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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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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 묻지 않은’ 커피 사세요!

등록 2004-04-09 00:00 수정 2020-05-03 04:23

영국 ‘공정거래마크’ 제정 10돌… 제3세계 상품 ‘윤리적 구매’로 세계무역 관행 바꾸다

런던= 글 · 사진 줄리언 체인 전문위원 juliancheyne@onetel.net.uk

‘공정거래마크’가 제정되고 공정거래 상품마다 이 마크가 부착된 지 10돌을 맞았다.

공정거래운동은 제3세계 생산자들에게 더 나은 가격을 보장해주자는 취지로 40년 전에 출범했다. 처음에는 소수의 다소 보수적이나 양심적인 소비자운동으로 출발했으나, 이제 급성장을 해서 바나나, 커피 등 일부 품목은 대형 슈퍼마켓까지 진출한 상태다. 이전에는 연간 수익이 약 1천만파운드였으나, 이제는 1억파운드 규모로 늘어났다. 지금은 250여종이 넘는 상품이 공정거래마크를 달고 시판되고 있으며 일부 유럽국가들에서는 15%까지 시장을 점유하고 있다. 영국은 센스베리, 테스코, 세이프웨이 등 주요 슈퍼마켓 체인이 공정무역상표를 단 상품들을 진열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실제로 대중적인 생산품의 종류는 커피, 바나나 초콜릿 등에 한정돼 있는 형편이다.

국제기구의 개발 방식에 반기 들고…

그간 괄목할 만한 성장에도 불구하고 공정거래 부문은 전체 소매시장의 아주 적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공정거래는 대부분 제3세계 개발 지원 프로젝트를 시작한 자선단체들, 특히 옥스팜(Oxfarm)과 협동조합운동이 주도했다. 옥스팜은 1960년대 초부터 제3세계 나라들에서 공예품을 수입하면서 공정거래운동을 시작했고, 지금 영국의 주요 거리에는 거의 하나씩 있는 옥스팜 가게를 통해 이를 팔고 있으며 카탈로그를 통해 우편주문도 받고 있다.

1960년대 영국의 자선단체들은 가난한 나라의 발전을 도모한다는 유엔개발계획(UNDP), 세계은행(IBRD) 그리고 국제통화기금(IMF) 등 국제기구들의 전통적인 개발 방식에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국제기구들은 대형 프로젝트를 들고 구원자적 혹은 관료적 태도로 가난한 나라에 진출했으나 이런 개발 방식은 거의 실패로 끝났다.

반면 옥스팜 등 시민운동 차원에서 출발한 자선단체들은 제3세계의 풀뿌리운동에 주목했다. 이들은 뿔뿌리운동이 제3세계 발전의 열쇠를 쥐고 있다고 보고 이에 힘을 실어주자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접근했다. 이들은 여성의 지위 향상이나, 토지개혁, 협동조합운동에 관심을 가졌다. 뿐만 아니라 세계은행 등이 추진하는 국가 주도의 대규모 사업 등을 비판하고, 국제무역의 불공정 관행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또 국제 무기거래, 개발도상국의 부채, 식량원조 등의 이슈에 대해 비판적인 캠페인 활동뿐 아니라 제3세계의 대안적 개발을 위해 이 분야의 연구활동을 지원하고 교육·출판 운동에도 나섰다. 옥스팜 등 급진적 자선단체들은 ‘비정치적’이라는 고정관념을 깨고 강대국이나 국제기구의 제3세계 정책에 강한 반대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공정거래의 또 하나의 주요한 축으로 활동하는 ‘트레이드크라프트’(Tradcraft)는 1979년 일련의 기독교인 그룹에 의해 설립됐다. 이 활동은 니카라과의 산디니스타와 연대를 위한 캠페인, 니카라과 경제를 돕기 위해 니카라과 커피를 파는 캠페인과 더불어 시작됐다. 커피는 공정거래운동의 대표주자 격이며 그 대상국은 라틴아메리카와 아프리카, 특히 탄자니아 등으로 빠르게 확산돼갔다. 환경운동의 성장과 함께 공정거래 관련자들은 환경친화적인 방법으로 재배하는 커피와 다른 농산물의 수입을 시작했다. 1994년 옥스팜, 트레이드크라프트, 크리스천 에이드 등은 공동으로 ‘공정거래협회’를 설립했다.

