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 정치지도자의 고백/ 와히드 전 인도네시아 대통령 1]
거대 이슬람 가문에서 태어나 아버지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정치에 눈을 떠가던 유년시절
32년 수하르토 독재를 쫓아낸 민주 복구와 개혁 열망 공간에서 처음으로 민주적 절차를 거쳐 대통령이 된 와히드는 인도네시아 안팎에서 큰 관심을 모았던 인물이다. 시민들은 세계 최대 이슬람 국가인 인도네시아에서 최대 무슬림 단체인 나들라툴 울라마(NU)를 이끈 종교지도자인 그에게 사회통합 능력을 기대했고 동시에 칼럼리스트로서 날카로운 사회비평을 통해 단련한 그에게 개혁 책임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와히드는 2년을 넘기지 못한 채, 수구세력들이 견고한 정치무대에서 끝내 ‘탄핵’이라는 직격탄을 맞고 쓰러진 불행한 대통령이 되고 말았다. 그런 와히드에 대한 논란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
아시아 네트워크는 와히드 자신이 밝히는 스스로의 이야기를 통해 인도네시아 현대사를 따라 읽는 기회를 갖고자 이 기획을 마련했다. 덧붙여 아시아 네트워크는 이 기획이 영웅담을 소개하는 장이 아님을 미리 밝혀둔다. 특히 자서전들이 지닐 수 있는 ‘변명’을 보완하는 장치로 인터뷰와 함께 논쟁 부분을 정리할 수 있는 전문가 좌담을 추후 덧붙여나갈 것이다. -편집자
▣ 압두라만 와히드((Abdurrahman Wahid)/ 인도네시아 전 대통령
▣ 구술정리 아흐마드 타우픽(Ahmad Taufik)/ 시사주간지 기자
나는 태어나면서 압두라만 아드 다킬(Abdurahman Ad Dakhil)이란 좀 별난 이름을 얻었다. 아버지께서 우마이야왕조의 영웅적인 인물에서 이름을 따오셨다고 하는데, 본디 ‘아드 다킬’은 이슬람 문명을 일으킨 정복자란 뜻이다. 인도네시아에서 아무도 그런 이름을 가진 이가 없다보니 나는 어릴 때 내 이름의 의미를 몰랐다. 그러다가 누군가 나를 압두라만 와히드로 부르기 시작했다. 아랍어로 하나라는 뜻인 ‘와히드’란 이름은 내가 여섯 아이들 가운데 장남이라 얻은 것인지, 아니면 흔히 아버지 이름을 아들이 성으로 물려받는 전통에 따라 얻은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열네살 되던 해 “눈을 조심하라”
그리고 언제부턴가 사람들이 나를 다시 구스 두르(Gus Dur)라 불렀다. 이 이름은 특히 자바(Java) 키아이- 이슬람 지도자(Kiai-Islamic ulema)의 명예로운 아들이란 속뜻을 지녔는데, 구스(Gus)란 말은 형님을 뜻한다. 이 이름에서 드러나듯이, 나는 그야말로 거대한 이슬람 가문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 키아이 하지 하심 아샤리(Kiai Haji Hasyim Asyari)는 인도네시아 최대 무슬림 단체인 나들라툴 울라마와 테부 이렝 페산트렌(무슬림 학교)의 설립자이셨다. 외할아버지 키아이 하지 비스리 샴수리(Kiai Haji Bisri Syamsuri)도 데나냐르 페산트렌의 설립자이셨고, 또 아버지의 어머니쪽에서는 나들라툴 울라마 의장을 배출했다.
그렇게 나는 인도네시아 무슬림운동과 독립운동 양쪽을 모두 이끌었던 가문을 배경 삼아 1940년 8월4일 동부 자바 좀방의 작은 도시 데나냐르에서 아버지 와히드 하심(Wahid Hasyim)과 어머니 숄레하(Sholehah)를 통해 태어났다.
