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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들 사랑, 많이 받았다 아이가”

등록 2008-04-18 00:00 수정 2020-05-03 04:25

<font color="darkblue"> 8년 만에 돌아온 부산에서 ‘퇴물’ 취급받다 팬들의 응원으로 그라운드에 선 롯데 마해영 선수</font>

▣ 김동환 기자 hwany@sportsworldi.com

4월1일. 만우절이자 부산 사직야구장이 2008 프로야구 정규시즌 첫 경기 롯데-SK전을 치르는 날이었다. 롯데 자이언츠의 성대한 홈 개막식에 이어진 선수 소개 시간. “롯데 내야수 마해영”이라는 소개말이 나오기 무섭게 3만 관중이 일제히 환호하기 시작했다. 등번호 49번을 단 선수가 앞으로 나오더니 모자를 벗고는 넙죽 큰절을 했다. 사직야구장은 금세 “마해영, 마해영”을 외치는 소리로 가득 찼고 함성은 끝없는 메아리로 소용돌이쳤다.

<font color="#216B9C">△ ‘돌아온 부산 갈매기, 아직 안 죽었다.’ 8년 만에 친정팀 롯데 자이언츠로 복귀한 마해영 선수가 4월4일 오후 서울 잠실야구장에서 열린 LG트윈스 전에서 2회초 선두타자로 나서 좌중월 동점 솔로홈런을 친 뒤 팀 동료의 축하를 받으며 홈으로 들어서고 있다.(사진/뉴시스 이동원)</font>

LG에서 방출된 뒤 고향팀마저 냉랭

‘마포’ 마해영의 거짓말 같은 부산 귀향은 그렇게 완성됐다. 부산으로 돌아오는 데 딱 8년 걸렸다. 그사이 갓 서른이던 나이는 마흔을 눈앞에 두게 됐고 연간 30개를 쉽게 넘겼던 홈런 수는 한 자릿수로 뚝 떨어져 있었다. 모두가 외면하는 가운데 마지막 남은 열정을 불사르려 고향 팀에 노크했고, 고향 팬들은 그를 조건 없이 환영했다.

떠날 때만 해도 다시는 쳐다도 보지 않으려고 했다. 입단 5년 만에 성적이 최고조에 이를 무렵인 2000년 프로야구 선수협의회(현 선수협회) 창립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자신을 삼성으로 트레이드해버린 팀이었다. 독기를 품은 마해영은 삼성에서 펄펄 날았다. 이승엽(현 요미우리 자이언츠)과 함께 최강의 ‘좌우 쌍포’를 이뤄 오른손 타자 최초로 3년 연속 30홈런을 기록했다. 반면 롯데는 마해영을 트레이드한 뒤 4년 연속 꼴찌를 하더니, 지난해까지 7년간 단 한 번도 포스트 시즌에 진출하지 못하는 수모를 당했다. 일부 팬들은 ‘마해영의 저주’라 불렀다.

그러나 미움도 잠시, 자신의 야구인생을 시작하게 해준 고향 팀의 추락이 안타깝기만 했다. 자신에게도 시련이 닥쳐오자, 롯데에 대한 애증은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애틋함으로 증폭됐다. 2004년 자유계약선수(FA)가 돼 기아로 옮긴 뒤 내리막길을 탄 마해영은 ‘먹튀’라는 오명을 쓰고 2005년 말 쓸쓸히 LG로 트레이드됐다. LG에서는 2006년 단 5홈런에 그친 뒤, 지난해 11경기에 출장해 2안타(1홈런)만을 남기고 두 번이나 방출 선고를 받는 ‘퇴물’이 되고 말았다.

롯데를 떠나서는 항상 ‘이방인’이었던 마해영은 10월 말 방출된 지 두 달이 넘도록 아무데도 불러주는 팀이 없자,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친정팀 롯데에 읍소했다. 그런데 기대와 달리 고향 팀마저 냉랭했다. 가망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면서, 정 원하면 팀 훈련에 참가해 새로 부임하는 제리 로이스터 감독 앞에서 2주 동안 테스트를 받아보라는 것이었다. 마해영이 롯데 입단을 희망하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처음 전화 통화를 했을 때, 마해영은 “명색이 프로에서 13년을 뛴 베테랑인데 테스트를 받으라는 것은 너무 심하지 않나”며 내심 불쾌해했다. 그러나 이내 “좋다. 나는 자존심이고 뭐고 다 버렸다. 다시 부산 팬들 앞에 설 수 있다면 어떤 수모도 감수하겠다. 연봉은 줘도 그만, 안 줘도 그만”이라며 모든 걸 내던졌다.

구단 게시판에 ‘마해영 영입 릴레이’

그의 진심은 부산 팬들에게 그대로 전해졌다. 시대를 풍미했던 스타 플레이어들을 다 떠나보내고 롯데 특유의 ‘근성’ 회복을 목놓아 부르며 7년째 가을의 추억만을 곱씹고 있던 부산 팬들. 왕년의 거포 마해영의 백의종군 소식을 전해듣고 들불처럼 일어나 롯데에 마해영 영입을 촉구했다. 수백 명이 구단 홈페이지 게시판에서 ‘마해영 영입 촉구 릴레이’를 펼쳤다.

