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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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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서전/추안1] 청년 추안, 절에서 똥을 치웠네

등록 2004-07-29 00:00 수정 2020-05-03 04:23

[아시아 정치지도자의 고백 | 추안 리크파이 타이 전 총리 1 ]

가난한 환경 속에 선택해야 했던 ‘덱 왓 생활’… 법관의 길 포기하자 정치의 꿈이 영혼을 점령하다


은 압두라만 와히드 인도네시아 전 대통령 자서전 연재(509~514호)에 이어 추안 리크파이 타이 전 총리의 자서전을 이번호부터 총 4회에 걸쳐 연재합니다. 추안 전 총리는 1969년부터 타이 민주당을 이끌어온 대표적인 문민 정치가로, 1932년 입헌군주제 채택 이후 20번이 넘는 크고 작은 군사 쿠데타로 얼룩진 타이 현대 정치사에서 1992~1995년과 1997~2001년에 두번 총리를 지낸 인물입니다. 시민에 의해 선출된 정치가로서는 타이에서 최장기간 공직을 역임한 추안은 서민과 노동자에 바탕 삼은 정치를 추구했지만, 한편으로는 지나친 원칙과 법을 강조하면서 정치력 부재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아시아 정치사에서 거의 유일하게 ‘깨끗한 손’과 ‘원칙주의자’로 불린 그의 삶과 행적은 오늘날 혼탁한 아시아 정치 현실에서 중요한 의미를 전하고 있습니다. 추안 자서전을 통해 아시아 정치사를 이해하는 데 지평을 넓혀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 <i>편집자</i>


▣ 추안 리크파이(Chuan Leekpai)/ 타이 전 총리

나는 1938년 6월28일 타이 남부 뜨랑의 프루라는 조그만 마을에서 어머니 투안(Thuan)과 아버지 니욤(Niyom)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초등학교 선생이었고 어머니는 글을 읽지도 쓰지도 못하는 평범한 가정주부였다. 나는 9남매 가운데 셋째였다.

오른팔이 왼팔보다 1인치 더 긴 이유

많은 아이들을 먹여살리자니, 아버지와 어머니는 등골이 빠져라 일해야 했다. 학교에서 받는 월급만으로는 턱없이 모자랐던 생활비를 마련하고자 아버지는 일과가 끝나면 다시 과수원에서 농사를 짓거나 닭과 오리를 키워 내다파셨고, 어머니는 새벽 1~2시부터 고무농장에 나가 일하셨다.

그렇게 식구가 많은 집에서 살아남기 위해 나는 부모님을 돕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이른 아침부터 어머니를 도와 무거운 고무가 가득 담긴 양동이를 들고 다녔다. 날마다 채취한 고무가 담긴 양동이를 들고 이 나무 저 나무를 옮겨다니기를 거의 10년이 넘도록 했다. 어린 내게 그 힘든 일은 밝은 미래를 보여주는 대신 오히려 신체적 불균형을 만들어놓고 말았다. 1969년 내가 처음 의원으로 선출되자 친구가 나를 양복점에 데려가 옷을 한벌 맞춰준 적이 있는데, 그때 비로소 나는 내 오른팔이 왼팔보다 1인치나 더 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늘 오른손으로 무거운 양동이를 들고 다녔던 탓인 듯싶다.

고무값이 하락하자 어머니는 카놈(타이 전통 후식이나 간식거리) 장사꾼으로 변신했다. 그때부터 나는 카놈을 머리에 이고 시장에 팔러 다녔다. 나는 타이의 총리들 가운데 어린 시절을 가장 힘들게 보낸 듯싶다. 나에겐 입을 거리조차 거의 없었다. 친구들과 어울리기 전에 빨아놓은 옷이 마르기를 기다리곤 했을 정도다.

그럼에도 하급직 선생이었던 아버지는 자식들에게만은 고등교육을 시키고 싶은 열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아버지는 내가 초등학교 6학년을 마치자, 당시 뜨랑 사람들 사이에 선망의 대상이었던 말레이시아 페낭 유학을 권하며 2년만 참으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아버지가 돈을 모으기를 바라며 뜻에 따랐다. 그러나 2년 뒤 아버지는 내 유학비를 마련하지 못하셨고, 결국 나는 동기들보다 2년이나 뒤진 채 다시 타이 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뜨랑에서 10학년을 마친 나는 방콕의 포창 아트 칼리지에서 3년을 공부한 뒤 뜨랑으로 돌아와 교사가 된다는 약속을 하고 장학금을 받아 1956년 방콕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방콕에 도착한 나는 미술 선생이 되기 싫어 포창 장학금을 포기하고 대신 12학년을 마치면 대학 진학 자격증을 받을 수 있는 실파 숙사 예술학교를 택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친구들에 비해 2년 뒤진 시간을 따라잡고자 산더미같이 쌓인 교과서와 씨름했다. 그 결과 나는 12학년까지의 과정을 8달 만에 끝낼 수 있었다.

가족의 지원을 받을 형편이 아니었던 내가 방콕에서 학생으로 살아가는 데는 수많은 고통이 따랐다. 살아남기 위해 이기고 부딪쳐야 할 것들이 넘쳐났다. 나는 생활비를 줄이고자 덱 왓(절에서 스님을 돕는 대신 밥과 잠자리를 해결하는 아이들)이 되고자 결심했다. 그러나 부모님 보증이 없던 나를 어떤 스님도 받아들이지 않았고, 나는 거의 1년 가까이나 이 절 저 절을 기웃거렸다.

