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핑객으로 넘치는 세르비아의 차이나타운… 유럽행 불법 이민자들의 중간거점 역할도
세르비아= 글 · 사진 하영식 전문위원 youngsig@teledomenet.gr
‘블록 70번지’.
세르비아의 차이나타운이 자리잡고 있는 곳이다. ‘70’이라고 쓰인 상가 건물에 접근할수록 더 많은 중국 사람들을 쉽게 목격할 수 있다. 모두 중국 사람들이 운영하는 가게여서 그런지 마치 중국의 한 지역에 온 듯한 착각을 느낄 정도였다. 건물 내부에 방한장치가 돼 있지 않아 상인들은 손을 비벼대면서 살을 에는 듯한 추위를 견디고 있었다. 이런 추위에도 대부분의 가게들은 물건을 고르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밀로셰비치 시대부터 중국인 봇물
소비자들이 찾는 물건은 발칸의 혹한을 막아줄 방한복이었다. 대부분 코트식으로 만든 파카가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파카를 입어보고 마음에 들었는지 한 여학생이 물건의 흥정을 끝내고 막 가게를 나가는 중이었다. 그는 “베오그라드 중심가에서는 같은 옷인데도 여기보다 가격이 훨씬 비싸다”고 말했다. 중국 옷가게에서 일하는 세르비아인 점원 롤라 센얀(31)은 “중심가의 많은 옷 소매점들이 이곳에서 물건을 대량으로 구입한 뒤 보통 2~3배의 가격표를 붙여 판매한다”고 귀띔했다. 그래서인지 이곳을 찾는 발길은 점점 늘어나고 있다. 지방은 물론 루마니아, 불가리아 등 외국에서도 물건을 사기 위해 이곳까지 온다.
이곳에는 하루에 100만명의 쇼핑객이 몰려들고, 경기가 좋지 않을 때도 50만명의 쇼핑객들이 끊이지 않는다는 게 상가쪽 주장이다. 물론 중국에서 대량으로 들어오는 값싼 옷가지들이 주로 거래되는 상품들이지만, 이제는 품목도 차츰 다양해지고 있다. 이곳에 입주해 있는 상점 수는 400여개에 이르고, 이곳에서 일하는 중국인들은 6천여명에 달한다. 그리고 세르비아 전역에는 약 10만명의 중국인들이 머물고 있다.
짧은 시기에 많은 중국인들이 세르비아로 몰려든 이유는 옛 유고슬라비아의 정치적인 문제 때문이다. 1996년 밀로셰비치가 중국을 공식 방문한 뒤 중국인들에게 유고슬라비아 비자를 자유롭게 발급해주도록 만들었다. 당시 유고슬라비아는 미국과 유럽의 금수 조치로 인해 외부에서 들어오는 물자가 부족한 형편이었는데, 중국은 당시 부족한 물자의 공급원으로서 큰 역할을 했다. 세르비아로 오는 중국인들은 관광객 신분으로 머물면서 이곳에 자리를 잡거나 불법으로 유럽으로 건너간다.
블록 70번지의 다른 모습은 이곳에 온 중국인들에게 임시로 일자리나 거처를 제공하고 유럽으로 갈 수 있도록 밀수조직과 접촉을 시켜주는 곳이라는 점이다. 유럽으로 건너가기 위해 베오그라드에 온 중국인들은 대부분 4인용 아파트에 20명 정도가 함께 생활하면서 기회를 보고 있다. 이로 인해 세르비아는 유럽의 따가운 눈총을 받아왔다. 언론에서는 ‘밀로셰비치의 유럽에 대한 복수’라고 비꼬기도 한다. “너희(유럽)는 폭탄을 보냈지만 나(밀로셰비치)는 중국인들을 보내마”라는 희화성 유머가 퍼지기도 했다. 어쨌든 유럽으로 건너가는 불법 이민자들- 중국인, 러시아인, 우크라이나인, 루마니아인, 불가리아인, 터키인, 이라크인, 쿠르드인, 파키스탄인, 인도인- 의 80%가 세르비아를 경유한다는 유럽연합의 발표가 있을 정도로 불법 이민자 문제에서도 서로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인간 밀수조직들의 달콤한 말에 넘어가
그렇다면 중국인들이 유럽으로 가기 위해 목숨을 건 긴 여행길에 오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화려한 유럽에 대한 환상 때문이다. 중국 쓰촨 출신인 주제위(31)는 형 때문에 그나마 봉변을 피했다. 3년 전 형이 먼저 와서 자리를 잡은 덕분에 지금은 2년 만에 자신의 가게까지 운영하는 성공한 사업가가 됐다. 이곳에 오기 전 그는 시골의 집단농장에서 일했는데, 낮은 수입이 언제나 불만이어서 외국에 나가 다른 삶을 살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어느 날, 영국에 살고 있다는 모교 선배가 찾아와서는 “영국에서 성공해 잘산다”고 자랑하며 자신의 집과 차를 찍은 사진을 보여주었다. 선배는 “영국은 천국처럼 조금만 일하면 수준 높은 생활을 할 수 있는 나라”라며 “2만달러만 지불하면 영국에 갈 수 있고 영국에 도착하기만 하면 집도 주고 자동차도 준다”는 달콤한 말을 했다. 이 말에 혹한 그는 고민 끝에 코소보에서 장사하는 형에게 전화를 했다. 그러나 그의 형은 그에게 주의를 주고는 그를 코소보로 불렀다. 그는 “지금도 당시의 일을 생각하면 아찔하다”고 말했다.

