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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러스가 ‘국적’ 가리더냐

이주민·난민 ‘방역 차별’… 체류자격·건강보험 없으면 마스크도 못 사
등록 2020-03-21 13:10 수정 2020-05-03 04:29
코로나19 환자가 다수 나온 대구 서구 한사랑요양병원에서 3월19일 오전 119 구급대원들이 환자를 대구의료원으로 이송하고 있다. 연합뉴스

코로나19 환자가 다수 나온 대구 서구 한사랑요양병원에서 3월19일 오전 119 구급대원들이 환자를 대구의료원으로 이송하고 있다. 연합뉴스

“코로나19가 팬데믹으로 특징지어질 수 있다는 평가를 내렸다.”
세계보건기구(WHO) 테워드로스 아드하놈 거브러여수스 사무총장은 3월11일(현지시각) 스위스 제네바 WHO 본부에서 열린 언론 브리핑에서 코로나19에 대해 세계적 대유행을 선언했다. 테워드로스 사무총장은 ‘팬데믹’을 언급하는 데 극도로 조심스러운 자세를 보였다. 그는 “팬데믹은 가볍게 쓸 수 있는 단어가 아니다. 팬데믹이라는 단어를 잘못 사용하면 비이성적인 공포를 불러일으키고 불필요한 고통과 죽음을 초래할 수 있다”고 경고의 메시지를 보냈다.
코로나19를 ‘팬데믹’으로 선언하지 않고, 최대한 에둘러 ‘특징지어질 수 있다’고 말한 것은 단어가 주는 공포감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감염병이 세계적으로 대유행하는 시기엔 어김없이 소수자 혐오, 감염환자에 대한 낙인이 횡행했다. 중세 유럽에선 ‘흑사병’이 유행하자 사람들은 유대인, 한센병 환자, 외국인에게 감염의 책임을 물어 무자비하게 죽이기도 했다. 물론 이러한 혐오와 낙인은 방역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일부에선 “WHO의 팬데믹 선언이 늦었다”는 불만이 나오지만 팬데믹 선언으로 바뀌어야 할 것은 우리의 태도뿐이다. 코로나19 발병 훨씬 이전부터 한국 땅에 살고 있었던 재중동포와 건강보험이 없어 마스크를 사지 못하는 이주노동자에 대한 근거 없는 혐오를 거둬야 한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돌봄노동을 하다 감염병 위험에 노출된 여성들의 애로를 들어야 한다. 소수자에 대한 배려와 공감은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이다.
민주주의의 기본을 잃어버린 팬데믹 시대에 남는 것은 근거 없는 혐오와 공포다. PANDEMIC(팬데믹)에서 가운데 글자 DEM(민주주의)을 빼면 PANIC(공포)이 되는 건 우연의 일치가 아닐지도 모른다.
이재호 기자 ph@hani.co.kr

“○○구청, 확진자 발생. 자세한 내용은 구청 홈페이지 확인 바랍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삐~익” 경고음과 함께 코로나19 확진환자 발생을 알리는 문자가 온다. 공포 분위기에 조금 무뎌진 한국인들은 힐끔 쳐다본 뒤 익숙한 손놀림으로 경고음을 끈다지만 시간이 흘러도 경고 문자에 익숙해지지 않는 이들이 있다. 이주민이다.

한글에 익숙하지 않은 이주민은 긴급재난문자를 받을 때마다 화들짝 놀란다. 감염병이 대유행하는 시기에 낯선 땅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데다 문자 내용을 이해할 수 없어서다. 하던 일을 멈추고 인터넷 번역 사이트에 문자 내용을 입력한다. 모국어로 번역된 내용은 어색하다. 지명 같은 고유명사가 잘 번역되지 않는다. 이주노동자들은 코로나19가 유행하는 한국 사회에서 더 큰 심리적인 압박을 느끼며 일상을 견뎌낸다.

한글을 모국어처럼 잘 쓰는 재중동포도 재난문자가 두렵기는 마찬가지다. 이 만난 재중동포들은 혹시나 자신들 중에 코로나19 확진환자가 나와 한국 사회에서 자신들을 바라보는 ‘혐오 정서’가 더 강해지지 않을지 전전긍긍했다.

제주도에 사는 외국인 미등록 체류자들이 자진 출국하기 위해 3월3일 오전 제주출입국·외국인청에서 순서를 기다리고 있다.  한겨레 허호준 기자

제주도에 사는 외국인 미등록 체류자들이 자진 출국하기 위해 3월3일 오전 제주출입국·외국인청에서 순서를 기다리고 있다. 한겨레 허호준 기자

재중동포 김아무개(52)씨는 지난주 정부에서 지급하는 공적마스크를 사기 위해 서울 구로구의 한 약국을 찾았다. 줄을 서 자신의 차례를 기다렸지만 약사는 “외국인등록증과 건강보험증을 모두 가져오지 않으면 마스크를 팔 수 없다”고 했다. 김씨는 건강보험료를 꾸준히 납부했지만, 건강보험증을 잃어버렸다. 국민건강보험공단 누리집에서 외국인등록증만 가져가면 마스크를 살 수 있다는 정보를 보고 갔다가 허탕을 친 김씨는 ‘차별받았다’고 느꼈다. 그는 과의 인터뷰에서 “코로나19가 중국 우한에서 발생했다는 이유로 (코로나19 발생) 이전부터 한국에 살고 있었던 우리 재중동포들에 대한 혐오도 커지고 있다. 일하던 곳에서 쫓겨나거나 공공장소에서 모욕을 당했다는 주변 지인들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고 했다.

