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프로야구 유일의 4할 타자’ 백인천(75)씨는 1962년 한국인 최초로 일본 프로야구에 진출했다. 농업은행 소속 19살 청년은 “일본에서 야구를 하고 싶다”는 순진한 생각으로 도에이플라이어스 구단과 덜컥 가계약을 맺었다. 반일 감정이 높을 때라 일본에 간다는 것 자체가 ‘매국노’라는 소리를 듣던 때였다. 하지만 “2년 후 병역을 마친다”는 조건으로 정부의 출국 허가를 받았다.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부의장을 맡은 이주일 대한체육회장이 “유망한 젊은이는 해외로 내보내는 편이 나라를 위하는 일”이라며 오피니언 리더 등을 대상으로 찬반 여론조사를 지시했고, 찬성 여론이 압도적으로 나왔기 때문이다. (자서전 <백인천의 노력자애>, 산케이신문 2009년 11월 연재 참고)
중앙정보부 소속으로 뛴 백인천
일본에서의 활약상에 힘입어 그는 1969년까지 병역을 유예받았다. 그런데 엉뚱한 데서 불똥이 튀었다. 병역기피를 노린 국회의원 아들들의 외국 유학이 사회문제로 떠올랐고 이에 부담을 느낀 박정희 정권이 그를 귀국시켰다. 결국 27살에 육군에 입대한 그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3선에 성공한 뒤인 1971년 일본으로 돌아갔다. 전역한 것은 아니었다. 남은 병역 기간(2년6개월)을 당시 한국중앙정보부(KCIA) 소속이라는 ‘기묘한 신분’으로 일본 프로야구에서 뛰었다.
백인천씨 사례로 불거진 운동선수와 병역 문제는 반세기가 지났지만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9월2일 폐막한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은 한국에 한해서 ‘손흥민·오지환 게임’이었다. 축구 국가대표 손흥민 선수와 야구 국가대표 오지환 선수 모두 아시안게임을 통해 병역면제를 노렸고, 꿈을 이뤘지만 한 사람에겐 그의 미래에 대한 축하가, 다른 한 사람에겐 “이제라도 입대하라”는 댓글이 지금도 달리고 있다. ‘무임승차’로 비난받던 오지환 선수 때문에 “야구는 (병역특례에 해당하지 않는) 은메달 따라” 같은 반응이 대회 내내 쏟아졌다. 국가 대항전마다 온 국민을 단결시킨 ‘국뽕’(국가주의+히로뽕)의 위력이 병역 문제 앞에서 무너진 것이다.
스포츠 선수를 둘러싼 병역 논란이 전개되는 과정의 뼈대는 백인천씨가 일본에서 뛰던 56년 전이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진 게 없다. ‘절정의 기량을 발휘하는 20대 선수에게 병역 문제가 발목을 잡는다→ 국위 선양하는 이에게 기회를 주자라는 여론이 형성된다.→ 정치권이 나서서 기존 법을 바꾸거나 특례법을 만든다 → 특정 사건이나 선수 때문에 형평성 논란이 불거진다→ 병역특례제도 개편을 검토한다.’
애초에 병역특례 기준이 자의적이고, 여론의 입김과 정치권의 정무적 판단이 개입해왔기 때문에 빚어지는 악순환이다. 아시안게임 금메달리스트들이 편입되는 ‘예술·체육요원’의 병역법상 정의는 ‘예술·체육 분야의 특기를 가진 사람으로서 문화 창달과 국위 선양을 위한 예술·체육 분야의 업무에 복무하는 사람’이다. 결국 아시안게임 병역특례 혜택 논란은 ‘문화 창달’과 ‘국위 선양’이란 과거 권위주의 시대의 언어가 2018년에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질문을 던지고 있다.
박정희 때 도입, 전두환 때 부활
운동선수에게 병역특례 혜택을 준 것은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인 1973년 4월부터다. 당시 비상국무회의는 ‘병역 의무의 특례규제에 관한 법률’을 만들어 다양한 병역특례제도를 도입했다. 이때 과학·기술 분야 병역특례와 함께 ‘학술·예술 또는 체능의 특기를 가진 자’도 사실상 현역병 징집을 면제하는 보충역에 편입시키기로 했다.