그처럼 시골에 사는 많은 중국인들은 국제적인 인간 밀수조직의 꾐에 넘어가 가재도구를 다 정리하고 영국이나 스칸디나비아 국가로 가기 위해 이들을 따라나선다. 인간 밀수조직이 요구하는 비용은 엄청나서 누구도 선뜻 비용을 지불하지 못한다. 하지만 조직들은 나중에 일해서 비용을 갚는 조건을 내걸기 때문에 보통 거절하지 못하고 따라나선다. 이런 경우는 유럽 목적지에 도착하자마자 현대판 노예처럼 감금된 상태에서 몇년 동안 일하게 되기 십상이다.
인간 밀수조직 관계자들을 만나기 위해 블록 70번지를 며칠 동안 헤맨 뒤 세르비아인 한 사람을 소개받을 수 있었다. 그는 지금 인간 밀수사업에서 완전히 손을 씻은 상태지만, 친구가 현재 교도소에서 인간 밀수로 인해 5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라고 했다. 그의 인간 밀수에 대한 회상은 드리나강에서 시작된다. 물론 필자도 그곳을 방문한 적이 있기 때문에 그 강의 회상은 마치 선명한 그림처럼 펼쳐졌다. 보스니아와 세르비아의 국경선이 돼버린 드리나강은 보스니아 출신의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이보 안드리치의 소설 로 더욱 유명해졌다. 이전에는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깃발 아래 한 나라였지만, 지금은 완전히 분리된 별개의 국가로 강 맞은편에는 두개의 국경검문소가 설치돼 지나가는 차량과 사람들을 통제하고 있다. 세르비아쪽 국경검문소를 통과해 100m 정도 되는 드리나강의 다리를 건넌 차량들은 보스니아쪽 국경검문소의 날카로운 국경 수비대원들의 검문을 통과하게 돼 있다. 고요히 흐르는 드리나강의 양편에는 절경을 이루는 거대한 산들이 마주 보고 있고, 여름철 산장들이 여기저기 흩어진 채 산기슭을 차지하고 있다. 포장된 험한 산길은 보스니아의 수도인 사라예보까지 닦여 있다.
세르비아 상인들의 텃세도 무시 못해
그러나 문학가 이보 안드리치가 낭만적으로 묘사했던 드리나강은 불법 이민자들이 밤마다 목숨을 걸고 몰래 넘어가야 하는 사선이 돼버렸다. 밤마다 강의 양 기슭에서는 불법 이민자들을 실어온 세르비아쪽 조직원들과 이들을 넘겨받기 위해 기다리는 보스니아쪽 조직원들의 ‘소리 없는 작전’이 진행된다. 불법 이민자들은 미니버스로 한꺼번에 10~15명씩 드리나강 기슭에 도착해 나룻배와 함께 기다리는 보스니아쪽 조직원들에게 넘겨진다. 그 뒤 조용히 나룻배로 드리나강을 건너 산기슭을 따라 한두 시간 정도 등산해, 이들을 사라예보까지 싣고 갈 차량이 대기하는 곳까지 걷게 된다. 불법 이민자들이 베오그라드에서 사라예보까지 넘어가는 데 지불하는 비용은 대개 500달러 선이다. 이들은 사라예보에서 이틀 정도 휴식을 취한 뒤 다시 여정에 오른다. 이번에는 보스니아와 크로아티아를 갈라놓는 국경선인 사바강을 같은 방법으로 건너게 된다. 이들을 사바강 저편으로 건네주는 대가로 다시 500달러가 넘겨진다.
불법 이민자들의 발길이 크로아티아에 닿기만 해도 기나긴 여행의 85%는 성공한 셈이다. 크로아티아에서 이탈리아로 보트로 넘어가든지 아니면 슬로베니아로 산을 넘어가는 일은 아주 수월하게 진행된다. 대부분의 불법 이민자들은 상대적으로 불법 이민자들에 대한 처우가 양호한 영국이나 네덜란드,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을 최종 목적지로 선호하고 있다.
반면에 유럽행을 포기하고 세르비아에 살고 있는 중국인들은 이곳에 영구히 머물기를 원하지만 이것도 사실은 쉽지 않다. 중국인들의 사업이 번창할수록 세르비아 상인들의 텃세는 더 심해진다. 두달 전에는 두명의 젊은이들이 306호 상점에 화염병을 던져 이곳을 방화한 적도 있다. 하지만 소비자들의 발길이 끊길 것을 두려워한 중국 상인쪽에서는 이 일을 묻어두고 있다. 그리고 선거 때만 되면 벌어지는 경찰과 세무서를 통한 강제 모금이나 뇌물 강요, 이민국 경찰들의 검거 선풍도 이곳의 중국인들을 불안하게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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