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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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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과 스웨덴, 아주 특별한 친구!

등록 2004-06-25 00:00 수정 2020-05-03 04:23

중립국감시위 참여하며 비무장지대와도 인연… 스웨덴 출신 아시아 특파원의 한국전쟁 54돌 맞이 기고


서양 기자로는 매우 드물게 지난 4월 공식적인 취재비자를 받아 평양을 취재했던 스웨덴 출신 버틸은 25년 동안 타이를 근거지로 삼아 아시아 각국의 예민한 정치 문제를 전문적으로 다뤄온 기자다. 특히 버마 분쟁을 가장 깊이 취재해온 기자 가운데 한명인 버틸은 중국과 러시아, 북한의 정치·경제·사회 분야에서도 해박한 지식을 통해 많은 글들을 뽑아냈다. 그는 현재 북한 정치·경제 관련 책을 쓰고 있으며, 스웨덴 신문 의 기자이자, 홍콩에서 발행되는 주간지 타이 특파원으로 일하고 있다. 그의 저서 〈Burma in Revolt〉 〈Land of Jade〉 〈Communist Party of Burma〉 〈Outrage〉 같은 책들은 동남아시아 지역을 이해하는 필독서로 꼽히고 있다. <i>편집자</i>


베르틸 린트네르(Bertil Lintner)
/ 타이 특파원

평양 외교가는 그리 활발하지가 않다. 현재 북한에는 옛 사회주의 동맹국들이 거의 모두 대사관을 폐쇄하고 난 뒤 몇몇 국가만 남아 있는 실정이다. 러시아와 중국을 비롯해 아시아 국가들 가운데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 그리고 북한으로부터 무기를 구입해온 몇개 아랍 국가들이 전부다.

그런 평양 외교 중심가를 따라가다 보면 오직 하나 누르스름한 벽돌 건물이 서 있고, 그게 스웨덴 대사관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햇볕정책’을 시작하기 전, 영국·독일·이탈리아 같은 유럽 국가들 대부분이 북한과의 외교관계에서 ‘교전정책’을 지지하던 시절 스웨덴은 서방국가 가운데 유일하게 평양에 대사관을 두고 있었다. 그렇게 한동안 북한에는 오직 900만명 인구를 지닌 북유럽 한 귀퉁이 나라 스웨덴이 자본주의 세계를 대표했다.

스웨덴, 북베트남을 인정한 첫 번째 국가

스웨덴은 1974년 북한과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그 다음해 평양에 대사관을 개설한 뒤, 비슷한 시기에 대사관을 열었다가 폐쇄해버린 일부 유럽 국가들과 달리 지금까지 대사관을 유지해오고 있다. 그렇게 해서 스웨덴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북한과 남한 그리고 비무장지대에까지 대표를 파견하고 있는 나라가 되었다. 특히 스웨덴은 한국전쟁 휴전과 함께 쌍방의 협정 준수를 감시하기 위해 설치한 중립국감시위원회(NNSC) 4개 국가 가운데 하나로 참여하면서부터 비무장지대와도 인연을 맺게 되었다.

그리고 현재 중립국감시위원회는 스웨덴과 스위스 두 나라만 남았다. 1993년 체코슬로바키아가 체코와 슬로바키아로 분리되면서 중립국감시위원 역할을 물려받은 체코공화국을 북한이 거부하면서 대표단 철수를 강요했던 탓이다. 2년 뒤 폴란드도 북한으로부터 쫓겨났다. 그러나 스웨덴과 스위스는 이미 1991년 북한이 중립국감시위원회 기능 정지를 선언했음에도 여전히 비무장지대에 대표를 파견해놓고 있다. 그렇게 스웨덴은 북한과 특수한 관계로 ‘한반도 드라마’에서 매우 독특한 자리에 서왔다.

아마도 그런 탓에, 내가 비록 아시아에서 25년을 살아왔지만 스웨덴 사람이기 때문에 서양 기자로서는 매우 드문 공식적인 저널리스트 비자를 받아 지난 4월 북한을 취재할 수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평양에 머무는 동안 북한 통역자는 내가 스웨덴 신문 (Svenska Dagbladet) 기자라는 걸 알고는 북한과 스웨덴 두 나라 사이의 특별한 관계를 거듭 되풀이하는 걸 보았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평화로운 나라’- 1815년부터 전쟁을 벌였던 스웨덴은 온데간데없고- 로 또는 ‘노벨상’과 ‘에릭슨’ 무선전화기 그리고 팝 그룹 ‘아바’ 정도로만 알려진 스웨덴이 한국 사안의 중심역할을 하게 되었을까?

