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틴아메리카인 절반 이상 ‘경제 발전하면 독재 지지’… 신자유주의 · 부자들만의 민주주의가 문제
멕시코시티= 박정훈 전문위원 jhpark2001@hotmail.com
‘생활수준이 향상된다면 독재정권을 지지하겠습니까’라는 질문을 멕시코시티, 상파울루, 부에노스아이레스 시민들에게 던져보았다. 놀랍게도 열명 가운데 다섯명 이상이 독재정권을 지지하겠다고 답했다. 이것은 최근 유엔개발계획(UNDP)이 펴낸 ‘라틴아메리카의 민주주의’라는 보고서에 담긴 내용이다. “이것은 우울한 소식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착각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라틴아메리카의 문제는 권위주의 체제로 돌아간다고 해서 해결되지 않는다. 더 튼튼한 민주주의만이 해결할 수 있다.”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의 말이다.
기업인 권리는 서유럽 수준인데…
그렇다면 왜 라틴아메리카 시민들은 ‘착각’하고 있는 걸까. 라틴아메리카의 맨얼굴이 고스란히 담긴 보고서에 해답이 들어 있다. 25년 전 라틴아메리카에는 콜롬비아, 코스타리카, 베네수엘라 세 나라에만 민주정부가 집권하고 있었다. 70년대 말부터 시작된 민주화의 물결은 80년대를 지나면서 시대의 대세가 됐고 90년대에 접어들면서 안정기에 접어들었다. 독재정권에 의한 고문, 실종, 암살의 ‘더러운 전쟁’의 시대는 갔고 쿠데타의 위협은 사라졌다. 보고서는 “세계 역사상 한 지역에 완전히 민주주의가 뿌리 내린 것은 이것이 처음”이라고 강조한다.
그러나 라틴아메리카 민주주의의 20년은 빈곤과 불평등이 더욱 심화한 시기였다. 빈민의 수는 더욱 늘어 2003년 현재 전체 인구의 43.9%인 2500만명에 이른다. 조사 대상 18개국 가운데 7개국에서 국민의 반수 이상은 빈곤선 이하의 수입으로 살아가고 있다. 소득분배를 보면 지구상에서 최악의 불평등 수준을 보여준다. 소득 격차는 더욱 커져 1999년 소득 상위 10%와 하위 10%의 차이는 27.4배에 달했다. 또 2002년 현재 소득 상위 20%의 인구가 전체 수입의 약 55%를 차지하는 반면 하위 20%는 오직 4.71%의 수입만을 차지했다.
요컨대 “불평등하고 가난한 민주주의”가 오늘날 라틴아메리카의 자화상인 셈이다. 경제개혁이 부족해서 이런 현상이 벌어진 것은 아닐까. 보고서의 책임자 단테 카푸토는 “신자유주의가 20년 전에 약속한 것과 실제 결과가 달랐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실제로 경제개혁은 급속히 추진됐다. 경제성장의 기회를 놓쳐 ‘잃어버린 10년’이라고 부르는 80년대를 지낸 다음 라틴아메리카의 나라들은 경제개혁을 충실하게 수행했다. 이른바 ‘워싱턴 합의’라는 신자유주의 프로그램을 수용해 무역개방, 긴축재정, 민영화, 자본계정의 자유화, 세제개혁을 추진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80년대에 0.58이던 경제개혁 수치는 급격히 상승해 1998년과 2003년 사이에 평균 0.83에 이르렀다. 경제개혁지표는 0과 1 사이의 숫자로 표시한다. 1은 완벽한 개혁을 의미한다.
그러나 경제는 의미 있는 성장을 기록하지 못했다. 1980년 경제개혁 지표가 0.55였던 시절에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3739달러였는데 20년이 지난 지금 경제개혁 지표는 0.83으로 급상승했지만 1인당 GDP는 3952달러로 미미한 상승을 기록했을 뿐이다. 즉, 20년의 민주화 기간 동안에 성장해 성인이 된 첫 민주화 이후 세대는 한번도 실질적인 소득 상승을 경험하지 못한 것이다. 오히려 같은 기간에 노동 조건은 더욱 나빠졌다. “기업인들의 권리는 계속 개선돼 서유럽의 상황과 비슷해지고 있다. 그러나 노동자의 권리(단결권·단체교섭권·단체행동권 등 노동3권)는 더욱 나빠져 서유럽과 멀어지고 있다”고 보고서는 진단한다. 게다가 1985년 8.3%였던 도시노동자 실업률은 2002년 현재 9.4%로 추락했으며 청년 실업률은 대부분의 지역에서 전국 평균 실업률의 두배를 훨씬 상회하고 있다.
