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를 만난 것은 대학 1학년 때였다. 학교 PC통신 채팅방에서 허접한 농담을 주고받다가 서로를 ‘발견’한 뒤 지금까지 20년지기 친구가 되었다. 영회광이었던 J는 학교보다 시내의 ‘2본동시’ 재개봉관에 더 자주 출몰했고, 제목도 들어보지 못한 영화들의 해적판 비디오를 달고 살았다. 그저 한때의 취미인 줄 알았건만, 4학년이 되어도 그는 취업 준비보다는 영화를 찾아보고 글을 쓰는 일에 집중했다(그는 학점도 좋았고 마음만 먹으면 대기업 취직도 가능했다). 고백하자면, 집안의 장남이라는 J의 개인적 실존에 대해 잘 알고 있던 나는 늘 그의 미래를 걱정했다. 그러나 20년이 지난 지금, 나같이 소심한 자에게 미래를 걱정당했던 J는 국내(아마 세계) 최고의 홍콩영화 저널리스트가 되었고, 국내 최고 영화주간지를 책임지고 있다. 그는 의 주성철 편집장이다.
탐사보도는 정치사회부 기자만 하는게 아니다. 한국 야구엔 탐사보도 전문기자 박동희가 있다. 그저 야구팬 출신으로, 와 등을 거쳐 지금 네이버에서 1인 미디어를 운영하고 있으며, 국내 야구와 메이저리그 중계를 하기도 한다. 야구계를 뒤흔든 모 구단의 폐회로텔레비전(CCTV) 사찰 사건, 공인구 논란 등은 모두 박동희의 부지런한 발에서 나온 특종들이다. 그의 글은 ‘길고 깊은’ 것으로 유명하다. 선수 출신이 아니고 1인 미디어이니, 개인적 이해관계가 없어 취재엔 성역이 없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취재 대상에게 최소한의 예의를 지킨다(CCTV 사찰 사건은 해당 팀을 배려해 시즌이 종료되기를 기다린 뒤 보도됐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특종이 아니라 야구와 선수에 대한 순정이기 때문이다.
김형준은 메이저리그 전문 기자다. 툭 찌르기만 해도 봇물처럼 쏟아져나오는 메이저리그 정보는 경이롭다. 그는 이른바 ‘세이버 매트릭스’를 이용해 야구를 수학과 통계의 눈으로 분석하는 각종 데이터를 국내에 정착시킨 사람이다. 그가 수입해서 세공해낸 데이터는 야구와 선수를 분석하는 기존의 개념과 틀을 뒤흔들었다. 더불어 단순한 정보와 데이터의 나열을 넘어 번뜩이는 재치와 미문들은 그의 기사를 ‘메이저리그 문학’의 경지로 끌어올린다(물론 그 이전에, 박찬호의 시대를 함께 넘어온 ‘그저 유학생’ 송재우라는 걸출한 선구자가 있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캐스터 배성재와 해설 박문성의 조합은 국내 축구 중계 영혼의 투톱이다. 광고와 회계학을 공부한 이들의 진짜 전공은 축구다. PC통신 시절 축구 게시판에서 쌓아올린 이들의 ‘덕력’은 21세기의 코드와 맞물리며 축구 중계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박지성 시대 이전부터 극성 해외 축구팬이자 축구 분석 사이트를 운영한 ‘축빠’ 서형욱은 영국 리버풀대학에서 축구산업학 석사 학위까지 취득하고, 20대에 최연소 공중파 축구 해설위원으로 데뷔했다. 서형욱의 시대에 이르러 “고국에 계신 동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로 시작되던 기존 ‘ARS 축구 중계’의 시대도 끝이 났다.
이들 축빠들이 전설 차범근과 절친하다는 사실은 유명하다. 선수 출신들로 구성된 한국 축구판의 정치에 이력이 났을 법한 차범근이, 이렇게 축구에 순정을 바쳐온 비선수 출신의 청년들에게 마음이 동하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물론 선수 출신 해설위원이 현장에서 쌓아올린 장인의 경험을 통해 상황을 분석해주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선수 출신들이 구사하는 언어와 해외 리그 정보에는 한계가 있다(이영표는 대단히 예외적이다). 비선수 출신이자 궁극의 팬으로서 여기까지 달려온 이 인물들은 선수 출신이 학습하지 못한 역사와 정보를 덕후의 심장으로 전달한다.
이들 모두의 공통점은 선수 출신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저, 사랑하는 것에 순정을 바친 ‘선수’들이다. 1970년대생으로서 90년대를 덕후로 살아내며 PC통신 시절의 열악한 정보망 속에서 쌓아올린 이들의 ‘덕력’은 지금 한국의 스포츠 담론을 선두에서 지휘하는 힘이 되었다. 이들이 방송 중에 내뱉는 샤우팅과 탄식은 직업 이전에 팬의 심장에서 묻어나오는 진심이다. 그러니까 최고의 자기계발이란, 스스로 좋아하는 것을 의심하지 않고 ‘끝까지’ 좋아하는 것이다. 결국 순정이 승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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