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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명보, 네 멋대로 해라

브라질 월드컵 실패 이후 여론의 질타 받은 오래된 영웅…
그의 새로운 전진을 응원하며
등록 2016-01-09 14:10 수정 2020-05-03 04:28
연합뉴스

연합뉴스

“그동안 모든 사람의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많았다. 더 이상은 그러지 않을 것이다.” 중국 항저우 뤼청으로의 감독 계약을 알리는 기자회견에서 홍명보가 한 말이다. 언론은 홍명보가 했던 수많은 말들 대신, 자극적일 수 있는 이 발언을 제목으로 선정했고, 당연히 네티즌들의 조롱이 융단폭격됐다. 홍명보가 말하고 언론이 따옴표를 치고 네티즌이 조롱을 퍼부어대는 것은 지난 월드컵 이후 익숙해진 풍경이다.

어쩌다 이 지경까지 온 것일까. 세계 올스타전에서 파울로 말디니와 함께 슈퍼스타들을 조율하며 세계의 찬사를 받았던, 한국이 낳은 아시아 최고의 수비수, 주장으로서 월드컵 4강, 감독으로서 올림픽 동메달을 일구어낸 영웅이 해외도 아닌 자국에서 단기간에 이 정도의 조롱을 받으며 실정법을 위반한 범죄자처럼 손가락질받는 사례는 세계 축구사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홍명보는 그저 월드컵에서 1번의 실패를 경험한 감독일 뿐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알제리전, 단 1게임에서 실패한 감독일 뿐이다(한국 축구가 러시아와 비겼다고, 벨기에에 1:0으로 졌다고 감독을 비난한다면 당신은 축구를 볼 자격이 없다). 하물며 지난 월드컵에서 알제리팀은 가장 역동적인 축구를 보여준 팀이기도 했다. 알제리의 경기력은 홍명보뿐만 아니라 전세계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애초에 한국 축구가 당연히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는 말이다.

사람들은 근거 없이 ‘1승 제물’이라 생각했던 알제리전의 패배에 대한 분노를 어딘가에 풀고 싶었고, 감독 홍명보를 단두대에 끌어올렸다. 대한축구협회의 졸속 행정으로 불과 월드컵 1년 전에 긴급 투입된 감독이라는 사실은 네티즌에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마치 대신 출전했다면 알제리를 박살내버릴 선수들이 한국에 따로 있는 것처럼 ‘인맥축구’ ‘엔트으리’라는 유치한 조롱을 난사하기 시작했고, 급기야 월드컵 전에 홍명보가 광고에 출연하고, 개인적으로 부동산 매매를 했다는 사실까지 꺼내들며 ‘땅명보’라는 별명까지 만들어 한 개인의 인격을 학살했다.

지난 월드컵에서 월드컵 기간 중 선수들에게 공식적으로 섹스를 허용한 브라질·독일·네덜란드는 모두 4강에 올랐고, 섹스를 금지한 국가들은 모두 8강 이전에 탈락했다. 그러니까 축구 열강들 사이에서 사생활의 허용 범위에 대해 수많은 논쟁이 오갈 때, 한국은 감독이 휴식일에 개인적 일로 잠시 외출한 사실이 마치 월드컵 실패의 주원인인 것처럼 조롱하고 있다. 한국 네티즌들에게 실패한 개인의 사생활이란 그저 죄악인 것이다. 그렇게 추앙하는 히딩크가 월드컵 전 수많은 광고에 출연하고 심지어 여자친구와 함께 숙소를 사용했다는 사실은 까맣게 잊었다.

얼마 전 약관의 베트남 선수 르엉 쑤언 쯔엉이 인천 유나이티드에 입단했다. 자국 선수가 유럽리그도 아닌 K리그에 입단한 것만으로 베트남 사회는 열광했다. 베트남은 유럽 4대 리그를 모조리 생방송으로 TV 중계하는 나라다. 그 나라의 국민은 자국의 축구 실력과는 상관없이 그저 축구라는 스포츠가 주는 보편적인 즐거움을 얻어낸다. 지난 30년 동안 계속 월드컵에 진출한 유일한 아시아 국가인 한국의 축구팬들은 도대체 축구로 무엇을 얻으려는 것인가. 한국의 기자들과 네티즌들은 스마트폰을 쥐고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가. 과연 한국 축구팬은 베트남 축구팬보다 행복할까.

“늘 모든 사람의 기대에 부응하려는 부담이 컸지만 이제는 그러지 않겠다.” 겨우 이 말을 하기 위해 홍명보에게 얼마나 많은 고민과 용기가 필요했을까. 한 개인의 실패를 용서하지 않고, 연관검색어로 심어둔 채 두고두고 조롱을 이어가는 온라인 연좌제. 한 개인의 인격을 찢어발기는 것에 사람들은 아무런 죄책감이 없었고 그것이 국가대표팀을 응원한 네티즌들의 당연한 권리라는 낯간지러운 자기합리화도 빼놓지 않았다. 늘 한국 축구의 소중한 자산을 갉아먹으며 퇴출시켜온 것은 3류 기자들과 네티즌들이다.

홍명보가 자유로워지길 바란다. 한국 축구에 대한 오래된 책임감은 훌훌 털어버려도 된다. 그의 말대로, 이제는 세계 어디서든 그가 그토록 사랑했고 좋아했던 축구만 생각하며 굳건히 전진하길 기원한다. 이렇게 아픈 이름으로 조용히 사라지기엔 우리 세대가 그에게 받아왔던 선물이 너무 크다. 홍명보. 이제 네 멋대로 해라.

김준 스포츠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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