당시 신문 기사를 보면 국방부 당국자는 “군 수요를 충원한 나머지 장정에 대해서 이같은 특혜를 주는 것이다. 개인의 전문 기술을 계속적으로 개발, 국가 산업 육성에 공헌하고 나아가 공평한 병역의무를 부과케 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고 했다. 구체적인 선발 기준은 없었고, 국무총리가 위원장이 된 특기자선발위원회가 관계 중앙행정기관의 장의 추천을 받아 선발하기로 했다. 출발부터 병역 대상 운동선수들을 ‘국가의 자원’으로 인식한 것이다. 하지만 국제 스포츠 수준에 근접하지 못한 당시로선 1976년 몬트리올올림픽에서 광복 이후 첫 금메달을 딴 레슬링 양정모 선수가 병역특례 1호로 수혜자가 됐고, 관련 법안은 사실상 사문화됐다.
사문화된 제도를 살린 것은 전두환 정권이었다. 역시 국가주의적 발상이었다. ‘1988 서울올림픽’ 유치가 확정된 1981년 10월 정부는 법 시행령을 개정해 구체적인 기준을 마련했다. 세계올림픽대회·세계선수권대회(청소년대회 포함)·유니버시아드대회·아시안게임·아시아선수권대회(청소년대회 포함)에서 3위 이상으로 입상한 자, 한국체육대학 졸업자 중 성적이 졸업 인원 상위 10%에 해당하는 자 등이 보충역으로 편입되는 길을 터줬다. 올림픽 3위 이상, 아시안게임 금메달 선수들에게만 혜택을 주는 지금보다 범위가 넓다. 하지만 올림픽 이후 병력 자원 부족, 형평성 논란 등이 불거지며 1990년 4월 올림픽대회 3위 이상, 아시안게임 1위 입상자로 범위가 제한됐다.
다시 운동선수에 대한 병역특례의 기본 틀이 흔들린 건 2002년 축구 국가대표팀이 4강에 진출한 한·일 월드컵 때였다. 사상 첫 16강 진출에 대표팀 라커룸을 찾은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홍명보 당시 대표팀 주장(현 대한축구협회 전무)이 “후배들의 군 복무 문제를 해결해달라”고 건의했고, 김 전 대통령은 “축구 발전을 위해 중대한 사안인 만큼 국방부 장관과 상의해 잘될 수 있도록 돕겠다”고 답했다. 정부는 ‘월드컵축구대회에서 16위 이상의 성적을 거둔 사람’에게 병역특례 혜택을 부여하는 것으로 규정을 손봤다. 이에 누리꾼들은 홍명보 전무를 ‘원조 합법적 병역 브로커’라고 한다.
한번 원칙이 흔들리니 다음은 더 쉬웠다. 2006년 제1회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서 야구 국가대표팀이 일본을 두 번 꺾고 6전 전승으로 4강에 진출하자 바로 다음날 당시 여당인 열린우리당과 국방부는 야구 대표선수들에게 병역특례를 적용하기로 결정했고 그해 9월 병역법 시행령에 반영했다. 모두 국민 여론과 이를 의식한 정치권이 만들어낸 ‘예외’였다. 당연히 특정 종목에 대한 특혜라는 거센 비난 여론이 생겼고 결국 관련 규정은 2007년 12월28일 삭제됐다.
국위 선양보다 형평성 잣대가 우선
이후 프로선수들이 출전하는 축구와 야구 선수들의 병역특례 혜택은 늘 입길에 올랐다. ‘국위 선양’보다 형평성·공정성이라는 잣대가 앞섰다. 국군체육부대가 창설돼 군 복무 중에도 운동을 이어갈 수 있는 기회가 보장되고, 선수들의 국외 진출이 늘어나며 병역특례 혜택이 곧 엄청난 부를 의미한다는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됐기 때문이다. 2012년 런던올림픽 축구 경기에서 일본과의 3·4위전, 후반전 44분에 교체돼 4분을 뛰고 병역특례 혜택을 받은 한 선수에 대해 ‘44분 훈련병, 45분 이병, 46분 일병, 47분 상병, 48분 병장, 경기 끝 제대’ ‘입대를 하자마자 제대를 하는 속도’ 등의 조롱이 뒤따른 것은 대표적 사례다. 이는 실제 경기에 출전해야 혜택을 받는 규정 때문으로 오지환 선수 이전에도 ‘무임승차’ 논란이 계속돼온 것이다. 출전하지 못하더라도 후보 선수들 역시 한 팀으로 주전들의 경기력을 뒷받침한다는 당연한 ‘스포츠 정신’이 병역특례 혜택 앞에서 쉽게 무너졌다.