그건 순전히 1968년 교육장관으로 그 뒤 총리가 되었던 올로프 팔메(Olof Palme)가 모스크바 주재 북베트남 대사와 나란히 스톡홀름에서 베트남전쟁 반대시위를 벌이면서부터였다.

그로부터 1년 뒤 스웨덴은 서방 세계에서 북베트남을 인정하는 첫 번째 국가가 되었고 동시에 남베트남 임시혁명정부는 스톡홀름에 사무실을 설치했다. 이어서 스웨덴 정부의 자유주의 외교정책과 개방형 난민정책에 힘입어 제3세계의 수많은 독립운동 조직들이 스톡홀름에 대표자를 파견했다. 그런 가운데 미국이 분통 터지게도, 스웨덴은 1970년대 중반 쿠바·북한과 각각 외교관계를 수립해나갔다. 그러나 스웨덴은 비록 시민을 위한 사회보장제도를 폭넓게 추구해왔다고는 하지만 시종일관 자본주의 국가로 남아 있었다. 정치적으로는 임금이 최고통수권자인 입헌군주제에다 의회민주제였고.

그럼에도 스웨덴이 독자적인 길을 걸을 수 있었던 건, 올로프 팔메와 그의 사회민주당이 모든 종류의 제국주의를 부정하는 강력한 정의감을 지녔던 탓이다. 올로프 팔메의 반제국주의 노선은 미국만을 공격했던 것이 아니라 1979년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던 소비에트 러시아에도 똑같은 모습을 보였다. 반베트남전쟁을 외친 수많은 운동가들이 앞장서면서 스웨덴이 유럽 국가 가운데 가장 강력한 아프가니스탄 저항운동 지원세력이 되었듯이.

암살당한 올로프 팔메와 김대중

그러나 스웨덴이 북한과 외교관계를 맺겠다고 결심한 건 물론 사업적인 동기도 있었다. 1970년대 초 북한은 오직 유럽의 산업국가들만 지녔던 최신기술을 도입해 신속히 주요 프로그램을 개발하기로 결정했다. 북한은 “오히려 싼값에 좋은 물건을 스웨덴과 독일로부터 구할 수 있는데, 왜 소비에트와 동구로부터 저질품을 구입하고자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 하는가”라는 의문에 눈뜬 셈이다.

1975년 처음으로 평양에 스웨덴 대사관을 개설한 에릭 코넬(Eric Cornell)은 그의 저서 에서 이렇게 설명했다. “별안간 북한에 수억달러에 이르는 공장설비 계약을 체결할 수 있게 된 스웨덴 무역회사들도 평양 대사관 개설 제의에 한몫했다. 그 계약은 1천대에 이르는 차량들, 평양 거리에서 볼 수 있는 북한 마크를 단 자동차들과 군용으로만 사용해서 결코 사람들 눈에 띈 적 없는 대형 화물트럭을 포함하고 있었다.”

그로부터 스웨덴제 ‘볼보’ 자동차가 평양 거리에 등장했고, 또 아틀라스 코프코(Atlas Copco) 채광 장비들이 북한 광산에 쓰이기 시작했다. 특히 남한 군 당국은 북한이 휴전선 밑에 땅굴을 파는 데 그 스웨덴제 채광장비들을 사용했다고 강력히 주장하기도 했다.

그 뒤 곧장 북한과 스웨덴 관계가 예기치 않게 어려움을 겪었던 건, 비단 한국 군의 그 ‘장비’ 주장 때문만은 아니었다. 코넬에 따르면 북한이 스웨덴 사람들에게 생산품 가격을 낮춰달라고 요구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내가 스웨덴 사업가들에게 그런 명령을 내릴 권리도 없고 또 대사관이 외국과의 무역에 대표자 노릇을 할 수도 없다고 대꾸하자, 북한 당국자들은 의아해하며 폭소를 터뜨렸다.” 코넬은 북한이 자신을 향해 스웨덴 사업가들에게 ‘권리’를 주장하라고 요청했던 일을 그렇게 소개했다. 스웨덴 외교정책이 여느 서방 국가들에 비해 이상하리만큼 ‘진보적’이었지만 사실은 여전히 자본주의 국가였고, 북한은 그런 스웨덴을 이해하기 힘들었던 탓이다.

