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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라 여겼는데 스파이라뇨

등록 2008-04-11 00:00 수정 2020-05-03 04:25

‘남북 축구의 이중 스파이’라 칭한 기사에 가슴 아픈 북한 축구대표 안영학 선수

▣ 송호진 한겨레 스포츠부 기자dmzsong@hani.co.kr

몹시 속상한 듯 보였다. 지난 3월24일, 남북전을 이틀 앞두고 중국 상하이에 도착한 북한 축구대표 안영학(30·수원 삼성)은 공항에 나온 한국 기자들에게 “혹시 스파이 기사 쓰신 분 오셨어요?”라고 물었다. 정중하고 차분한 어조였으니, 해당 기자(당시 현장에 없었다)를 찾아 따지려는 건 아닌 듯했다. 대신 뭔가를 설명하고 싶은 눈치였다.

출생은 일본, 국적은 ‘조선’, 프로팀은 한국

국내 한 언론은 ‘안영학이 북한에는 한국 축구 정보를, 한국에는 북한 축구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며 그를 ‘이중 스파이’라 칭했다. 같은 소속팀 조원희가 한국 축구대표팀 훈련 인터뷰에서 “영학 형이 북한 대표 정대세(24·가와사키 프론탈레)가 빠르고 정신력이 뛰어난 공격수이면서 수비도 적극적으로 가담한다고 얘기해줬다”고 한 말을 근거로 삼았다. 안영학이 K리그를 꿰뚫고 있으니 북한에도 한국 축구 정보를 알려줄 것이란 설명도 덧붙였다. 실제로 안영학은 예전 인터뷰에서 “북한 선수들이 한국 축구를 궁금해한다. ‘한국에는 몇 팀이 있느냐? (내가 뛰었던) 일본 프로축구와 어떻게 다르냐’고 묻는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안영학이 한국 선수들에게 얘기한 내용은 이미 국내 언론에서 다뤄졌거나 대표팀 코칭 스태프가 파악하고 있는 수준이다. 스파이라 이름 붙인 언론도 무슨 악의를 품고 그러지는 않았겠으나, 안영학은 ‘스파이’란 표현을 민감하게 받아들였다. 혹시 북한 대표팀에서 자신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이었다. 그는 “난 그렇지 않은데, 신문을 보고 마음이 너무 아팠다”고 했다.

이번 일은 일본에서 태어나 북한 축구대표가 됐고, 2006년부터 한국 프로팀에서 생활하며 남북을 넘나드는 이 청년을 우리가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에 대한 물음을 다시 한 번 던지고 있다.

재일동포 3세인 안영학의 국적은 ‘조선’이다. 재일동포인 그가 일본에서 휴대해야 하는 외국인등록증의 국적란에도 ‘조선’이라 찍혀 있다. 여기서 조선은 북한을 뜻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아니다. 안영학은 “(1948년) 한국이 정부를 세운 뒤 일본에 있던 조선 사람들 중 한국 국적으로 바꾼 분들도 있지만, 조선 땅이 나눠진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는 분들은 그냥 조선 국적을 갖고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그랬듯 국적을 조선으로 유지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남과 북, 일본을 오갈 때 지녀야 하는 신분증과 서류도 여러 개다. 지난달 북한 대표팀에 합류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 정대세와 같이 중국으로 향했는데, 일본에서 입출국할 때 재일동포들의 여권으로 불리는 ‘재입국허가서’에 도장을 받았다. 일본에서 잠시 머물렀던 그는 지갑에 외국인등록증도 담아갔을 것이다. 남북전이 끝나고 한국 대표팀과 같은 비행기로 들어온 그는 이번엔 한국에서 내준 임시 여권을 내밀었다. 북한 선수단과 움직일 때 사용하는 북한 여권이 있지만, 그 여권을 한국에서 사용할 순 없다.

