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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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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부엌에는 이야기가 있다

어릴 때 먹었던 음식과 추억을 담은 음식 에세이…

현대인들의 정신적 허기 채워
등록 2019-09-13 12:37 수정 2020-05-03 04:29
고양 가좌도서관에서 열리는 ‘맛의 기억’ 시간에는 음식 에세이를 낭독하고(왼쪽) 우리 집 대표 음식을 직접 요리한다. 허윤희 기자, 가좌도서관 제공

고양 가좌도서관에서 열리는 ‘맛의 기억’ 시간에는 음식 에세이를 낭독하고(왼쪽) 우리 집 대표 음식을 직접 요리한다. 허윤희 기자, 가좌도서관 제공

“인생 뭐 있냐? 마음 편하게 맛있는 것 먹는 게 행복이지.” 코미디언 이영자는 ‘먹방’(먹는 방송)에서 먹으며 이렇게 말한다. 그의 말마따나 가장 짧은 시간에 확실한 행복감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은 마음 편하게 맛있는 한 끼 식사를 하는 거다. 그러나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삶이 팍팍해지고 사는 게 어려워지면서 이 소소한 행복을 느낄 수 있는 날은 적어진다. 바쁜 현대인들은 대신 TV나 인터넷 방송의 먹방과 ‘쿡방’(요리 방송)을 보며 대리만족감을 느낀다. 그래도 정신적 허기를 달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런 이들에게 책으로 떠나는 음식 여행을 권한다. 은 한가위를 맞아 인생과 음식 이야기가 버무려진 맛깔난 음식 에세이와, 미식가와 음식칼럼니스트들이 꼽은 ‘내 인생의 음식책’을 소개한다. 올가을에는 ‘먹독(讀)’ 함께 하실래요?

“어릴 적 동짓날 긴긴밤에 김치말이국수를 먹었어요. 아버지가 밤참으로 만들어주셨거든요. 차가운 동치미 국물로 만든 그 국수가 얼마나 맛있었나 몰라요.”

8월30일 오전 경기도 고양시에 있는 가좌도서관의 강의실. 음식 이야기를 책으로 펴내는 ‘맛의 기억-엄마의 음식을 기록하다’ 프로그램이 열리는 날이다. 이 프로그램에 참가한 조연미씨가 ‘우리 집 대표 음식’을 발표했다. 조씨는 돌아가신 아버지가 해주셨던 김치말이국수가 추억을 돋우는 음식이라 했다. 그에게 김치말이국수는 곧 그리운 아버지다.

‘장롱 면허’처럼 묵혀두었던 기억

음식은 추억으로 기억된다. 조씨에 이어 발표한 박진숙씨는 친정어머니가 만들어주던 ‘가자미식해’에 관한 추억을 꺼냈다. “어릴 때 엄마가 가자미식해를 만들면 그 옆에서 턱을 괴고 있었어요.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에 가자미식해 만드는 걸 배워야 했는데… 아쉬워요. 어릴 때 봤던 기억을 되살리며 (가자미식해를) 만들었지만, 예전에 먹었던 맛이 안 나요.” 신인선씨는 다른 이들의 추억 음식 이야기를 들으며 오래전 가족과 함께 먹던 만두가 떠올랐다. “친정집이 대구에 있어요. 저희 집에서는 정구지(부추)를 많이 넣은 만두를 빚었어요. 온 식구가 둘러앉아 만두를 빚었어요. 지금 생각해보니 그렇게 같이 먹어서 만두가 더 맛있었던 것 같아요.”

‘맛의 기억’ 강사인 김현숙 작가는 수업 시간마다 ‘맛의 기억’ 참가자들이 말하는 음식에 깃든 추억이 한가득이란다. “같은 음식을 말해도 그때 누구랑 먹었는지 당시 느낌에 따라 음식 이야기가 다 달라요. 김치만두, 부침개, 된장찌개 등 일상의 음식에 얽힌 평범하면서도 특별한 이야기, 바로 그게 한 편의 글이 돼요.” 참가자들은 늘 먹어 몰랐던 음식의 소중함을 깨달으면서 자신의 소소한 일상도 돌아보게 된다고 한다.