‘방역 사각지대’ 이주노동자

재중동포들을 잠재적인 바이러스 감염환자로 보는 시각이 있지만 한국에서 재중동포를 통해 코로나19가 확산했다는 증거는 없다. 재중동포 4만8천 명과 중국인 8천 명이 사는 경기도 안산시에선 3월19일 현재까지 확인된 코로나19 확진자 다섯 명 모두 한국인이다. 재중동포 2만8천 명과 중국인 5천 명이 밀집한 서울 영등포구에서도 확진자가 13명 나왔지만 역시 모두 한국인이다.

재중동포들은 한국에서 코로나19 확진환자가 나오면서 특히 행동을 조심했다고 한다. 춘절 명절을 쇠러 중국에 다녀온 사람들을 정부의 요청에 따라 2주 동안 집에서 자가격리 조처를 했다. 6천 명 넘는 확진환자가 나온 대구시에는 재중동포 단체 이름으로 마스크 1만5천 장 등 구호물품을 기부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차가운 한국 사회의 시선 속에 재중동포의 삶은 삭막해지고 있다. 재중동포 밀집 지역에선 영업을 중단하는 가게가 속출하고 있다. “코로나19 유행이 계속되면서 오랫동안 일하지 못해 중국으로 돌아가는 사람이 늘고 있다. 또 우리를 혐오하는 목소리가 나와 속상하지만 그저 우리가 모여 있는 지역에서 확진환자가 나오지 않기만을 기도하고 있다.” 박옥선 중국동포지원센터 대표가 과의 전화에서 풀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주노동자도 한국인과 똑같이 불안하다. 농촌 지역에서 일하는 많은 이주노동자는 마스크를 살 수 있는 약국을 찾아갈 수 없다. 공장에서 일하는 이주노동자들은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일하느라 마스크를 사러 갈 시간이 없다. 최근에는 일자리를 잃고 나오는 사람도 많다. 코로나19 유행 기간에 이주노동자 4만~5만 명이 한국을 떠날 것으로 예상한다.”(우다야 라이 이주노조 위원장)

한글을 모르고, 주로 농촌이나 공장에서 육체노동을 하는 이주노동자 역시 코로나19의 사각지대다. 이주노동자들은 좁은 공간에 여러 명이 모여 사는 등 감염에 취약한 환경에 놓여 있지만, 바이러스 감염을 막을 유일한 수단인 마스크를 구하기가 어렵다. 한국 정부의 마스크 공급 대책을 보면 건강보험에 가입돼 있어야 약국에서 ‘공적마스크’를 살 수 있다. 이주인권단체 등은 국내 체류 외국인 250만 명 중 절반인 125만 명이 국민건강보험에 가입하지 않은 것으로 본다. 마스크를 구할 수 없는 사람이 125만 명이나 되는 것이다.

“모든 이주민에게 마스크 구매 기회 줘야”

정부는 지난해 7월부터 이주노동자와 난민 등 한국에서 체류기간이 6개월이 지난 모든 외국인은 의무적으로 건강보험에 가입하도록 했다(제1274호 ‘월급 150만원, 건강보험료 11만3050원’ 참조). 그러나 월평균 근로소득이 147만원으로 내국인의 67% 수준에 불과한 외국인에게 전체 가입자의 평균 보험료를 내도록 한 것이 큰 부담이었다. 지난해 10월께 당국이 파악한 내용을 보면 의무가입 대상이 된 27만 가구 중 8만2천 가구(30.4%)가 보험료를 내지 못했다. 이들은 약국에서 마스크를 살 수 없다. 체류 기간이 6개월이 되지 않아 건강보험 가입 자격이 안 되는 67만 단기체류자, 유학생 10만 명, 39만 명에 이르는 미등록 체류 외국인도 마스크 사각지대에 놓였다.

중복구매, 대리구매를 방지하기 위해 약국에서 마스크를 구입하는 체계는 대만에서 본뜬 것이다. 대만은 코로나19 확진환자가 100명(3월19일 기준)을 기록해 상대적으로 적어 방역 모범국으로 꼽혔다. 이런 대만에서도 보험에 가입할 수 없어 마스크를 사지 못한 인도네시아 출신 미등록 체류자가 코로나19에 감염돼 비상이 걸렸다. 2월26일 대만 보건 당국이 발표한 내용을 보면 대만 32번째 환자는 27번째 확진환자의 요양보호사인 돌봄노동자였다. 이주노동자가 71만 명, 이 중 미등록 체류 중인 노동자가 5만 명에 이르는 대만은 32번째 환자가 확진 판정을 받은 뒤 “모두 마스크를 살 수 있어야 한다”는 요구가 쏟아졌다.