마을 단위 건강 · 교육 프로젝트와 연계

그동안 공정거래운동은 좌익과 우익 진영 양쪽에서 비판을 받았다. 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은 이를 시장질서를 깨뜨리는 행위로, 공정거래 행위가 경쟁력이 없는 생산자들의 명맥을 억지로 유지시키는 짓이며 경쟁 체제의 효율성과 혜택을 부정하는 것이라 공격했다. 좌익 진영에서는 이 운동이 거대한 대양에 물 한 방울을 타는 것에 불과하며 세계화 희생자들의 의식을 둔화시키는 것이라 보았다. 또 국제시장의 야만성이 가난한 나라에게 동정적인 방향으로 순화될 수 있다는 착각과 환상에 빠진 사람들끼리의 소꿉장난에 불과한 것이라고 보았다.

하지만 이 모든 탁상공론을 떠나 공정거래에 참여하고 있는 가나의 쿠아파 코쿠(Kuapa Kokoo) 협동조합의 예는 그 실천적 힘을 증명해준다. 공정거래는 대개 마을 단위의 건강과 교육 프로젝트와 연계돼 있다. 이런 프로젝트와 더불어 공정거래로 들어오는 안정된 수입이 얼마나 농민들을 땅으로부터 지켜주고 있으며 스스로 더 나은 생산품을 개발하는 데 도움을 주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이 농민들은 국제무역의 와중에서 땅을 잃고 파산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일부 코코아 농민들은 상태가 썩 좋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쿠아파가 생기면서 모든 것이 좋아졌습니다”라고 마을 사람인 리처드 암포마는 말한다.

지금까지 수출 농산물의 가격이 계속 내려가 심지어 지난 20년 전보다 떨어지자 제3세계 농민들의 사정은 어느 때보다 악화됐다. 옥스팜의 관계자 필 빌모어는 “점점 더 많은 농부들이 마약작물 재배로 돌아서거나 파산 지경에 이르고 있다”고 밝혔다. 이런 기존 무역 관행에 저항하고 새로운 대안무역을 실천하기 위해 공정거래에 참여하는 업자들은 장기계약으로 시장가격보다 높은 가격으로 제3세계 농산물이나 공예품 등을 사고 있다.

그리고 생산자들도 노동자들을 고용할 경우 노동자들의 권리와 평균임금 인상을 그들에게 보장해주어야 한다. 참여업자들은 특히 제3세계 여성그룹이나 협동조합, 소규모 부족의 지원에 비중을 두고 있다. 또 중간 상인을 배제한 상태에서 생산자들과의 직접거래 원칙을 지키고 투자자들에게는 낮은 이익배당금을 주어 비용을 가급적 줄이기 위해 애쓰고 있다. 소비자는 공정거래상품에 대해서는 통상 약간 높은 가격으로 살 용의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관련 단체들은 더 큰 틀에서 무역관계 자체가 변화해야 함을 잘 인식하고 있다. 이들은 이미 영국 국회에 탄원서를 제출하기 위해 300만명의 서명을 받아놓았다

지난 10년 동안의 반지구화운동과 환경운동의 확산, 제3세계 부채 문제에 대한 대규모 시위, 협동조합운동에 대한 새로운 관심, 식품안전 문제에 대한 대중의 관심 고조 등이 공정거래 시장의 잠재력을 높이고 있다. 또 이와 관련해 요즘 형성되고 있는 새로운 구매 문화도 한몫하고 있다. 사람들은 이제 유기농산물, 돌고래가 걸리지 않도록 고안된 그물망에서만 잡힌 참치, 무선별(free range) 계란 등 자신의 가치와 윤리를 표현할 수 있는 것들만 산다. 소비자 중 3분의 2가 윤리적 구매에 관심을 표시하고 있다고 한다.

소비자 3분의 2 윤리적 구매에 관심

공정거래는 보통사람들이 제3세계 문제에 관심을 갖고 세계무역의 관행에 대한 변화에 일상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고 있다. 공정거래 농산물의 소비자들이 반드시 잘사는 사람들만은 아니다. 제3세계에서 선진국 등으로 이민을 떠나 정착한 수많은 사람들 역시 공정거래의 막강한 후원자들이다. 저임금 노동자인 베스 존 같은 이도 웃돈으로 20펜스를 더 주더라도 공정거래마크가 붙은 바나나를 사고 있다고 말한다. 그는 “가난한 나라의 사람들이 너무나 적은 대가를 받는다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우리 가족은 이렇게라도 그들을 돕고 싶습니다”라고 덧붙였다. 자유무역의 원칙 가운데 하나는 “수요가 있는 곳에 공급이 있다”는 것이다. 만약 소비자가 좀더 비싸더라도 윤리적인 상품을 선택한다면 공정거래시장은 언제나 그에 반응해서 성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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