김 작가와 함께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이은주 평생교육사는 “마치 ‘장롱 면허’처럼 묵혀두었던 음식에 대한 기억을 꺼내며 그리운 사람을 소환한다”고 김 작가의 이야기에 말을 보탰다. 시작은 음식 이야기지만 결국에는 그 음식을 만들어준 고마운 사람, 함께 먹었던 그리운 사람 이야기로 끝난다고 한다. ‘맛의 기억’ 프로그램은 한국도서관협회가 주관하는 2019년 ‘길 위의 인문학’ 공모에 선정됐다. 이 프로그램에 참여한 일반인들의 음식 이야기를 묶어 올해 11월에 에세이를 펴낼 예정이다.

김 작가는 음식은 좋은 글의 재료라고 한다. “누구에게나 잊을 수 없는 음식이 있어요. 우리를 살게 한 것이 음식이니까요. 음식은 소통과 교감의 수단이기도 해요. 누군가의 마음에 가닿고 이야기를 나누는 좋은 매개체이기도 하죠.”

이씨가 참가자들의 발표에 이어 음식 에세이 (공선옥 외 지음, 한길사 펴냄)의 한 구절을 낭독했다. “새로 지은 밥을 강된장과 함께 부드럽게 찐 호박잎에 싸먹으면 밥이 마냥 들어간다. 그리고 마침내 그리움의 끝에 도달한 것처럼 흐뭇하고 나른해진다. 그까짓 맛이라는 것, 고작 혀끝에 불과한 것이 이리도 집요한 그리움을 지니고 있을 줄이야.”

제주도에 문을 연 음식책 전문 책방 ‘키라네 책부엌’.

제주도에 문을 연 음식책 전문 책방 ‘키라네 책부엌’.

할머니들의 평범한 삶과 레시피

‘맛의 기억’ 참가자들의 기록처럼 자신의 음식 이야기를 담은 에세이가 잇따라 출간됐다. 요즘 먹방과 쿡방 인기와 함께 출판계에도 음식을 소재로 한 책이 주목받기 때문이다. 에세이 부문에서 음식은 한 영역을 차지할 정도로 비중이 크다. 온라인서점 예스24의 조사에 따르면 음식 에세이 판매량은 지난해 같은 기간(2018년 1월1일~9월3일)과 비교해 4.5% 늘었다. 지난해 세상을 떠난 김서령 작가의 (푸른역사 펴냄), 영국의 소설가 줄리언 반스의 (다산책방 펴냄), 충청도 할머니 51명이 엮은 (창비교육 펴냄), 일러스트레이터 임진아 작가의 (휴머니스트 펴냄) 등이 음식 에세이 부문 베스트셀러로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예스24의 김태희 엠디(MD)는 “최근에 나온 음식 에세이들은 단순히 음식 소개보다는 개인 경험이 녹아든 음식 이야기가 많고 그런 이야기가 독자에게 공감을 얻어 인기를 끈다”고 했다. 팔순이 넘은 나이에 한글을 배운 충청도 할머니 51명의 인생과 요리 이야기를 담은 가 최근 인기 음식 에세이라고 한다.

처럼 자기 고백 서사의 인기에 힘입어 유명 요리사나 소설가가 아닌 일반인들의 음식 에세이도 많이 나온다. 지난해 출간된 (나카무라 유 지음, 남해의봄날 펴냄)도 일본, 스리랑카, 한국 등 세계 각국에 사는 할머니들의 인생과 음식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조리법과 함께 그들의 인생 이야기가 곁들여진다.

음식으로 풀어내는 자기 고백 서사

이 책을 출판한 남해의봄날 천혜란 편집자는 “할머니들의 음식 에세이에는 몇십 년 세월 요리하며 얻은 생활의 지혜가 응축돼 있어요. 예를 들어 오른쪽으로 저어야 호박잼이 잘된다는 포르투갈의 마리아 로즈 할머니의 요리법에는 과학적 근거가 없을지 몰라도 마술의 주문 같아요”라고 말했다. 책에서는 세대 간 단절로 들을 수 없는 ‘어른의 목소리’를 들을 수도 있단다. “꼰대처럼 가르치려 하지 않고 자기가 살아온 인생을 조곤조곤 들려주는 할머니들 목소리가 친근하고 다정하다. 누구라도 거부감 없이 들을 수 있는 목소리다.”

