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어디든 닿기만 하면 된다!

수영 기록 단축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아돌프 키에퍼의 ‘플립턴’
등록 2015-07-30 21:40 수정 2020-05-03 04:28
REUTERS

REUTERS

배영은 수영에서도 독특한 종목이다. 자유형·평영·접영과는 달리 물속에서 출발하고, 누워서 헤엄을 친다.

1896년 1회 아테네 올림픽에선 자유형 경기만 열렸지만, 1900년 2회 파리 대회 때는 배영 200m가 처음 채택되었다. 그리고 1904년 3회 세인트루이스 올림픽 때 배영 100야드 종목이 처음으로 들어갔고, 1908년 4회 런던 올림픽 때 배영 100m가 실시되기 시작했는데, 당시 금메달 기록은 독일의 비버스타인 선수가 세운 1분24초06이었다. 90여 년 전이기는 하지만 지금의 초등학교 저학년(1~3학년) 수준의 기록으로 세계 정상에 오른 것이다.

이후 배영은 미국의 독무대였다. 1912년 스톡홀름 올림픽에서 미국의 헤브너가 1분21초02로, 1920년 안트베르펜 올림픽에서 미국 케일로하가 1분15초02로 우승했고, 1924년 파리 올림픽에서는 미국 케일로하가 자신이 갖고 있던 세계신기록을 2초 단축한 1분13초02로 올림픽 2연패를 달성했다. 1928년 암스테르담 올림픽에서는 미국의 조지 코잭이 1분08초02로 금메달을 따는 등 미국이 금, 은(월터 라우퍼), 동(폴 와이어트)메달을 독식했다.

그러나 1932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서 미국 선수들을 4위권 이하로 밀어버리고 일본의 기요가와 선수가 1분08초06으로 금메달을 땄다. 은메달(아라이), 동메달(가우아스)까지 모두 일본이 휩쓸었다. 이로써 미국의 배영 독주 시대가 끝나가는 듯했지만,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아돌프 키에퍼 선수의 등장으로 미국이 정상을 되찾았다. 아돌프 키에퍼가 50m 턴 지점에서 ‘플립턴’이라는 독특한 방법으로 터치하며 1초 이상 기록을 단축하여 금메달을 따낸 것이다.

아돌프 키에퍼는 1918년 6월27일 미국 일리노이주 시카고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아돌프 키에퍼 시니어는 아들이 수영에 소질이 있다는 것을 간파하고 6살이 되자 어린이 수영학교에 집어넣었다. 아돌프 키에퍼는 자유형이나 접영, 평영 등에서는 다른 아이들보다 별로 뛰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배영에서는 2~3살 위의 형들보다도 빨랐다.

“아버지, 저는 배영이 제일 재미있어요.”

“배영으로 다른 애들 자유형만큼이나 빠르게 헤엄치더구나.”

아돌프 키에퍼 시니어는 아들의 배영 실력에 매우 만족해했다. 그러나 한계가 있었다.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기록 향상이 더뎠다. 고등학교 때까지도 아돌프 키에퍼는 평범한 수영선수에 지나지 않았다. 어느 날 아돌프 키에퍼 시니어가 아들에게 물었다.

“50m 지점에서 턴을 할 때 반드시 손으로 터치를 해야 하니?”

“아뇨, 턴을 할 때 아무런 규정이 없어요. 다만 손이건 발이건 반드시 벽에 터치를 해야만 해요.”

아들의 말을 들은 아돌프 키에퍼 시니어는 곰곰이 생각했다. 그리고 손보다는 발로 터치를 하면 더 강한 추진력을 받을 것이고, 문제는 어떻게 물속에서 회전하면서 발로 터치를 하느냐에 달렸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아돌프 키에퍼 시니어는 어느 날 다이빙 경기 중 선수들이 공중에서 플립 자세를 취한 뒤 떨어지는 것을 보고 결정적인 아이디어를 얻었다. “그래! 턴 지점에서 플립 자세로 도는 거야.”

아돌프 키에퍼 시니어가 아들에게 플립턴 아이디어를 알려준 뒤, 두 사람은 곧 훈련에 돌입했다. 그 결과 자신의 기록을 1초 이상 단축할 수 있었다. 배영 100m 1분10초대의 평범한 선수였던 아돌프 키에퍼는 반환점에 이르러서 물속에서 몸을 회전해 발로 반환점을 터치하여 탄력을 얻는 플립턴으로 1분09초 또는 1분08초까지 기록을 단축해 세계적 선수가 됐다. 지금은 배영뿐만 아니라 자유형에서도 모든 수영 선수들이 플립턴을 시도하고 있다.

기영노 스포츠평론가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