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일곱 살 소년이 죽었다. 가족은 코로나19가 사인이라는 걸 장례를 치르고 난 뒤에야 알았다. 소년은 제때 치료받았다면 숨지지 않을 수 있었다. 소년의 이름은 윌리엄 황. 미국 사회에서 주류가 아닌 한국계 미국인이었다. 소년의 친구들이 페이스북에 그를 기리는 글을 썼다. 사진 속에서 소년은 친구들 한가운데 서서 환하게 웃고 있었다.
중국서 코로나 발병 직전 무력화된 ‘오바마케어’
소년이 살았던 미국 캘리포니아주 랭커스터의 렉스 패리스 시장은 소년의 죽음이 논란이 되자, 3월25일 유튜브에 나와 설명했다. “소년은 수요일(3월18일)에 응급치료 시설에 갔으나 보험이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소년을 치료하지 않고 다른 병원으로 보냈다.” 소년은 병원을 옮기던 중 심정지가 일어났고, 이송 직후 사망했다. 패리스 시장은 “(소년의 치료가) 너무 늦었다”면서 “그는 숨지기 전 금요일(3월13일)에도 친구들과 어울리는 등 아무런 질환이 없다가 수요일에 숨졌다”고 했다. 소년의 죽음은 매스컴에 잠시 등장했다 사라졌다. 제대로 된 보험이 없어 살 수도 있었던 10대가 숨진 사실보다, 당시 소년이 코로나19로 인한 최연소 사망자였다는 게 더 이목을 끌었다.
미국은 한국과 달리 의료보험 시장이 민영화돼 있다. 각자의 재력 상태와 어떤 직장을 다니느냐에 따라 의료보험의 질이 결정된다. 보험료가 비싼 의료보험에 가입하면 질 좋은 의료서비스를 손쉽게 접할 수 있다. 반대의 경우에는 제대로 된 의료서비스를 받기 힘들고 받더라도 환자가 부담해야 할 비용이 커진다. 심지어 이 소년의 가정처럼 값싼 의료보험조차 가입하지 못한 사람이 미국 전체 인구의 10분의 1인 3천만 명을 넘는다.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은 보험이 없어 위험에 처할 수 있는 이들을 위해 ‘오바마케어’로 불린 의료개혁을 단행했다. 오바마케어는 정부 지원으로 전 국민이 의무적으로 의료보험에 가입하는 시스템이다. 그러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당선 이후 오바마케어를 무력화했다. 코로나19가 중국에서 처음 발병하기 직전인 지난해 말, 미국 항소법원은 오바마케어의 핵심인 전 국민 의무가입 조항에 대해 위헌 결정을 내렸다. 트럼프 행정부가 줄기차게 밀어붙인 결과였다.
만약 오바마케어가 예정대로 시행됐다면 이 소년은 살 수 있었을까. 소년의 죽음을 접하고 슬프면서 두려웠다. 미국 연수 8개월째인 나도 미국 사회에서는 양질의 의료보험이 없는 마이너리티(소수자)다. 혹여나 우리 가족 중 누구라도 코로나19에 걸리면 제대로 치료받을 수 있을지 두렵다.
언론은 “실제 확진자는 10배 될 것”
캘리포니아주에 발효된 자택대기명령이 3주째 접어들었다. 우리 가족 역시 집 안에 감금되다시피 한 상태다. 두 딸을 포함한 우리 네 식구의 일과는 단순해졌다. 느지막이 일어나 아침 겸 점심을 먹고, 아이들은 학교에 가는 대신 온라인 수업을 한다. 간식을 먹고 집 주변을 산책한다. 어두워지면 잠을 잔다.
동네 피트니스센터는 물론 집 앞 공원까지 문을 닫았다. 내가 방문학자로 몸담고 있던 대학 캠퍼스도 폐쇄됐다. 한국에서 유일하게 호황을 누린다는 골프장도 이곳에서는 폐쇄 대상 업장이다. 코스트코 등 생필품 매장 외에 갈 곳이 모두 없어졌다.
아내는 드러난 확진자보다 실제 확진자가 10배는 될 것이라는 언론 보도를 보고 식료품도 온라인으로 주문하고 있다. 새벽과 당일 배송이 당연시되는 한국과 달리, 이곳 온라인 주문은 전쟁이다. 아마존 신선식품 배송에 성공하려면 자정 정각에 누가 빨리 클릭하느냐 경쟁해야 하고, 코스트코 온라인 주문은 2주 뒤에야 배송된다.
가끔 산책하러 나가 마주 오는 일행과 마주칠라치면 상대쪽에서 먼저 우리 가족을 피해 멀찍이서 길을 건넌다. 6피트(약 2m)라는 사회적 거리 두기 기준보다 10배 이상 먼 거리다. 동양인에 대한 최대한의 거리 두기가 아닐까란 생각에 기분이 좋지는 않다. 뉴욕 등 일부 대도시에선 한국 사람 등 동양인에 대한 테러가 빈번하다니 기분 탓만은 아닐 것이다.