음식책을 주로 파는 특화된 동네책방도 생겼다. 지난해 12월 제주도에 문을 연 책방 ‘키라네 책부엌’이 있다. “음식에 관한 책을 읽고 영화를 보는 게 유일한 낙”이었다는 이금영씨가 주인이다. 책방에는 음식 에세이와 음식에 관한 소설 등 100여 권이 있다. 책방을 찾는 이들은 30대부터 70대까지 다양하다.

이 대표는 “할머니 음식 이야기를 담은 도 인기지만 요즘에는 제철 식재료에 관한 책 (요나 지음, 어라운드 펴냄) 등을 손님들이 많이 찾는다”고 했다. 일반 독자들이 먹는 것, 음식을 만드는 것을 넘어 음식의 바탕이 되는 재료까지 관심을 가진다는 얘기다.

공동의 식탁을 그리워하며

이에 백문영 푸드칼럼니스트는 다양화, 전문화를 추구하는 독자들의 취향이 반영된 것이라고 분석한다. “요즘 음식책의 흐름(트렌드)을 보면 과거보다 식재료에 좀더 중점을 두고 있어요. 예를 들어 같은 고기를 먹더라도 새로운 품종에 흥미를 갖고, 과일도 알려지지 않은 품종이라든가 새로운 품종에 집중하는 것이 요즘 소비 추세예요. 황도나 백도밖에 없던 복숭아 시장에 더 다양해진 품종별로 복숭아를 파는 곳도 생겨나고 있어요.”

한미화 출판평론가는 모든 부엌에는 이야기가 있고, 그 작은 이야기는 음식 에세이에 담을 수 있다고 말한다. “누구나 글을 쓰는 시대에 음식은 자기 이야기를 풀어낼 통로가 돼요. 우리가 살면서 먹어온 것이 음식이니 그만큼 쓸거리가 많아요. 한번 터지면 넝쿨째 들어올릴 만한 이야깃거리나 추억이 많아요. 1인가구, ‘혼밥’이라는 용어가 평범해진 요즘에는 그런 작은 이야기가 소중한 시대니까요.” 그 이야기에서 현대인들은 정신적 허기를 채우고, 잊고 있었던 공동체 밥상의 추억을 떠올리기도 할 것이란다. 그런 평범한 사람들이 기록하는 일상의 음식, 그리고 그들의 삶 이야기는 아무리 먹어도 질리지 않는 집밥 같다.


음식책에 담긴 추억의 양식


그 에세이 그 음식


(창비교육 펴냄) “맛있는 것을 허면 늘 자식만 생각나”는 이순례 할머니의 질겅이장아찌. 캐나다 밴쿠버에 사는 아들이 집에 갈 때 들고 가기 편하고 맛이 변하지 않는 이 음식을 보낸다. 곰삭으면 더 맛있다고 한다.
(권여선 지음, 한겨레출판 펴냄)의 냄비국수. 작은 냄비에 멸칫국물을 붓고 팔팔 끓이다 달걀을 깨뜨려 넣고 흰자가 하늘하늘하게 익어갈 즈음 삶아놓은 국수를 담고 그 위에 유부와 어묵, 쑥갓과 다시마를 웃기로 얹는다. 그 냄비국수의 맛을 못 잊어 지은이는 “찬바람만 불어봐라, 곧바로 냄비국수를 해먹고 말리라” 한다.
(노석미 지음, 사이행성 펴냄)의 고구마줄기무침. 텃밭에서 가꾼 재료로 음식을 만드는 지은이는 가을의 대표적 양식 고구마 줄기를 자르면서 느낀단다. ‘이게 먹거리라니 대단한데.’ 삶고 무치고 하는 수고로움에 비해 후루룩 먹는 시간이 짧지만 참 맛나다.
(윤혜선 지음, 에쎄 펴냄)에서 김치는 안개꽃과 같다고 말한다. 어디에나 잘 어울리고 홀로 접시에 담겨 있어도 단아하고 그윽해서다. “생쌀들이 팅팅 부은 얼굴로 메롱”했을 때 거기에 김치를 넣어 김치볶음밥을 해먹는다. 김치는 구원투수 같다.

허윤희 기자 yhhe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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