 노동자들이 석유 생산을 중단하겠다고 엄포를 놓았기 때문만은 아니다. 베네수엘라에서 전체 석유수입량의 13%를 얻고 있는 미국의 부시 정권마저 11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이같은 사태를 원하지 않을 것이 확실하다. 세계 석유시장에 불확실성이 더욱 배가되기를 바라는 주변국이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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