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 정치지도자의 고백/ 와히드 전 인도네시아 대통령 1]
와히드 인도네시아 전 대통령과의 격의 없는 대화… 눈의 결함 공격하는 건 차별에 해당
자카르타= 글 · 사진 정문태/ 국제분쟁 전문기자 · 아시아 네트워크 팀장
그이에게서 부드러움이 엿보였다. 그이에게서 여유가 풍겼다. 이건 분명 전에 보기 힘든 모습이었다. 대수롭지 않은 것들도 마치 ‘결심’한 듯 내리꽂던 그 말씨도 좀 변한 게 아닌가 싶었다. 세상에 치여 모가 누그러진 건지 아니면 한 ‘경계’ 넘은 건지 알 순 없지만, 분명한 건 그이와 마주 앉은 자리가 편하게 느껴졌다는 사실이다.

세계 최대 무슬림 국가인 인도네시아에서 가장 큰 무슬림 단체인 나들라툴 울라마(Nadhlatul Ulama)를 이끌던 시절 종교지도자 와히드가 내뿜는 ‘촌철살인’ 앞에 나는 말문이 막혔다. 그리고 수하르토 몰락 뒤 국민각성당(PKB)을 창당해 총선을 지휘하던 정치가 와히드가 쏘아대는 ‘독설’ 앞에 나는 기가 질렸다. 그 얼마 뒤 소수의석의 한계를 뛰어넘고 정치적 마술을 부려 대통령이 된 와히드가 늘어놓는 ‘일방통행’ 앞에 나는 정신이 오락가락했다.
한국의 대통령 탄핵? 모른다!
그랬던 나는 그이와 마주 앉은 4번째 자리에서 처음으로 말을 ‘주고받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마도, 인도네시아 최대 무슬림 가문에서 태어나 승승장구하며 대통령이 된 와히드가 2년을 채우지 못한 채 다수당의 ‘탄핵’ 일격을 맞고 쫓겨났으니 기가 좀 꺾인 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아무튼, 나들라툴 울라마 본부 한구석에 자리잡은 그의 사무실은 전직 대통령 집무실로 보기에는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그 흔한 경호도 의전도 없고 물은 ‘셀프’였다. 빛도 들지 않는 어두침침한 구석에 책상 하나만 달랑 놓고 그이와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면서 나는 멋진 ‘민주주의’를 엿보았다. 대통령만 했다면 감옥에 갔다 왔든 쫓겨났든 무조건 대접하는 한국판 민주주의와 좋은 비굣거리가 되었다.
- 한국에서도 지금 의회가 대통령을 탄핵해놓고 있는데, 소식 들었는가?
= 모른다. (그는 짧게 한마디 끊어 치고는 말문을 닫았다. 진짜 모르는 건지 ‘탄핵 알레르기’가 있는 건지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나는 귀를 의심하며 뒷말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 비슷한 상황이고 비슷한 논리다. 2001년 7월 당신을 탄핵한 인도네시아 정치판처럼.
= 그런 건 아시아 정치 발전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 말이 난 김에, 왜 그 무렵 국민협의회가 당신을 탄핵했다고 보나?
= 모두가 탄핵으로 정치적 이익을 챙기겠다는 음모였다. (목소리가 좀 높아졌다) 메가와티(투쟁민주당 대표·당시 부통령)는 나와 일하는 게 불편하다고 여겼고 나를 쫓아내면 당장 자기가 대통령이 되는 상황이었다. 악바르 탄중(골카당 대표·국민대표회의 의장)은 부패 혐의로 궁지에 몰려 있었고, 아민 라이스(국민위임당 대표·국민협의회 의장)는 늘 내게 경쟁의식을 지니고 있었고, 군부는 내 개혁 드라이브를 거부했으니….
- 2001년 7월23일, 그 새벽 당신이 대통령령을 발동해서 국민협의회를 차단하기 전에 정치적으로 협상할 수도 있지 않았나?
= 그건 정치적 타협 대상이 아니었다. 나를 탄핵하겠다는 국민협의회 개최 자체가 위헌이었고, 나는 대통령으로서 헌법을 보호할 의무를 지녔다. 그래서 대통령령을 발동했을 뿐이다. 그런데 그 법의 집행을 거부하며 나를 탄핵했으니, 근본적으로 위헌에 위헌을 더한….
- 당신의 탄핵 사유로 삼았던 부패 혐의, 이른바 ‘불고(Bulgo) 스캔들’과 ‘브루나이(Brunei) 스캔들’은 어떻게 되었나?
= 결국 사실이 아님이 드러났잖아. 사실이 아니니 조사한들 아무것도 나올 게 없었고. 그래서 정치적 음모라는 거다.
- 이번 대통령 선거에 당신이 다시 출마하겠다는 건 명예 회복의 의미인가?
= (손을 내저으며) 그런 것 없다. 명예 회복이라니? 인도네시아 시민들은 나를 존경해왔다. 새삼스레 그런 걸 염두에 두지 않는다.