학생 추안, 스님 추안 밑으로 들어가다

그러던 어느 날 아마린다람 절을 찾았던 나는 예상한 대로 또 거절당하고 발길을 돌렸다. 투덜거리며 200여m를 걸어나갈 무렵, 한 덱 왓이 쫓아와 스님께서 오라신다는 말을 전했다. 다시 절로 되돌아오자, 스님이 “너 이름이 뭐냐?”고 물으셨다. “예, 추안입니다. 스님.” 대답이 끝나자마자 스님은 “제기랄, 내 이름과 같단 말이냐!” 하고 쏘아붙였다. 그 추안 티띠-담모 스님은 내게 꾸띠(승려들 처소)를 보여주시며 “니 책과 옷만 여기다 둬라”라고 말씀하셨다. “스님, 그럼 전 어디서 잡니까?” 질문이 끝나기 무섭게 추안 스님은 “저어기”라며 손가락으로 그의 꾸띠 바깥쪽 좁은 공간을 가리키셨다. “아니 스님, 비가 오면 어떻게 합니까?” 불안해진 내 마음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추안 스님은 표정도 없이 툭 한 마디 던지셨다. “비? 문제될 거 없어. 니가 젖으면 돼.”

나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렇게 해서 스님 추안과 학생 추안이 함께 살게 되었다. 추안 스님은 그로부터 2년 뒤 승기를 마치던 날까지 나를 돌봐주셨고, 떠나던 날 위쳇 스님에게 나를 인계하셨다. 그 뒤 나는 추안 스님을 돌아가실 때까지 돌봐드렸고, 나는 지금도 그이를 존경하고 있다. 아무튼 덱 왓으로 살아가는 일도 내가 경험했던 고무농장보다 편하지는 않았다. 나는 첫날부터 호된 신고식을 치렀다. 아이들은 절에 있는 모든 설거지거리를 내게 맡기고 달아났다. 가난에 시달리다 온 덱 왓들은 먹을거리에 침을 뱉어 자신의 것임을 선언하는 식으로 이기심을 보이기도 했지만, 나는 그이들과 함께 청소하고 대변을 치우면서 평화롭게 살아가는 길을 터득했다. 그러나 정직하게 말하자면, 난 그런 일이 정말 싫었지만 별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렇게 나는 덱 왓으로 8년을 살았다. 탐마삿대학에서 변호사가 되기 위한 법학 과정을 모두 마치고야 나는 내 공간을 얻어 나갈 수 있었다.

덱 왓으로 살며 12학년 수료증을 딴 나는 1958년 지식의 시장으로 불리던 탐마삿대학 법학과에 지원했다. 탐마삿대학에서 나는 많은 일을 겪었다. 나는 인간의 삶은 완벽하게 통제할 수 없는 것이며 또 어떤 길을 갈 것인지를 결정하기 전에 많은 조건을 생각해야 한다는 단순한 사실을 깨달았다.

사랑은 모든 사람에게 일어나는 일반적인 현상이듯이, 젊은 내게도 예외가 아니었다. 사실 나는 많은 여성들에게 큰 관심을 가졌지만,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탓에 그저 멀리서 그이들을 바라보는 것으로만 만족했다. 내가 데이트를 한 여성은 마음에 두고 있던 같은 학급 여학생 한명이 전부였다. 그러나 폐쇄적인 사회 분위기 탓에 데이트가 쉽지 않았다.

남녀 둘이 학교 밖을 벗어나기만 해도 눈총을 받을 정도였으니, 영화를 보러 가더라도 서로 다른 버스를 타고 갔다. 영화를 보고 난 뒤에 길을 걸으면서도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렇게 몇 차례 데이트를 했지만, 나는 우리가 친구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아 ‘여자친구’로 부르기를 주저했다. 우린 미래를 이야기하지도 않았다.

그 무렵 나는 동생들 학비를 마련해야 한다는 무거운 짐을 지고 있어 연애나 결혼 같은 나 자신만을 위한 설계를 하기엔 너무 벅찬 상황이기도 했다. 게다가 정치가 이미 내 관심사로 들어와 있었다. 그 시절 타이 정치는 군인들 손에 사로잡혀 있던 때라, 정치가가 되고자 했던 나는 어떤 여성이든 나로 인해 불행에 빠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정치가에 대한 꿈은 어두운 계곡에 대한 꿈과 같은 시절이었으니.

학생운동 이끌며 정치적 극단 조직

그러면서 나는 탐마삿대학 시절을 정치운동을 하며 보냈다. 나는 그 무렵 학생운동을 이끄는 한편 전통연희에 뿌리를 둔 정치적인 극단을 조직하기도 했다. 우린 전문 연극인이 아니었지만, 우리 이념을 펼치며 군사정권에 저항하는 수단으로 연극운동을 활발히 해나갔다. 당시 탐마삿대학 사회에서는 우리 연극이 큰 인기를 얻었고, 공연 때마다 많은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탐마삿대학을 졸업하고 1년 뒤 나는 변호사 과정을 마쳤다. 나는 여전히 정치가의 꿈을 꾸고 있었지만, 부모님은 법관이 되기를 바랐다. 하급 교사였던 아버지는 자식 하나만은 고급 공무원을 만들고 싶은 열망으로 살아오셨음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결국 나는 스스로 삶을 닦기로 결심했다. 나는 법관 시험에 응시하지 않았고, 아버지는 크게 낙담하셨다. 사랑하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실망시키는 일은 내게도 말할 수 없는 고통이었다. 그러나 나는 정치가가 되겠다는 꿈을 버릴 수 없었다. 이미 정치가 내 가슴과 영혼을 점령해버렸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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