‘우리학교’에서 축구하며 정체성 찾아

북한 대표팀에서 뛰고 한국 대표팀과 함께 입국한 그는 “국적이 조선이니 조선(북한) 대표팀에 뽑혀 뛰고 싶었던 것이지만, 나에게 남북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모두 우리 민족”이라고 얘기했다. 그가 평소 ‘우리’라는 말을 강조하고 애착을 보이는 점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그는 도쿄에서 ‘우리학교’라고 불리는 조선학교를 12년 동안 다녔다. 총련계가 지원하는 ‘우리학교’는 도쿄, 오사카 등 일본 9개 지역에서 운영되고 있다. 이곳은 단순히 교과목을 배우는 곳이 아니라, 일본에서 외국인으로 분류돼 어정쩡하게 살아가는 ‘나’, 때론 외톨이가 되기도 했던 ‘나’에게도 ‘우리’라는 울타리가 있다는 것을 재일동포 아이들이 몸으로, 마음으로 익히는 곳이다. 나를 감싸주는 공동체를 느끼며 내가 누구인지 확인하는 ‘우리학교’는 일본에 떠 있는 ‘민족의 섬’이라 부르기도 한다. 그래서 조선 국적뿐 아니라, 한국 또는 일본 국적을 지닌 재일동포 아이들도 이곳을 다닌다.

‘우리학교’ 출신인 축구평론가 신무광(37)씨는 “내가 다니던 시절엔 한국이 굶주린다는 교육을 받았는데, 그때보다는 많이 덜해졌지만 지금도 북한식 교육을 받기는 한다. 그러나 아이들은 학교에서 북한, 이념, 그런 것을 초월해서 이곳에 모인 우리가 똑같은 민족이라는 것, 똑같은 정체성을 갖고 있다는 것을 공유하며 힘을 얻는다”고 했다. 신씨는 “조선고급학교(고등학교 과정)까지 매일 우리말을 배우고, 우리말을 쓰지 않으면 선생님에게 혼나곤 했다. ‘남과 북은 하나다’라는 교육도 늘 받는다. 일본에서 재일동포 젊은이가 우리말을 할 수 있는 것은 대부분의 경우 ‘우리학교’에서 배웠기 때문”이라고 했다. 신씨는 “정대세가 상하이에서 한국 기자들과 만나 (국적을 물으니) ‘나를 키운 건 조선’이라고 했는데, 그 말은 ‘나를 키운 건 조선학교, 즉, 우리학교’라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특히 신씨는 조선초급학교 4학년부터 의무적으로 가입하는 ‘축구부’에 큰 의미를 뒀다. “재일동포는 늘 내가 일본 사람 같기도 하고 조선 사람 같기도 하고, 그럼 난 어느 나라 사람인가, 하며 정체성이 흔들린다. 그러나 ‘우리학교’에서 생활하고 또 축구 경기를 하다 보면 같은 말을 하는 아이들과 공을 차고 동포들의 응원도 받게 되는데, 그러면 ‘우리는 같은 조선 사람이구나’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럴 때 축구는 내 정체성을 확인시켜주는 마당 같은 것이 된다.”

안영학이 일본에서 축구선수로 뛸 때부터 가깝게 지내온 신씨는 “안영학이 북한 축구대표로 뛰고 있지만, 실제로는 자기를 키워주고 응원해주는 ‘우리’라는 동포 사회를 위해 뛴다고 보면 맞을 것”이라고 얘기했다.

“제2, 제3의 안영학을 위해 견뎌냈다”

국내엔 안영학 말고도 정대세와 친구인 조선 국적의 고상덕(25)이 내셔널리그 이천 험멜에서 뛰고 있다. 정대세도 제안이 온다면 FC서울 같은 K리그팀에서 뛸 의향이 있다고 했다. 리한재(산프레체 히로시마)와 양용기(센다이)는 일본 프로축구에서 뛰며 북한 대표를 하는 총련계 선수다. 안영학이 나온 도쿄조선고급학교에 재학 중인 안병준도 지난해 17살 이하 북한 청소년대표팀에서 활약했다. 어쩌면 남북을 오가는 제2, 제3의 안영학이 더 나올지 모른다. 안영학은 “축구를 통해 난 국가적 경계를 무너뜨릴 수 있었다. 한국에 처음 왔을 때 사람들이 (조선 국적이라는) 축구 외적인 부분 때문에 호기심이 많았지만, 이 상황을 이겨내면 나 다음에 (한국에) 오는 후배들이 좀더 쉽게 뛸 수 있겠다 싶어 견뎌냈다”고 했다.

안영학은 한국 팬들이 K리그에서 뛰는 조선 국적의 북한 대표인 자신을 ‘스파이’가 아닌 ‘우리’로 받아들여줄 수 있는지 묻고 있다. ‘조선학교’에서 ‘우리’를 갈망하고 찾았던 그는, 그래서 좀더 넓은 ‘우리’에 자신을 포함시키고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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