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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의 뜨거운 3년을 위하여

등록 2004-07-01 00:00 수정 2020-05-03 04:23

NBA 신인드래프트 2라운드에 지명 하승진… 지나친 기대 하지 말고 비난보다는 격려를

손대범/ NBA 칼럼니스트

지난 2004년 6월25일 오전(한국 시각), 국내 농구팬들의 눈과 귀는 미국프로농구(NBA) 리그 공식 웹사이트 NBA닷컴을 통해 제공되는 2004 신인드래프트 생중계에 쏠려 있었다. 국내 최장신 선수 하승진(19·223cm·연세대)의 역사적인 NBA 진출 순간을 함께하기 위해서였다. 마침내 러스 그러닉 NBA 부총재가 하승진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팬들은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었다. 하승진은 전체 47위로 NBA 명문구단 포틀랜드 트레일 블레이저스에 지명됐다.

명문팀 포틀랜드에 입단

하승진은 2001년부터 각종 언론을 통해 유망주로 부각됐다. 농구 국가대표 출신 하동기씨의 둘째아들인 그는 수원의 삼일상고 재학 시절부터 NBA 진출설이 나돌았다. 210cm가 넘는 신장 덕분에 한국 농구계에서 유일하게 빅 리그 도전이 가능할 것이라는 기대를 받아왔다. 그리고 2003년, 하승진은 마이클 조든을 키워낸 거대 스포츠 에이전시 S.F.X에서 NBA 진출이 가능할 것이라는 합격점을 받고 계약을 체결한 뒤 곧바로 로스앤젤레스(LA)로 떠나 6월25일의 ‘영광’을 준비했다.

문제는 언제, 어느 팀에 지명되느냐였다. NBA 신인드래프트는 모두 60개팀이 참가해 60명을 지명할 수 있으며 1, 2라운드로 구성된다. 1라운드에 지명된 선수들은 최소 연봉 60만달러에 3년(구단 옵션 포함 4년) 계약이 보장되지만, 2라운드 선수들은 계약 기간이 정해지지 않고 연봉도 40만달러가 채 되지 않는다. 대부분의 선수들은 시즌 중반에 사라진다. 지난 2003년 2라운드에 지명된 29명 중 시즌 막판까지 평균 5분 이상 뛴 선수는 13명에 불과했다. 이런 이유로 에이전트 존 킴을 비롯해 많은 농구팬들은 하승진의 1라운드 지명을 희망했다. 그러나 팬들의 바람은 끝내 이뤄지지 않았다. 많은 구단들은 국제 무대 혹은 미국 무대에서 더 검증된 선수를 필요로 했고, 국제 경험이 겨우 1년 남짓한 하승진의 순위는 2라운드까지 밀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하승진이 NBA에 이름을 올린 것만으로도 이제 100년을 조금 넘긴 한국 농구 역사에 큰 획을 그었다고 볼 수 있다. 아시아 선수가 NBA에 드래프트를 통해 지명된 것도 겨우 세 번째 있는 일이다. 중국에서는 왕즈즈가 2000년 36위(2라운드·댈러스)로, 야오밍이 2002년 전체 1위(휴스턴)로 지명됐고, 멩크 바테르(중국)나 첸신안(대만) 등 다른 선수들은 시즌 전이나 중반에 자유계약선수 신분으로 입단했다. 하지만 결과는 야오밍을 제외하고는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다.

하승진이 입단하게 된 포틀랜드 트레일 블레이저스는 오리건주를 연고지로 하고 있다. 지난 1970년 창단한 이래 34년 동안 플레이오프를 밟지 않은 적이 겨우 일곱번에 불과할 정도로 좋은 성적을 거둬왔다. 보스턴 셀틱스나 LA 레이커스, 뉴욕 닉스와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는 아니지만, 꾸준히 좋은 성적을 낸 명문팀이다. NBA에서도 손꼽히는 최신식 홈구장과 NBA 역대 최다 매진으로 팀에 각별한 애정을 보여주는 열성팬들을 보유한 구단이다.