사실 “마해영이 뭐 그렇게 대단하냐. 그래봤자, 대타 요원밖에 더 되냐”는 비아냥이 틀린 말은 아니었다. 대부분의 야구 전문가들은 마해영의 배팅 스피드가 현격히 떨어져 옛 실력을 다시 발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평가했다. 젊은 1루수 자원이 많은 롯데에서도 대타 이상으로 활용할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당장의 실력을 떠나 ‘마해영’이라는 이름 하나만으로도 부산 팬들은 열광했다. 거의 얼굴도 못 알아봤던 서울에서와 달리 부산에서는 어린아이부터 노인까지 대부분 마해영을 알아보고 응원을 보냈다. “열심히 해서 꼭 테스트에 통과해라”라며 택시기사·약사·시장 상인들이 돈을 받지 않았다.

마해영의 존재감을 인식한 로이스터 감독이 마해영의 영입을 결정짓자 팬들은 ‘마해영 환영 릴레이’로 반겼고, 첫 시범경기인 3월8일 사직구장에는 평일 낮에 5천여 명이 입장해 ‘마해영’을 연호했다. 마해영은 모자를 벗고 허리를 90도로 굽혀 고마움을 표했다.

삼성으로 트레이드된 뒤 광주로, 서울로 팀을 옮길 때도 대구에 남겨뒀던 가족을 입단과 동시에 부산으로 데려왔다. 초등학교 5학년과 4학년을 새 학교에서 맞은 아들 낙준(11)과 낙현(11)은 ‘마해영의 아들’이라는 이유만으로 각각 전교 부회장과 반 회장으로 선출됐다.

그리고 3월30일 정규시즌 개막 두 경기 만에 마해영에게 기회가 주어졌다. 전날 한화와의 개막전에서 지명타자로 나섰던 정보명이 손가락 부상을 당하는 바람에 마해영이 7번 지명타자로 선발 엔트리에 이름을 올렸다. 그리고 ‘승부사’ 마해영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첫 세 타석에서 안타를 못 친 마해영은 롯데가 8-7로 근소하게 앞서던 8회 초 14살 아래 안영명의 싱싱한 공을 받아쳐 1점 홈런을 터뜨렸다. 아직 마해영이 죽지 않았음을 만방에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로이스터 감독은 그라운드를 돌아 당당히 개선하는 마해영을 양팔로 와락 끌어안아줬고, 이 광경을 지켜본 많은 롯데 팬들은 감동의 눈시울을 적셨다.

전 소속팀 상대로 쏘아올린 홈런

마해영은 4월1일 부산 홈 개막전에서도 지명타자로 선발 출전해 고향 팬들의 열렬한 응원을 한몸에 받았다. 비록 3타수 무안타에 그친 뒤 정보명의 복귀로 두 경기 연속 벤치를 지켰으나, 4월4일 자신을 내팽겨쳤던 전 소속팀 LG를 만나 또 한 번 보란 듯이 ‘무력 시위’를 했다. 롯데가 5년 동안 이겨보지 못한 에이스 박명환을 상대로 0-1로 뒤지던 2회 초 동점 홈런을 쏘아올린 것이다.

다음날 경기에서는 2타수 무안타에 그쳐, 마해영은 9일까지 열린 10경기 중 4경기에만 출장해 12타수 2안타(타율 0.167) 2타점을 기록하는 데 그쳤다. 그러나 2안타가 모두 홈런일 만큼 일발장타력 하나는 아직 쓸 만함을 입증했다. 마해영의 귀환과 함께 롯데는 개막 4연승 등 시즌 초반 돌풍을 일으키며 부산발 야구 열풍을 주도하고 있다. 승리와 영웅에 목말라 있던 롯데 팬들은 부산뿐만 아니라 대전·서울·대구에서도 구름같이 몰려들어 ‘마해영’과 ‘롯데’를 연호했다.

“고향 팬들이 나를 영입해달라고 워낙 구단을 다그쳐 다시 롯데에 입단할 수 있었다. 팬들 덕분에 다시 그라운드에 서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더 행복한 선수다. 행여 내가 팬들의 기대에 못 미쳐 그들이 나를 다시 비난할지라도 나는 마지막까지 조금이라도 더 보답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다.”

마해영이 롯데에 입단하면서 계약한 올해 연봉은 5천만원이다. 지난해까지 받던 4억원의 8분의 1밖에 안 된다. 처음에 마해영이 롯데 복귀 의사를 밝히며 말했듯 그가 계속 야구를 하려는 것은 돈 때문도, 자존심 때문도 아니다. 오로지 팬 앞에 다시 서고 싶어서다. 마해영은 앞으로도 주전보다는 대타나 백업 지명타자로 경기에 나서게 될 것이다. 예전처럼 홈런을 펑펑 치지도 못 할 것이다. 그러나 팬들이 있는 한 그는 한 번이라도 더 그라운드에 나가 조금이라도 더 정확히 공을 맞히려고 방망이를 돌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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