그런 과정을 거쳐 북한과 스웨덴 사이의 경제 교류는 1980년대 들어 북한 경제 상황이 악화되면서부터 점차 줄어들기 시작했다. 대신 대사관을 평양에 두고 있던 스웨덴은 1998년 김대중 대통령의 유화적인 대북 정책에 따라 경제 대신 ‘한반도 사안’이라는 중요한 역할을 맡기 시작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1970년대 자신의 석방을 위해 애써준 올로프 팔메 전 스웨덴 총리와 개인적으로 가까운 친분을 맺어왔다. 김대중과 올로프 팔메의 관계는, 비록 1986년 팔메가 암살당했지만 김대중 대통령이 야인으로 있던 1994년 ‘아시아·태평양 민주지도자 포럼’ 창설 기념식에 세계 각국 정치 지도자를 초대하면서 팔메의 아내 리스베트 팔메(Lisbet Palme)를 잊지 않을 만큼 각별했다.

김정일이 스웨덴을 방문하려 했다?

따라서 1998년 이후 스웨덴이 서방 국가 가운데 가장 먼저 김대중 대통령의 대북 ‘햇볕정책’을 지지하는 국가가 된 것도 우연이 아니었다. 나중에 김대중 대통령 자신이 밝힌 것처럼, 평양 주재 스웨덴 대사관은 2000년 6월 김대중 대통령의 역사적인 북한 방문 준비에 깊이 개입했다. 그 다음해인 2001년 스웨덴은 유럽연합(EU) 의장국이 되었고, 6월 들어 스웨덴 총리 예란 페르손(Goran Persson)은 처음으로 유럽연합 대표단을 이끌고 평양을 방문해 북한과 유럽 관계를 해동하는 데 일조했다.

물론 북한을 향해 유럽이 더 유연한 태도를 보일 수 있었던 건, 2000년 10월 올브라이트(Madeleine Albright) 미국 국무장관의 평양 방문이 영향을 끼쳤던 것도 사실이다. 그 어떤 서방 정치가보다도 김정일과 오랜 시간 만났던 인물인 올브라이트는 김정일은 바보가 아니지만 서툴고 완고한 협상가라는 인상을 받았다고 실토했다. “김정일은 고립되어 있었지만 <cnn>을 보고 컴퓨터를 통해 정보를 충분히 입수하는 인물이었다.”
의미심장하게도, 김정일은 올브라이트에게 ‘스웨덴식’을 포함한 다른 경제모델을 생각하고 있다는 뜻을 밝혔다고 한다. 올브라이트는 스웨덴이 사회복지 국가지만 국가통제 경제 체제가 아니라는 사실 때문에 김정일 말을 너무 우스꽝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였다지만. 어쨌든 김정일이 북한 문제의 해법을 찾고 있는 중이고, 또 스웨덴과 북한 사이의 역사적 관계를 통해 스웨덴으로부터 영감을 얻고자 애쓴다는 사실만은 드러난 셈이다.

스웨덴과 북한의 무역은 역사일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 스웨덴은 북한에게 여러 종류의 사회교육을 마련했다. 믿거나 말거나, 스웨덴이 북한에게 ‘인권’ 훈련까지 했으니!
페르손이 평양을 방문하고 석달 뒤, 김정일은 러시아 대륙을 거쳐 모스크바에 이르는 한달짜리 긴 철도여행을 하고 다시 평양으로 되돌아갔다. 그 무렵, 김정일이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멈추지 않고 대신 핀란드 헬싱키로 가서 다시 페리로 스톡홀름에 갈 의향이었다는 소문이 끈질기게 나돌았다. 그러나 그 계획은 실현되지 못했다. 핀란드가 유럽연합 회원국이었고, 유럽연합은 아직 김정일 방문을 받아들일 만큼 상황이 무르익지 않았다고 판단했던 탓이다.

북한을 ‘깡패국가’로 대접한 적 없어

그때부터, 특히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이 2002년 1월29일 북한을 이라크와 이란과 함께 ‘악의 축’으로 규정하고부터 한반도 정세는 극적으로 변했다. 특히 북한과 서방 사이에는 관계 개선을 위한 어떤 새로운 시도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스웨덴 대사관은 아직도 이곳 평양에 있다. 그리고 그 스웨덴의 태도는, 적어도 북한을 낀 국제 기류인 ‘충돌’이나 ‘대립’보다는 훨씬 나은 편이다. 그건 아마도 특이한 스웨덴과 북한 사이의 역사적인 관계 때문이 아닌가 싶다. 스웨덴은 단 한번도 북한을 ‘깡패국가’로 대접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스웨덴은 다른 나라들 사이에서 늘 정상적인 외교관계를 유지하고자 애써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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