- 그러면 다시 대통령이 돼서 그들에게 복수하겠다는 뜻인가?
= (웃음을 터트리며) 대통령은 그런 자리가 아니다. 아직 내가 인도네시아에서 할 일이 많이 남았기 때문이다. 특히 전면적인 개혁을 통해 민주주의를 다듬어야 한다. 당신도 알다시피 그 일을 할 만한 이들이 어디 있는가?
- 당신 없이는 민주 개혁이 영 불가능하다는 건가?
= 모두 서로 관점이 다르니.
- 2년이 못 되는 동안 대통령직에 있으면서 당신이 민주 개혁에 성과를 거뒀다고 보나?
= 두 가지다. 하나는 인종적·종교적 마찰과 분리주의 기운 차단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 결과 예를 들면 중국계가 마음놓고 살 수 있게 됐다. 또 하나는 국가 운영에 법치주의가 통하도록 발판을 다진 일이다.
- 어쨌든 대통령을 다시 하겠다면 부통령과 짝을 지어야 하고, 그러려면 다른 정당과 손을 잡아야 하는데, 그게 누구고 어느 당인가? 어차피 이번에도 당신이 이끄는 국민각성당은 잘해야 제3당이거나 제4당일 텐데.
= 아직 시간이 있다. 여러 사람들을 만나보고 이야기를 들어보고 결정해도 늦지 않다.
- 메가와티와 다시 손잡을 가능성은 ‘제로’라고 봐도 되나?
= 절대 그런 일은 없다. 코란은 말하기를 ‘한번 팠던 구멍을 다시 파는 이는 바보’라고 한다.
- 위란토 장군은?
= 군부와 손잡지는 않는다. 개혁의 근본을 부정하는 일이다.

“출마하면 당연히 성공한다”
- 악바르 탄중은?
= 시대적 요청에도 어울리지 않는 구시대 인물이다. 부패하고….
- 아민 라이스?
= 내게 경쟁심으로 불타는 그이가 부통령으로 나와 일하기를 원치 않을 거다. 게다가 아침에 콩이었는데 저녁에는 두부로 변하는 인물이라….
- 그러면 이번에 스타로 떠오른 수실로 밤방 유도요노(민주당 대표·전 정치안보조정장관)는 어떤가?
= 그는 자신이 대통령이 되겠다고 한다. 그러니 어떻게….
- 후보자로 떠오른 인물 가운데 유일하게 유도요노만은 부정하지 않는 것 같은데, 그와 짝을 지으면 ‘필승 카드’가 될 수 있다고 보는가? 선거가 끝난 날부터 곧장 그를 만나고 하면서 상당히 공을 들이는 느낌을 받았는데?
= 모두 대통령이 되겠다는 인물들인데, 그들과 짝짓는 게 어디 쉽겠는가? 그들 말고도 사회에서 신망받는 이들이 많다. 아무튼 좀더 시간을 두고 보자.
- 상황이 쉽지 않을 것 같더라. 사람들을 만나보니 당신의 ‘가능성’을 말하는 이들이 별로 흔치도 않고…. 이미 대통령을 했던 사람이 다시 출마해서 떨어지면 오히려 우습게 되는 거 아닌가? 출마하면 성공할 수 있다고 믿는가?
= 물론이다! 그만한 생각도 없이 일을 벌이겠는가? 후보자 하나하나가 아니라 전체를 놓고 판단해보라. 누가 가장 근접하는지가 드러난다. 어디서 어떤 사람들과 이야기해봤나? 인도네시아는 인구 2억명이 넘는 큰 나라다.
- 대통령 후보 가능성을 철회하고 ‘킹메이커’로 갈 수도 있는가? 확실하게 말해보자. 지금 어느 역할을 염두에 두고 움직이고 있는가?
= 여러 난점들을 극복해야겠지만, 가능하기만 하다면 당연히 대통령이다. 실질적으로 일을 하기 위해서 대통령을 하겠다는 것이다. 이미 국가 조직과 시민들이 내게 의견을 묻고 있는데, 굳이 내가 개인적인 욕심으로 대통령을 하겠다는 게 아니다. 그러나 아직은 정확하게 말할 단계가 아니다. 큰 틀에서 정치를 판단한 뒤 나보다 나은 사람이 있다는 생각이 들면 그이를 지원할 수도 있다. 그걸 ‘킹메이커’라 부를 수도 있겠는데….
- 요즘 건강은 어떤가? 벌써부터 상대쪽에서는 당신의 건강 상태를 공격지점으로 삼아 나섰고, 게다가 선거관리위원회(PKU)가 ‘신체건강’을 대통령의 조건으로 걸어놓았던데?
= 좋다. 아무 문제 없다. 내 건강을 놓고 정치를 하는 이들은 자신들이 일찍 죽을 것이다. 그리고 신체건강을 요구한 것은 나를 겨냥한 것일 수도 있고 아무튼 차별에 해당한다. 그래서 대법원에 해석을 요구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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