한국의 미등록 체류 외국인 가운데 아직까지 감염환자가 나오지 않은 것은 다행이지만, 앞으로 얼마든지 나올 수 있다. 정부는 1월28일 이후 보건소에서 미등록 체류 외국인이 코로나19 관련 검사를 받더라도 법무부에 미등록 체류 사실을 통보하지 않도록 했지만 홍보가 부족해 일선 현장에선 잘 알지 못한다는 지적도 있다.

외국인이주노동운동협의회는 3월12일 성명을 내어 “마스크 보급에서 체류 자격자와 건강보험 가입자에 제한한 것은 명백한 차별이다. 방역 사각지대만 양산하는 외국인 차별 철폐하고, 모든 이주민에게 마스크를 구매할 기회를 주라”고 촉구했다.

서울 구로구 대림역 근처 재중동포 밀집 지역. 한겨레 김경호 선임기자

서울 구로구 대림역 근처 재중동포 밀집 지역. 한겨레 김경호 선임기자

‘실직’ 제주 예멘 난민, 마스크 언감생심

“요즘 일감이 많이 줄었다. 관광지 식당 등에서 일하던 예멘인들 일부가 일자리를 잃었다.”

제주도의 한 화훼 업체에서 일하는 예멘 난민 아비다(가명)는 코로나19 사태 이후 제주도 분위기를 전했다. 주로 장례식장에 공급하는 화환을 만드는 아비다는 “최근 장례식이나 행사가 많이 취소되면서 주문이 줄기는 했지만 다행히 일은 계속하고 있다. 그동안 많은 예멘인이 더 많은 일자리를 찾아 제주도를 떠났다. 남아 있는 사람은 채 100명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제주도로 향하는 국제선 항공편이 모두 끊겨 ‘0’건이 되는 등 사상 최악의 상황에 직면한 제주도의 위기는 난민들도 피해갈 수 없었다. 제주에서 예멘인들에게 숙소를 제공하는 한 주민은 과의 통화에서 “코로나19 확산 이후 외국인이 일하는 식당에 사람들이 찾지 않으려 하면서 예멘인들이 일자리를 잃었다. 예멘인들이 외국인 관광객을 대상으로 하는 식당을 운영할 계획도 있었는데, 국제선이 끊겨 외국인이 찾지 않으면서 물거품이 됐다”고 했다.

코로나19 유행으로 난민들이 겪는 가장 큰 어려움은 ‘일자리’다. 시리아 난민 하산(가명)은 “코로나19 이후 3주 가까이 일하지 못하고 있다. 건강보험에 가입하지 못해 마스크를 살 수도 없다. 오래전 마트에서 산 마스크는 열흘 가까이 빨아 썼는데 다 닳아서 쓸 수 없게 됐다”고 했다. 하산은 인도적 체류 지위를 인정받았지만 건강보험에는 가입하지 못했다.

방역의 사각지대에 놓인 난민의 목소리는 잘 들리지 않는다. 김영아 ‘아시아평화를향한이주’ 대표는 에 “대부분 비정규직으로 일했던 난민들은 코로나19 확산 초기에 상당수가 일자리를 잃었다. 고국에서 박해를 피해 한국으로 온 난민들은 감염병 정보, 예방을 위한 마스크 등을 받지 못하고 있다. 보호받아야 할 사회 취약계층으로조차 언급되지 않는 것에 심리적 공포가 크다”고 했다.

무방비 외국인이 감염된다면?

“한국인도 쓸 마스크가 없는데 외국인까지 챙겨야 하나.”

코로나19 유행에서 사각지대에 놓인 이주노동자를 다룬 기사에는 어김없이 이런 댓글이 나온다. 외국인보다 한국인이 먼저라는 주장이다. 하지만 바이러스는 사람을 가리지 않는다. 모든 한국인 감염환자가 ‘0’명이 되더라도 한국에 있는 이주민이 한 명이라도 코로나19에 걸리면 다시 한국엔 비상이 걸릴 것이다. 국적과 인종, 보험 가입 여부와 관계없이 모두가 방역의 대상이 돼야 하는 이유다.

카타르와 바레인 등지에서는 이주노동자들이 단체생활을 하는 곳에서 코로나19 확진환자가 무더기로 나와 비상이 걸렸다. 한국에서 아직 이주노동자와 난민 감염자가 나오지 않은 것은 다행이다. 하지만 안심할 수 없다. 한국에서 코로나19는 요양시설, 정신병원 폐쇄병동, 콜센터 등 우리 사회의 취약한 곳이면 어김없이 파고들었다. 감염환자가 나온 뒤에야 ‘전수조사’ 등을 뒤늦게 조처했던 당국이 취약계층 이주민에 대해선 선제적으로 대응할 수 있을까?

이재호 기자 p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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