반면 간혹 손흥민 선수처럼 외국 리그에서 이름을 떨친 선수들이 혜택을 받는 경우엔 ‘국위 선양’의 잣대가 앞서며 여론은 관대했다. ‘한국 최초의 메이저리거’ 박찬호 선수가 금메달을 따며 병역 혜택을 받은 1998년 방콕아시안게임 야구대표팀은 참가 선수 전원이 병역미필자였지만 여전히 야구팬들 사이에서는 감동적인 순간으로 기억된다.
운동선수의 병역특례 혜택을 바라보는 모순적 시선 때문에 제도 개편 논의도 최근 들어 점점 형평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번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따며 혜택을 받는 42명은 병역이 면제되는 것이 아니라 4주간의 기초 군사훈련을 받고 34개월간 예술·체육요원에 편입돼 ‘대체복무’를 하는 것이다. 여기에 2014년 12월 병역법이 개정돼 “복무 기간에는 자신의 특기를 활용해 544시간 동안 봉사활동을 해야 한다”는 의무가 추가됐다. 누적점수제(대회별로 점수를 매겨 일정 점수 이상을 획득하면 특례를 부여), 복무 기간 발생 수입에 대한 세금 부과, 봉사활동 시간 확대 등 형평성을 보완하는 데 무게를 둔 아이디어도 꾸준히 나왔다. (‘스포츠 선수 병역특례제도 체육요원제도의 형평성 확보 방안’, 2017)
이번 아시안게임이 논란이 되며 20대 국회에서도 각종 아이디어가 쏟아진다. 군 복무 시점을 최대 50살까지 본인이 선택할 수 있도록 해 경력단절을 방지하는 방안(김병기 더불어민주당 의원), 은퇴 후 재능기부를 일정 기간 하게 해서 군대 문제를 해소하자는 방안(안민석 민주당 의원) 등이 나왔다. 청와대 청원 게시판에는 프로선수들이 비시즌에 군 복무를 하는 ‘분할복무제’를 제안하는 글도 올라왔다. 병무청은 병역특례제도를 전면 개선하겠다는 뜻을 밝혔고, 문화체육관광부는 9월5일 예술·체육인들에 대한 병역특례제도 개선 전담팀(TF)을 구성했다.
하지만 국위 선양·문화 창달이라는 프레임에 계속 사로잡힐 경우 병역특례제도는 계속 논란이 될 수밖에 없다. 하태경 바른미래당 의원의 발언처럼 “BTS(방탄소년단)는 왜 병역 혜택이 안 되느냐”며 대중음악계에도 혜택을 줘야 한다는 요구는 다른 분야에서도 동일하게 나올 수 있다.
결국 병역특례제도 개편은 대체복무제의 다양화라는 틀에서 논의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들의 대체복무 방안이 논의되고 있는데다 이미 우리 병역은 사회복무요원, 전문연구·산업기능 요원, 예술 요원 등 다양한 대체복무제를 운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면 폐지 23.8%, 현행 유지 21.4%
여론조사기관 리얼미터가 9월5일 전국 성인 500명에게 ‘병역특례제도 개선 방향’을 물어본 결과(95% 신뢰 수준에 ±4.4%포인트), ‘전면 폐지’ 입장은 23.8%, ‘대상자 확대, 수혜자 축소’는 28.6%로 집계됐다. ‘현행 유지’는 21.4%, ‘대상자·수혜자 모두 확대’는 13.3%였다.
이승준 기자 gamja@hani.co.kr전화신청▶ 1566-9595 (월납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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