나는 인도네시아 최고 무슬림 지도자를 둘씩이나 배출한 가문에서 자랐지만, 별로 신통찮은 아이였다. 일본 침략에 저항하는 이슬람 군사전선 헤즈볼라를 이끌었던 아버지는 나를 4살 때 자카르타로 데려갔으나, 너무 바빠 돌볼 겨를이 없자 다시 좀방의 테부 이렝으로 보냈다. 나는 좀방에서 초등학교를 다니다가, 1949년 인도네시아가 네덜란드로부터 독립하면서 다시 자카르타로 옮겨왔다. 내가 자카르타에 있는 기독교계 초등학교(KRIS)에서 3학년과 4학년을 보내던 그 시절, 아버지는 종교장관을 비롯해 1952년까지 장관직만 넷을 거칠 만큼 바쁘게 보냈다. 그 무렵 함께 놀던 동창 가운데는 오늘날 유명한 여배우가 된 리마 멜라티(Rima Melati)가 있다.
그리고 2년 만에 나는 다시 군사재단이 운영하던 트리술라 페르와리(Trisula Perwari) 초등학교로 옮겼다. 나는 그곳에서 자연스레 군대문화의 영향을 받으면서 군인이 되겠다는 꿈을 키웠다. 그러나 그 꿈은 실현되지 못했다. 사람들은 내가 장관의 아들이자 무슬림 지도자 가문이라는 배경을 업고 있어 큰 기대를 했는지 몰라도, 정작 아버지는 나를 ‘엘리트스쿨’로 진학하라고 압박하지 않았다. 공부에 관심도 없었고 보통 사람들이 다니는 학교에 가고 싶었던 나는 그런 아버지를 둔 게 엄청난 행운이라 여겼다. 그러면서 나는 주변 사람들의 눈길과 달리, 내가 보통 사람이라고 느끼기 시작했다.
서양 고전음악과 네덜란드어를 배우다
대신 나는 아버지를 통해 많은 것들을 배웠다. 나는 늘 아버지 곁을 따라다녔고 사람들로 들끓는 우리집은 내게 좋은 학교 노릇을 했다. 어린 나는 아버지 옆에 앉아 어른들이 나라를 걱정하며 나누는 정치 이야기를 귀담아들었다. 그렇게 아버지의 친구들은 내가 일찌감치 정치에 눈뜨게 해준 선생들이었던 셈이다.
특히 ‘후세인 아저씨’로 불렀던 분은 내가 ‘독서’에 빠지도록 만들어준 은인이다. 나는 1년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내가 후세인 아저씨라 불렀던 그분이 인도네시아 공산주의 지도자로 유명했던 탄 말라카(Tan Malaka)임을 알게 되었다. 그분에게서 나는 처음 카를 마르크스가 쓴 을 얻었고, 내 독서열은 거의 광적으로 변해갔다. 책읽기에 빠진 나는 14살 되던 해 의사에게 눈을 조심하라는 진단을 받았고 도수 ‘마이너스 3’짜리 안경을 쓰기 시작했다.
그 시절 나는 또 다른 아버지 친구 한분에게서 큰 영향을 받았다. 본디 독일 사람인데 이슬람으로 개종한 윌리엄 이스칸다르(William Iskandar)는 내게 음악의 가치를 가르쳐주었다. 나는 학교를 마치면 곧장 그분 집으로 달려가서 고전음악을 들었다.
그를 통해 처음 베트벤 음악을 들었을 때 느꼈던 감동은 지금도 내 가슴 한가운데에 아련히 남아 있다. 아버지는 여러 나라 말을 할 정도로 국제주의자이며 세계 정세에 밝은 분이었지만 음악만은 전통 이슬람 노래와 코란 암송을 최고로 여겼다. 그렇게 아버지는 이스칸다르와 음악적으로는 상극이었다. 그러나 내가 그분을 통해 서양 고전음악을 듣고 배우는 일만은 몹시 기뻐하셨다. 또 나는 그분을 통해 네덜란드 말을 배우기도 했다. 그렇게 아버지는 어린 시절 나의 이상이었고 스승이었다. 그러나 행복했던 시간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열두살 되던 해, 나는 내 삶에서 가장 슬픈 일을 겪었다.
1953년 4월18일 토요일, 나는 반둥과 치레본 사이의 산악에 자리잡은 작은 도시 수메당에서 열리는 나들라툴 울라마 회의장으로 떠나는 아버지 자동차에 따라 올랐다. 백색 시보레 자동차가 치마히와 반둥 사이에 이르렀을 때 우린 비를 만났다. 길은 미끄러웠고, 대형 시보레 자동차 파워에 익숙지 않은 운전기사가 여러 차례 불안하게 비틀거리는가 싶더니 결국 한쪽에 멈춰 있던 트럭을 들이받고 말았다. 앞자리에 앉아 있던 나와 운전기사는 오히려 말짱했지만, 그 충격으로 뒷자리에 타고 있던 아버지와 친구분이 자동차 밖으로 튕겨나갔다.
