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도나의 ‘유전적 복제물’인 듯, 골 장면 재현한 FC 바르셀로나의 리오넬 메시
▣ 한준희 한국방송 축구해설위원· 편집장
피터 비어슬리, 피터 리드, 테리 부처, 테리 펜위크, 피터 쉴튼, 개리 스티븐스. 그리고 하비에르 파레데스, 나초, 알렉시스, 다비드 벨렌게르, 루이스 가르시아, 파블로 레돈도. 확신하건대 축구의 역사가 지속되는 한 영원토록 반복 재생될 영상의 등장인물들이다. 앞의 여섯 사람은 1986년 6월22일, 아르헨티나와 잉글랜드의 멕시코 월드컵 8강전에서 디에고 마라도나의 골을 막지 못한 잉글랜드 선수들이며, 뒤의 여섯 사람은 2007년 4월18일 스페인 국왕컵 준결승 1차전에서 FC 바르셀로나의 리오넬 메시가 따돌린 헤타페의 선수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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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상은 둘이면서도 하나요, 하나이면서도 둘이다. 메시의 골이 터지고 난 뒤 실제로 바르셀로나의 한 방송은 화면을 반으로 쪼개놓고 저 위대한 마라도나의 골 장면과 메시의 골 장면을 동시에 재생했다. 결과는 놀라웠다. 두 장면은 마치 ‘유전적 복제물’처럼 보였다. 자기 편 진영 오른쪽 측면(마라도나는 약간 더 중앙쪽)에서 상대 선수 두 명을 요리하는 것에서 시작해, 앞으로 나온 골키퍼를 제친 뒤 골을 막으려는 마지막 수비까지 무력화시키는 과정이 거의 일치했다. 골망을 흔들기까지 시간, 심지어 골 세리머니를 시작하는 위치도 거의 같았다. ‘20세기 최고의 골’이라 불러도 좋을 법한 마라도나의 골 장면이 더 이상 유사할 수 없을 정도로 복제된 순간이었다. 그것도 마라도나로부터 “나의 후계자” 소리를 듣는 젊은이에 의해서.
마라도나의 저 위대한 골이 복제된 지 2개월도 채 지나지 않은 2007년 6월9일 스페인 프리메라리가 에스파뇰전. 그 복제의 주인공은 위대한 골과 더불어 팬들의 뇌리에 각인된 마라도나의 ‘최고의 논란의 골’- ‘최고로 위대한 골’을 터뜨리기 몇 분 전에 만들어낸 골- 을 다시 한 번 복제했다. 이름하여 ‘신의 손’의 골. 상대 선수에 의해 튀어오른 볼을 골키퍼와의 1 대 1 상황에서 절묘하게(?) 왼손을 뻗어 처리한 마라도나와 메시의 플레이는 이번에도 ‘복제’라는 어휘를 쓰기에 무리가 없었다.
메시가 축구사를 통틀어 가장 널리, 가장 오래도록, 가장 뚜렷하게 기억될 법한 마라도나의 두 가지 골 장면을 53일 만에 모두 제작해낸 것이 단지 우연이었을까? 필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축구선수의 꿈을 키우는 아르헨티나의 모든 소년들은 누구나 ‘제2의 마라도나’를 꿈꾼다. 그들은 부모로부터 마라도나의 전설을 듣고 마라도나의 플레이 영상을 보며 마라도나를 가슴에 품고 자란다. 그들의 무의식 속에는 언제나 마라도나가 있다. 그들의 최종 목표 또한 마라도나 같은 선수가 되는 것이다. 메시의 무의식에는 마라도나가 했던 모든 플레이를 복제하고픈 열망이 잠재해 있었을 법하다는 얘기다. 아르헨티나에는 무수히 많은 ‘제2의 마라도나’가 존재했다. 어쩌면 리오넬 메시는 ‘몇백번째’ 제2의 마라도나일지도 모른다. 비범한 축구 재능이 엿보이는 소년에게 아르헨티나 사람들은 어김없이 ‘제2의 마라도나’라는 별칭을 붙여주며 소년의 성장을 열망하곤 했다. 언론을 통해 알려진 ‘제2의 마라도나들’만 해도 10명 이상이며, 그중에는 우리 축구팬들에게 알려진 인물인 오르테가, 아이마르, 리켈메, 사비올라, 달레산드로, 테베스, 그리고 메시의 후배인 아구에로 등이 있다. 하지만 제2의 마라도나 중에서 기대에 못 미친 이들도 적지 않다. 한 예로 ‘제2의 마라도나의 원조’ 격인 디에고 라토레는 초라하기 그지없는 빅리그 실적을 남기고 쓸쓸히 사라졌다. 