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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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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밀분쟁, 다시 어둠 속으로

등록 2004-04-15 00:00 수정 2020-05-03 04:23

[아시아의 총선/ 스리랑카]

다수당 된 스리랑카자유당-인민해방전선 연합, 민족연합전선이 일궈낸 ‘휴전’ 폐기선언

콜롬보= 수마두 위라와르네(Sumadhu Weerawarne)/ 기자

지난 4월2일, 스리랑카는 4년 남짓 만에 무려 세번째 총선을 치렀다. 이번 총선은 두어달 전 찬드리카 쿠마라퉁가(Chandrika Kumaratunga) 대통령이 권력을 이용해 의회를 해산하면서 비롯된 일이다.

“정부가 주류의 지원을 받는 한 의회를 해산하지 않겠다.” 쿠마라퉁가는 거듭 밝혔고, 심지어 의회 의장에게 서면 약속까지 했다. 그러나 그는 정부가 주류의 안정적인 지원을 받는 상태에서, 그것도 의회 임기가 4년이나 남은 상태에서 의회를 전격적으로 해산했다.

노르웨이의 분쟁 중재마저도 거부

“이번 총선은 ‘권력놀음’일 뿐, 국가 이익을 위한 행위가 아니다.” 시민사회가 실시한 각종 여론조사에서 경제계와 종교계를 비롯한 모든 사회 부문이 이번 총선을 원치 않는다는 결과가 나왔다. 또 조사 대상자들은 하나같이 안정과 협상을 정치 조건으로 꼽았다.

실제로 시민사회는 쿠마라퉁가 대통령과 그 경쟁자인 라닐 위크레마싱헤(Ranil Wickremasinghe) 전 총리가 마찰을 빚자, 둘이 함께 조화롭게 일할 것을 촉구해왔다. 문제는 쿠마라퉁가에게만 있었던 것도 아니다. 라닐 전 총리도 대통령을 통치권 속으로 끌어들이는 조화 대신 소외시키는 길을 찾으며 많은 실수를 저질렀다. 둘 사이의 마찰은 헌법상 대통령과 총리는 효과적인 통치를 위해 권력을 공유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은 결과다.

그 과정에서 쿠마라퉁가와 그의 스리랑카자유당(SLFP)은 마르크시스트 민족주의자인 인민해방전선(JVP)과 동맹 가능성을 확인하면서 총선 승리를 장담하게 되었다. 지난 총선에서 두 당이 모은 표를 합치면 현 총리 정부의 민족연합전선(UNF)을 이길 수 있다는 계산이 섰던 셈이다.

“타밀타이거와의 휴전은 끝났다.” 두 당은 민족연합전선이 이뤄낸 타밀타이거(LTTE)와의 ‘휴전’을 폐기시키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드러냈다. 인민해방전선은 휴전뿐만 아니라 노르웨이 중재마저도 부정했다.

그러나 쿠마라퉁가가 이끄는 신동맹의 이번 총선 승리가 곧바로 생존용 ‘보증수표’가 될 수 있을지는 섣불리 단정할 수 없다. 신동맹은 전 정부인 민족연합전선이 지난 2년간 달성한 업적을 뛰어넘어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무거운 현실을 지고 있기 때문이다.

민족연합전선은 누구도 걸고 넘어질 수 없는 중요한 업적인 내전 종식을 실현했다. 정부와 타밀타이거의 휴전협정은 나라 안팎에서 절대적인 환영을 받았다. 공식 여론조사에서 85%를 웃도는 시민들이 국민연합전선의 휴전을 지지했다. 일부 극우보수를 제외하면 아무도 전쟁판으로 되돌아가기를 원치 않는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물론 이번 총선에서 유권자들이 ‘평화협상이 국가를 위태롭게 한다’는 쿠마라퉁가와 인민해방전선의 판단에 동의하며, 그동안 평화협상 과정에서 드러난 민족연합전선의 일방적인 정치적 타협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심판을 내린 게 사실이더라도.

민족연합전선 정부가 성취한 또 다른 업적은 숨 넘어가던 경제를 살려냈다는 것이다. 민족연합전선은 외국의 지원을 얻어 신속하게 경제를 재건해 시민들에게 희망을 심어주었다. 비록 ‘평화 경제’가 대다수 가난한 이들의 삶 속에 아직 실질적으로 다가오지는 않았지만, 지난해 경제성장률이 5%를 웃돌았다는 사실은 그 전 정부가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던 것에 비춰보면 기적 같은 일이었다.