아버지는 머리와 이마에 중상을 입고 쓰러졌지만 구급차가 오기까지는 무려 3시간이나 걸렸다. 점점 의식을 잃어가는 아버지를 바라보면서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두렵기만 했다. 아버지는 내 손을 꼭 잡고 계셨다. 그리고 반둥 병원에 도착해서 밤늦게 어머니가 달려오실 때까지 나는 아버지를 지켜보았다. 그 시간은 너무나 길었고, 어린 내게 너무나 가혹한 순간이었다. 그리고 아버지는 다음날 오전 10시30분 세상을 떠났다. 몇 시간 뒤 아버지 친구분도 뒤따라 떠났다. 많은 인도네시아 사람들의 희망이었던 아버지는 그렇게 서른여덟 나이에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먼 길을 떠나고 말았다.
축구경기에 미치고 중국계 소녀에 빠지며…
아버지 주검을 모시고 반둥을 떠나 자카르타로 오는 길에 나는 놀라운 광경과 마주쳤다. 길모퉁이마다 사람들이 몰려들어 아버지의 마지막 가는 길을 애도했다. 햇볕이 뜨겁게 내리쬐었으나 지나는 마을마다 집집마다 사람들이 달려나와 안타까운 마음을 보탰다. 그 광경은 다음날 자카르타를 떠나 동부 자바 고향으로 향하는 운구 행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어린 나는 그때서야 비로소 내 아버지의 크기를 실감했다. 아버지가 떠난 뒤부터 나는 더 광적으로 독서에 매달렸다. 집에 있던 책들만으론 만족할 수 없었던 나는 자카르타의 헌책방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 결과 나는 초등학교를 마칠 무렵 자카르타 글짓기 대회를 휩쓸었고 정부로부터 큰 상을 받았다. 그 일은 내가 일생 동안 글을 쓰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나는 지금도 내게 글을 쓰는 능력을 준 신께 감사하고 있다.
1954년 나는 중등경제학교(SMEP)에 들어갔지만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실패의 쓴맛을 봐야 했다. 1년 만에 낙제를 했다. 그 무렵 나는 게으르기도 했지만 도무지 아무것도 하기가 싫었다. 나는 숙제 한번 한 적 없고 오직 축구 구경에만 온 정신을 팔았다. 그건 아버지를 잃은 슬픔 탓이었다. 나는 그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나는 축구 구경에 미치면서 독서마저 팽개쳐버렸다.
어머니는 학교에서 바보 같은 놈이 된 나를 족자카르타에 있는 가톨릭재단이 운영하는 학교로 보냈다. 나는 그곳에서 영어를 배웠고, 한편으로는 일주일에 3번씩 알 무나위르 크라퍅(Al-Munawwir Krapyak) 페산트렌에 나가 아랍어를 배웠다. 또 키아이 하지 알리 마슘(Kiai Haji Ali Mashum)으로부터 평등주의 기풍을 익혔다.
그러나 족자카르타에 가서도 나는 여전히 ‘악동’이었다. 친구들과 휩쓸려 다니며 오렌지를 훔치기도 했고, 중국계 소녀에게 빠져 공부는 뒷전이었다. 그 시절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일이 그 소녀를 자전거에 태우고 다니는 순간이라 믿었다.
그렇게 해서 1957년 중학교를 마친 나는 다시 자카르타로 돌아와 고등경제학교에 입학했지만 여섯달 만에 완전히 흥미를 잃고 말았다. 결국 나는 마게랑에 있는 테갈레조(Tegalrejo) 페산트렌으로 옮겨가서 본격적인 무슬림 수업을 받는 학생이 되었다. 그리고 1959년 나는 좀방으로 옮겨가서 1963년까지 키아이 와하브 차스불라(Kiai Wahab Chasbullah)의 탐박 베사르 페산트렌에서 공부했다. 그리고 나는 페산트렌에 설치한 이슬람 서당 격인 마드라사(madrasah)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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