강한 의욕 보이면 40경기 이상 출전 가능

구단주는 세계 굴지의 대기업 마이크로소프트사 최고경영자(CEO) 빌 게이츠의 사업 파트너인 폴 앨런이다. 세계 재벌 순위 5위에 올라 있으며 농구 마니아로 잘 알려진 폴 앨런은 농구단에 투자를 아끼지 않고 있다. 최신식 시설의 선수단 전용 비행기는 다른 팀들의 부러움을 사고 있다. 지난 2003∼2004 시즌에는 41승41패로 5할 승률을 지키는 데는 성공했지만, 플레이오프 진출에는 실패했다. 팀워크가 불안정한 탓도 있지만, 센터진의 열세가 가장 큰 원인이었다. 이 때문에 포틀랜드는 2004년 신인드래프트를 앞두고 하승진을 비롯한 센터들을 유심히 지켜봤는데, 이때부터 국내 농구계에서는 “하승진이 1라운드 후반쯤 포틀랜드에 뽑힐 가능성이 있다”는 분석이 나돌았다.

현재 팀에는 하승진보다 더 많은 출전 시간을 얻을 것이 확실시되는 센터가 3명(티오 라틀리프, 데일 데이비스, 블라디미르 스테파니아)이나 있다. 이 중 라틀리프는 블록슛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수비수라는 점에서, 데이비스는 신장은 하승진보다 10cm나 작지만 농구의 노하우를 잘 알고 있다는 점에서 하승진보다 앞선다. 그러나 라틀리프는 크고 작은 부상에 시달리고, 데이비스는 35살로 은퇴가 가까워졌다는 점에서 하승진의 출장 기회는 예상외로 많아질 수 있다. 하승진이 배우려는 의욕을 강하게 보인다면 최소 40경기 이상 코트에 나설 기회를 얻을 것이다.

현지 스카우트들은 “NBA 감독들 중에 올해 지명된 선수들이 당장 활약을 펼칠 것이라 기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딱 3년이다. 신인들에게는 3년의 시간이 주어지고, 기대에 부응한다면 살아남을 것이고 그렇지 못한다면 집에 돌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이는 하승진이 새겨들어야 할 말이다. 조급함이나 실망감을 버리고 차분하게 미국 농구를 배우겠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국내 언론이나 팬들도 마찬가지다. 처음부터 지나치게 큰 기대를 하는 것은 하승진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팬들은 박찬호와 김병현, 최희섭 등 미국 메이저리그에서 활약 중인 선수들이 어떻게 성장했는지 기억해야 한다.

한국 농구 ‘찬밥 신세’ 면할까

하승진의 NBA 진출은 한국 농구를 완전히 바꿔놓을 수 있다. 기량이 향상된 그가 한국 농구대표팀의 새로운 주전 센터로 국제 무대에서 활약하는 모습은 상상만 해도 즐거운 일이다. 그간 한국 농구는 신장의 열세로 국제 무대에서 ‘찬밥 신세’가 되기 일쑤였다. 중국은 왕즈즈, 야오밍, 멩크 바테르 등 ‘걸어다니는 만리장성’으로 지난 2000년 시드니올림픽 이후 꾸준히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중국은 이 3인방을 NBA에 진출시킨 뒤 꾸준히 미국 및 유럽 지역과 교류하며 자체적으로 NBA급 유망주를 양성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NBA의 여러 스카우트들은 제2의 야오밍을 찾기 위해 중국 땅을 속속 밟고 있고, 올 10월에는 야오밍의 소속팀인 휴스턴 로케츠와 새크라멘토 킹스의 NBA 개막전이 베이징과 상하이에서 열린다.

하승진의 NBA 진출은 그동안 침체를 거듭해온 한국 농구계를 비약적으로 발전시키는 계기가 될 수 있다. 하승진이 농구의 본고장에서 성공한다면 한국 농구 시장은 세계 스포츠계의 주목을 받을 것이다. 하승진의 성공과 한국 농구의 발전을 위해 국내 언론과 농구팬들은 비관적인 시선보다는 격려의 박수를, 비난보다는 칭찬을 보내줘야 할 것이다. 유망주는 결코 혼자서 저절로 성장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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