작은, 너무나 작은 정부
사회안전망(의료·연금·노조조직률)도 해체돼가고 있으며, 정부 규제의 사각지대에 놓인 비공식 부문의 일자리가 급속히 늘어가고 있다. 1990년부터 라틴아메리카에서 생겨난 일자리 10개 가운데 7개가 비공식 부문이고, 공식 부문에서 생겨난 일자리 10개 가운데 6개는 사회 안전망의 보호가 아예 전무한 것이다. 사정이 이러니 라틴아메리카 시민들이 ‘착각’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보고서의 저자들은 18개국 1만8643명의 시민들을 대상으로 광범위한 설문조사를 벌였다. 그랬더니 시민들의 56.3%가 “민주주의보다 경제발전이 더욱 중요하다”고 답했으며 54.7%가 “경제 문제를 해결한다면 독재정권을 지지하겠다”고 답했다. 더 충격적인 것은 “민주주의를 지지한다”고 분명히 밝힌 ‘민주시민’들의 48.1%가 민주주의보다 경제발전이 더 중요하다고 답했으며, 44.9%는 생활수준이 향상된다면 독재정권을 지지하겠다고 밝혔다는 점이다.
시민들 대부분이 경제 문제(고용·빈곤·불평등·소득)를 가장 우선적인 문제라고 지적했다. 이런 경제적인 불안감은 고스란히 민주주의에 대한 견고하지 못한 지지로 이어지고 있다고 보고서의 저자들은 분석한다. 이들은 또 라틴아메리카 지도자들은 이런 현실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를 조사했다. 18개국의 주요 정치 지도자, 기업가, 지식인, 노조 지도자, 기자, 시민단체 대표, 종교인, 군 고위책임자 등 총 231명을 대상으로 심층 인터뷰를 벌였다. 그들 가운데는 32명의 전·현직 대통령도 포함돼 있다. 이 내용에 따르면 정치 지도자의 59%가 자신의 소속 정당이 제대로 된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고 솔직하게 시인했다. 그러면서 정치 지도자들은 민주적인 기관에 강력한 영향을 끼치며 ‘사실상의 권력’을 행사하는 집단들을 지목했다. 군의 영향력은 급격히 감소한 반면, 경제집단(기업가·금융가 포함)과 언론매체의 영향력은 급속히 상승했다고 지적한다. 선거운동시에 제시한 프로젝트를 추진하려는 순간 이 집단들이 장애물로 변한다는 것이다.
외부의 영향력도 급속히 커졌다. “우린 뜻대로 할 수 없다. 지금 국민을 대표하는 정부는 국가 위험도를 조사하는 민간 기업의 평가에 의존하고 있으며, 우릴 돕든 돕지 않든 국제기구의 결정에 매여 있는 형편이다.” 보고서에 실린 한 대통령의 푸념이다. 보고서는 “선거 민주주의는 시민 민주주의로 발전해야 한다”고 결론을 내린다. 4월 말 페루의 리마에서 열린 보고서 발표회에서 우루과이의 전 대통령 훌리오 마리아 상기네티는 “라틴아메리카인들은 매번 열리는 선거를 통해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그러나 정부가 제대로 안 굴러가면 열광은 이내 사라지고 만다”며 “라틴아메리카인들은 늘 국가가 가장 노릇을 해주기를 바란다. 우린 모든 것을 국가에 요구한다. 심지어 개인의 행복까지도 국가에 요구한다”고 지적했다. 요컨대 시민들의 비판적이고 능동적이며 지속적인 참여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고 시장경제를 의심해서는 안 된다. 시장경제 속에서 다양한 모델을 찾아야 한다.” 보고서의 책임자 단테 카푸토가 강조한다. 그는 “그러기 위해선 정부는 작을수록 좋다는 신자유주의의 교조는 재고돼야 한다. 이미 라틴아메리카에서 국가는 민주화를 추동할 수 없을 정도로 작아지고 말았다”고 덧붙였다.
국제통화기금은 변하지 않는다
보고서 발표장에 참석한 페루의 현 대통령 알레한드로 톨레도는 “아주 걱정스럽다”고 개탄하면서 사회 위기를 해결할 공적 투자를 늘리도록 선진국과 국제기구가 지원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그러나 보고서가 발표되던 주에 열린 국제통화기금과 세계은행의 회의 자리에서 국제통화기금의 서열 3위인 멕시코 출신 아구스틴 카르스텐스는 “긴축재정을 통해 (빈곤과 더 잘 싸울 수 있는) 여유와 자원을 얻을 것”이라고 말했고 세계은행의 라틴아메리카 책임자는 “오랜 세월 동안 흑자를 유지해야 한다”며 사회 분야에 국가 재정을 지출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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