3월 초, 미국에 놀러 왔던 친한 지인 부부가 한국으로 돌아갔다. 우리 부부는 걱정 어린 시선을 보냈고, 그들은 청정 지역에서 재밌게 지내다 오라고 덕담을 건넸다. 당시 한국은 ‘신천지 사태’가 터지면서 급속도로 코로나19가 번지고 있었다. 반면 미국에서 확진자 수는 100명에도 미치지 않은 상태였다. 밤이면 동네 쇼핑몰에선 아이스크림을 사 먹고 산책하는 가족 친구들 무리로 가득했고, 아이들은 마스크를 쓰지 않고 즐겁게 학교생활을 했다. 그 시점에선 공포가 지배하는 한국 사회와 평온한 일상을 누리는 미국은 천지 차이였다. 그러나 두 나라 상황이 정반대로 바뀌기까지 채 한 달이 걸리지 않았다. 4월6일 기준, 미국의 확진자 수는 30만 명을 넘었다. 부동의 세계 1위다.
내가 있는 샌디에이고는 매일 코로나19 현황을 업데이트해 누리집에 공개한다. 약 300만 명이 사는 샌디에이고의 확진자 수는 1천 명을 돌파했다. 이 지역에 첫 확진자가 밝혀진 건 3월7일이었다. 시는 매일 성별과 연령대별로 확진자 수를 공개한다. 병원 입원환자와 집중치료실에 있는 환자 등 확진자의 치료 상태도 밝힌다. 그러나 감염 예방에 필요한 상세 지역별 확진자 분포와 확진자 동선은 공개하지 않는다.
서둘러 미국을 떠나려는 한인들
최근 이 지역 한인 온라인 단체대화방에 한 지인이 사진을 올렸다. 자신이 사는 아파트에서 하얀 방역복을 입은 사람들이 소독하는 사진이었다. 그는 이 아파트에 확진자가 생긴 것 같은데 바로 옆집인지 아닌지 알 방도가 없다고 하소연했다.
공포는 무지에서 나온다. 미국에서 코로나19 공포는 가파른 확산 속도가 주된 이유겠지만, 확진자의 아파트 단지와 시간대별 동선까지 공개하는 한국과 대조적으로 불투명한 정보공개도 한몫하는 듯하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 내 한인들의 귀국 행렬도 이어지고 있다. 초등학교 6학년 큰아이 반의 친구 가족도 예정보다 4개월 먼저 한국으로 돌아갔다. 의사 가족이지만 미국 현지에서 제대로 치료될까 싶은 두려움이 귀국을 앞당겼다고 했다. 연수 기간이 남은 공무원들도 조기 귀국하고 있다. 올여름 미국으로 올 예정이던 공무원 연수자들은 오히려 출국 시기를 늦추고 있다고 한다. 미국 내 한인 사회에 널리 퍼졌던 ‘미국병’이 향수병으로 바뀌는 분위기다. 우리 가족도 조기 귀국을 위해 비행기표를 알아보고 있다.
미국이 과연 코로나19 사태를 극복할 수 있을까. 미국은 현재 한국보다 강력한 사회적 거리 두기를 시행하고 있다. 질병통제예방센터(CDC)도 마스크 착용을 권고한다. 하지만 보건 전문가들의 의견을 무시한 초기 대응 실패, 검사·보호 장구와 산소호흡기를 충분히 비축하지 못한 점 등을 고려하면 이른 시일 내에 이를 극복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특히 리더인 트럼프 대통령의 행태는 비관적 전망에 무게를 싣는다.
좌충우돌에도 트럼프 지지율 상승
트럼프 대통령은 코로나19 사태가 심각해진 이후, 매일 TV에 나오고 있다. 그는 일일 브리핑에서 특유의 독설과 거짓말을 일삼는다. 3월 초만 해도 그는 “코로나19는 독감과 같다. 곧 종식될 것이다”라고 호언장담했다. 이후 사태가 악화됐는데도 부활절(4월12일)에는 사회적 거리 두기를 완화하겠다고 말했다가 곧 이를 철회했다. 한국의 방역체계를 본받아야 한다는 취지의 질문에 서울 인구는 3800만 명으로 크게 밀집돼 있어 미국 상황과 맞지 않는다는 거짓말도 서슴지 않는다. 한마디로 좌충우돌. 그런데 트럼프 대통령의 지지율은 상승곡선을 그리고 있다. <워싱턴포스트>와 방송이 3월 말 발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의 지지율은 47%로 한 달 전보다 2%포인트 올랐다.
스스로 세계 초일류국가라는 자부심을 가졌던 미국의 어두운 이면이 코로나19 사태로 드러나고 있다. 형편없는 리더십을 보임에도 대통령을 감싸는 국민, 민간시장의 경쟁 논리만 강조하는 의료보험 시스템, 매출 증가에 슬며시 웃고 있을지 모를 민간 의료보험회사들.
트럼프 대통령은 2016년 대선 전 정책공약집 격인 책 <불구가 된 미국>(Crippled America·2016년 국내 번역)에서 오바마케어를 “값비싸고 터무니없는 해결책”이라고 비판했다. 이 책의 부제는 ‘어떻게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 것인가’(How to Make America Great Again)다. 그러나 이방인 눈에는 코로나19라는 재앙 앞에서 미국은 위대하기보다는 오히려 ‘불구’가 돼가는 것처럼 보인다. 국민 수천만 명이 코로나19에 걸리면 제대로 치료받지 못한 채 사망에 이를 수 있다는 공포에 휩싸인 나라가 ‘정상’은 아니지 않나.
샌디에이고(미국)=이성규 <국민일보> 기자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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