‘인종적 민족주의’가 승리하다

그럼에도 이번 4월2일 총선에서 최대 희생자는 그동안 민족연합전선을 이끌며 협상을 통해 인종간 평화를 추구해온 라닐 전 총리다. 민족연합전선은 자신들의 요새였던 도시 지역, 특히 콜롬보에서 불교 승려 자티카 헬라 우루마야(Jathika Hela Urumaya)가 지원한 인민선민당(PHP)의 일격을 맞고 패하면서 깊은 상처를 입었다. ‘JHU’ 깃발을 225개 선거구에 휘날린 ‘승려 정치’는 주류 싱할리가 소수 타밀에게 정치·경제적 이권을 양보할 수 없다며 민족연합전선을 압박했다. 그리고 민족연합전선을 지지해온 중산층이 평화협상 과정에서 타밀에게 정부 이권을 양보한 것을 못마땅히 여기면서 대거 이탈했다. 사실 평화협상의 최대 수혜자로 경제적 이권을 누렸던 중산층이 평화협상을 주도한 민족연합전선에 등을 돌린 것은 매우 이율배반적이었다.

반대로 이번 선거의 최대 승리자는 타협 없는 인종적 민족주의를 내건 정당들이었다. 특히 인민해방전선은 민족연합전선 정부가 협상 과정을 속였고, 그 결과 스리랑카를 둘로 분리시켰다고 성토하며 톡톡히 효과를 보았다.

결과를 놓고 볼 때, 민족연합전선 최고지도부는 주류 싱할리 서민 정서에 다가가지 못한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평화협상만 해도 민족연합전선 정부는 시민들에게 충분한 설명을 하지 않아 가치를 스스로 반감시켰던 게 사실이다. 정부는 그저 평화를 통해 시민들은 열매를 만끽할 수 있을 것이라고만 믿었던 모양이다. ‘평화 경제’에 대해서도 시민들은 구체적인 수혜와 친절한 설명을 기대했으나, 민족연합전선 정부는 좀처럼 입을 떼지 않았다.

한편 평화협상 상대자였던 타밀타이거도 민족연합전선 정부의 신뢰성을 손상시키며 시민들의 이탈을 조장했다. 타밀타이거는 무기 밀수와 소년병 모집 그리고 정적 살해로 시민들의 원성을 사면서 오히려 상대쪽 민족연합전선의 이미지에 타격을 입혔다. 그리고 타밀타이거는 과도행정부가 타밀족 지역인 북동부에 대해 중앙정부가 관여하지 않겠다는 제안을 하자 쿠마라퉁가 대통령의 의회 해산을 받아들였다.

어쨌든 이번 4월 총선 결과 어느 당도 독자적으로 새 의회를 움직일 만한 의석을 얻지 못했다. 비록 쿠마라퉁가 대통령과 그의 동맹당이 민족연합전선을 물리치며 승리했다고는 하지만 105석을 얻어 225석 의회의 과반수 달성에는 실패했다. 이건 시민들이, 현재 막다른 골목으로 내몰린 의회에게 모든 정당들이 ‘다당제’ 정신을 통해 함께 인종분쟁과 현안들을 풀어가야 한다는 분명한 신호를 보낸 결과다. 그리고 이번 총선 결과는 지금부터 평화협상 과정과 실행은 모든 정당들이 공유할 수 있는 계획과 전망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확인시켰다.

“휴전만은 지켜져야 한다”

이제 정치가들이 분명한 대답을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쿠마라퉁가 대통령은 그 강경한 태도로 어떻게 타밀타이거를 설득할 것이며, 인민해방전선은 자신들의 뜻대로 기존 휴전협정을 폐기하고 새롭고 완전한 휴전협정을 원한다면 그 형태를 분명히 밝힐 의무가 있다.

그러나 현재 무엇보다 중요한 건, 정치권이 시민들 소리에 귀기울이는 일이다. “비록 평화협상이 연기되더라도 휴전만은 지켜져야 한다.” 20년 내전에서 지친, 4년 동안 총선을 3번씩이나 치른, 그래서 피곤하고 불행한 시민들이 하고 있는 이 말을 말이다. 바라지 않던 총선은 끝났지만, 아직 스리랑카 정치의 안정을 말하기에는 이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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