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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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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끈하게, 신중하게!

등록 2003-10-16 00:00 수정 2020-05-03 04:23

미-일 동맹 위해 가장 먼저 미국 지지… 미군병사 잇단 사살에 자위대 파견발표는 꺼려

이라크에 대한 미국의 군사적·물질적 지원 요구에 대한 일본의 최근 대응은 ‘겉으로는 신중하게, 속으로는 화끈하게’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일본은 미국이 3월에 유엔 결의 없이 이라크 공격을 개시했을 당시, 세계에서 가장 먼저 미국을 지지했다. 고이즈미 총리는 기자회견에서 미-일 동맹과 대량살상무기 확산 방지를 지지의 주요한 이유로 들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미-일 동맹이 최우선적 이유였다. 고이즈미 총리는 “미-일 동맹 없이는 일본의 안전도 번영도 없다”는 말을 거침없이 했다. 미국 중시와 함께 전후 일본 외교의 두 축을 형성해온 유엔 중심 외교가 허구였음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순간이었다.

전투행위에 휘말리면 어쩌나…

이어 5월에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이 이라크 전쟁 종결을 선언하자, 일본은 미국의 뜻에 따라 이라크 재건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뜻을 피력했다. 고이즈미 총리의 이런 대미 추종 자세에 대해 국내외에서 ‘푸들외교’라는 비난이 나왔지만, 일본은 끄덕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 고이즈미 총리는 7월 자위대를 이라크에 파견하기 위한 이라크지원특별법을 심의하는 국회에서 “이라크에서 아직 대량살상무기가 발견되지 않고 있는 것은 이라크 공격이 명분 없는 전쟁이었음을 방증하는 것이 아니냐”는 야당 의원들의 비판에 “지금 후세인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해서 그럼 후세인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얘기냐”는 어거지 논리로 반박하기도 했다. 그리고 야당의 반대 속에 전후 처음으로 육상자위대를 해외 전투지역에 파견하는 이라크특별법을 강행 처리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겉과 속을 가릴 것 없이 미국을 될 수 있으면 화끈하게 지원하겠다는 일본의 자세가 두드러졌다. 그러나 테러특별법이 통과된 7월 이후에도 계속 미군 병사들이 사살되는 사건이 일어나고, 심지어 유엔 현지 본부가 폭파되는 일이 벌어지자, 일본 안의 여론이 꿈틀대기 시작했다. 섣불리 자위대를 파병해 자위대원이 숨지거나 전투행위에 휘말릴 수 있다는 불안감을 일본 국민들이 현실적으로 느끼게 된 것이다.

이 시점부터 일본 정부도 자위대의 현지 파견에 대해 신중한 자세를 취하기 시작했다. 더욱이 11월9일에 중의원 총선을 앞두고 있는 고이즈미 정권으로서는, 이런 분위기 속에서 자위대를 총선 전에 파견해 사상자라도 나면 정권을 내놓을 수도 있다는 점을 우려하기 시작했다. 일본이 9월14일에 출발해 10월9일 귀국한 정부합동이라크조사단을 비롯해 이제까지 방위청, 국회, 정당 등의 조사단을 10차례 이상 파견하면서도 아직 자위대 파견 시기나 지역 등에 대해 발표를 하지 않는 것은 이런 국내 정세를 고려해서다. 미국에는 보내기 위한 준비를 계속하고 있음을 보여주면서 파견 시기는 선거 이후로 미루려는 의도에 따른 것이다.

그러나 총선이 끝나면 일본 자위대의 이라크 파견이 곧바로 이뤄질 것이라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일본 지도부는 미-일 동맹의 관점뿐 아니라, 석유의 대부분을 중동지역에 의존하고 있는 경제안보의 측면에서 이라크 개입을 중시하고 있다. 또 더 거슬러올라가면 130억달러의 거금을 내고도 욕만 얻어먹은 1991년 걸프전쟁 때의 쓰라린 경험을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확고하다. 북한 문제를 지렛대로 극성을 부리고 있는 일본 안의 보수·우경화 분위기도 자위대의 해외 역할 확대에 순풍으로 작용한다.

일본은 총선 뒤 연말께 100명 규모의 선발대를 시작으로 내년 초에 대략 1천명 규모의 자위대 본대를 치안이 비교적 안전한 남부지역에 보내 물자수송, 전력 및 식수공급, 의료활동 등을 할 방침이다. 또 자금 면에서도 올해부터 4년간 40억~50억달러를 지원하는 것을 검토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의 자위대 파견과 자금 지원 규모는 17일 부시 미국 대통령의 일본 방문 때 1차적으로 윤곽이 드러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일본은 미국의 압력을 받아 이라크 지원을 한다는 인상을 국민에게 줄 경우 총선뿐 아니라 대미관계에도 악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을 고려해 이라크 상품을 ‘신중’과 ‘주체’로 포장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도쿄= 오태규 특파원 ohta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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