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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거인의 꿈은…

격투기 링 안의 재미있는 볼거리로 전락한 거대하지만 힘없는 최홍만, 이제 그를 보면 마음이 아프다
등록 2015-08-07 16:53 수정 2020-05-03 04:28
네이버 tvcast 화면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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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때 학교에 자주 출몰하는 거인 아저씨가 있었다. 짧은 스포츠머리에 다소 험상궂은 인상이었으며 아이들의 키는 그의 허리 즈음에 가닿을 뿐이라 늘 90도로 하늘과 함께 올려다봐야 얼굴이 보이는 분이었다(기억 속의 이미지를 조합건대 키가 2m를 넘었던 것 같다). 태어나서 처음 ‘사이즈’에 압도당했던 강렬한 기억이다.

학교에 교보재를 납품하는 일을 했던 분 같은데 그가 학교에 나타나는 날이면 온 학교 아이들이 이 거인을 구경하기 위해 그의 옆에 매미떼처럼 들러붙어 피리 부는 사나이를 쫓아가듯 졸졸 따라다녔다. 거인은 땡볕이 내리쬐는 여름에도 늘 긴팔 셔츠를 입고 다녔는데 아이들은 그의 팔에 ‘용’이 그려져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언젠가부터 그가 보이지 않았는데, 선생님의 말인즉 그가 나타나면 온 학교가 난리가 나니 학교 쪽에서 해당 업체와의 거래를 계속하는 것에 난색을 표했다고 한다. 한때 주먹깨나 썼을 법한 이 거인이 문신을 가려가며 학교에 교보재를 납품하는 평범한 일상에 도전했지만, 그의 너무 큰 육체는 평범한 인생에 방해가 될 뿐이었다. 그 거인에겐, 남들처럼 사는 게 제일 힘든 일이었다.

지난 7월25일, 일본에서 열린 격투기 대회 로드FC에서 6년 만에 링에 오른 최홍만은 1회 1분30초 만에 상대의 펀치 한 방에 실신 KO패당했다. 30cm가량 작은 카를로스 도요타가 마구 휘두른 주먹에 턱이 돌아가며 눈이 풀려 고목나무처럼 옆으로 쓰러지는 모습은 보는 사람을 안타깝게 했다. 쓰러진 상태에서도 뻣뻣한 몸으로 가드를 올리고 있는 모습은 애처롭기까지 했다. 경기 직전에 불거진 사기 혐의 피소 사건이 경기 당일의 컨디션을 망쳐버렸다고는 하지만, 사실 그는 누가 봐도 격투기에 투입될 수 있는 몸 상태가 아니었다. 10년 전, 씨름을 그만두고 입식타격기 K1에 진출해 당대 최고의 파이터인 세미 슐츠, 레미 본야스키, 바다 하리, 제롬 르 밴너 등과 맞섰던 과거의 최홍만은 없었다. 싱거운 KO패 이후 언론의 실망 어린 탄식과 네티즌들의 조롱이 줄을 잇고 있다.

씨름에서건 K1에서건, 최홍만은 기술적 완성도가 뛰어난 선수가 아니다. 그의 거대한 육체로는 해당 종목에서 요구하는 수준의 스피드와 경기력을 구현하기가 어렵다. 최홍만의 무기는 자신이 최홍만이라는 것뿐이었다. 씨름에서 천하장사가 될 때도, K1에서 강자들을 꺾을 때도, 최홍만은 압도적인 사이즈로 밀고 들어가거나 난쟁이들(?)의 주먹을 튕겨내며 승리해왔다. 최홍만 스스로는 아무리 진지하려 해도, 그의 경기는 언제나 거인에 맞서 사람이 펼치는 흥미로운 이벤트처럼 보인다.

격투기 단체들은 최홍만이라는 거대한 ‘볼거리’에 늘 매력을 느꼈다. 경기력의 문제는 차치하고서라도 최홍만은 늘 흥미로운 캐릭터였고 돈이 되는 상품이었다. 심지어 2008년에는 뇌종양 수술을 받은 지 3개월 만에 링에 올라 바다 하리라는 당대의 주먹을 버텨내야 했다. 수술 뒤 하향세를 거듭하고 잠시간의 외도가 있었으며 2012년 대선 당시에는 뜬금없이 박근혜 후보를 지지하며 새누리당에 입당해 조직특보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가고 지금 그는 다시 링에 올라섰다. 최홍만 스스로도 그 거대한 몸집으로 택할 수 있는 삶의 경우의 수가 그리 많지 않다고 생각한 것일까.

최홍만을 보며, 나는 어린 시절 학교에 출몰하던 그 거인 아저씨가 계속 떠올랐다. 키 큰 사람이 환영받는 시대이지만, 필요 이상으로 커진 몸은 누군가에게는 평생의 족쇄다. 냉정하게 말해서, 최홍만은 일반적인 격투기 선수의 능력을 갖추지 못했다. 이미 30대 중반인 나이와 수술 이후 왜소해진(?) 몸은 특유의 장점까지 상쇄하며 더 이상 링에서의 경쟁력을 회복하는 것을 어렵게 만든다. 최홍만의 경기는 늘 공이 울리기 직전 거인과 사람이 노려보고 있을 때가 제일 재미있을 뿐이다. 앞으로도 격투기 단체들은 이 장면을 쉽게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부터는 어쩌면 그저 좋은 볼거리가 되기 위해 링에 올라야만 하는 거인의 숙명. 그저 쉽게 그의 경기력을 조롱하기엔, 그가 택할 수 있는 제한적인 삶의 방법들에 마음이 아프다. 최홍만의 진짜 꿈은 어쩌면 그저 170cm의 평범한 인간으로 살고 싶은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김준 스포츠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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