잉글랜드로 건너왔던 카를로스 마리넬리 역시 기대치를 크게 밑도는 성장세를 보이다가 지금은 미국 메이저리그에서 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에도 아르헨티나에선 계속해서 ‘제2의 마라도나들’이 출현하고 있을 것이나, 그 명칭은 모두에게 성공을 보장하는 것이 결코 아니며 모두에게 합당한 명칭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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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우리는 ‘제2의 마라도나 전쟁’의 궁극의 승자가 될 만한 후보를 마침내 만나게 되었다. 물론 이는 메시가 단지 골 두 개를 절묘하게 복제했기 때문만이 아니다. 광고(CF)를 통해 강조된 것처럼 키가 작아서도 아니다. 근본적인 이유는 메시가 그 어떤 제2의 마라도나들, 아니 지구상의 다른 모든 축구 선수들보다 ‘마라도나의 유전자’를 더 많이 물려받은 것으로 판단되는 까닭이다. 한마디로 메시는 마라도나의 ‘유전적 후손’처럼 보이며, 두 개의 복제된 골 장면은 어쩌면 그 유전자의 외형적 표출과 다름없다. 왼발, 드리블, 시야, 지능 등 총체적인 면에서 메시는 마라도나를 정말로 많이 닮았다. 특별히 마라도나와 메시의 중요한 유사성 가운데 하나는 둘이 모두 훌륭한 ‘팀 플레이어’라는 사실이다. 마라도나는 혼자의 힘으로 마법을 부릴 수 있는 사나이였지만 ‘나홀로 플레이’를 탐닉하는 유형의 선수가 결코 아니었다. 마라도나는 자신보다 팀을 위해 플레이했고 그의 이러한 측면이 지도자와 동료들, 모든 아르헨티나 국민들로부터 진정한 존경심을 이끌어냈다. 그런데 지금의 메시 또한 이미 팀을 위한 플레이에 눈떠 있는 상태이며, 이것은 마찬가지로 바르셀로나의 동료와 서포터들로부터 크게 사랑받는 이유다.
마라도나를 향해 나아가기 위한 또 다른 중요한 조건에도 메시는 매우 근접해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경기 전체에 미치는 영향력과 지배력의 문제다. 경기 전체에 관여하며 그라운드의 지배자 역할을 탁월하게 해냈던 마라도나에 관해서는 별도의 설명이 필요치 않다. 메시의 경우는 어떨까? 메시 또한 바르셀로나에서 그러한 위치에 도달하고 있는 인상이다. 호나우지뉴의 천재성은 결코 사그라지지 않았다. 앙리의 스타일은 리그를 막론하고 빛이 난다. 데코와 이니에스타, 샤비는 틀림없이 가장 재주 많은 미드필드 트리오다. 하지만 그럼에도 막강한 바르셀로나는 어느덧 메시의 존재 유무와 활약에 따라 경기력의 차이를 드러낸다. 지난 시즌 바르셀로나는 메시의 골과 더불어 헤타페를 대파했지만 정작 메시가 없었던 2차전의 참패는 그들을 국왕컵에서 탈락시켜버렸다. 올 시즌 바르셀로나가 승리를 챙기지 못했던 두 경기는 메시를 일찍 교체했거나 메시가 아예 없었던 경기다. 게다가 메시는 호나우지뉴, 앙리와는 달리 놀랍게도 올 시즌 거의 모든 경기에서 기복 없는 수준을 과시했다. 예상 가능하게도, 아르헨티나 대표팀에서 메시의 영향력 또한 증대되는 경향이 역력하다. 아르헨티나 전체를 이끄는 지배의 축은 여전히 천재적 플레이메이커 리켈메 쪽에 있지만, 메시의 플레이 하나하나가 승부에 영향을 미치는 비율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 메시가 아르헨티나의 ‘전권’을 부여받게 될 날도 그리 멀게 느껴지지 않는다.
마라도나의 ‘위대한 투쟁’까지 따라야
물론 이 모든 사실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마라도나’가 되기 위한 최후 조건의 성취 여부는 미지수로 남는다. 진정한 마라도나가 되기 위해 메시는 지금의 수준을 더 오랫동안 유지할 필요가 있으며, 무엇보다 마라도나가 실행에 옮겼던 ‘위대한 투쟁’의 발자취를 따라야만 한다. 그 투쟁이란 수많은 강적들과의 악전고투 속에서 조국 아르헨티나, 소속팀 나폴리를 정상으로 이끌었던 영웅적 액션이다. 메시는 ‘유전적’으로 진정한 마라도나가 될 자격을 지닌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진정한 마라도나의 반열에 완벽하게 오르기 위해서는 ‘후천적’ 투쟁이 추가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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