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다가올 딸들의 세상이 더욱 환하고 평화롭기를

여성부, 여성 장관, 모성보호 3법, 남녀차별금지법 등

김대중 전 대통령 추동한 한국 여성운동의 뿌리, 이희호
등록 2019-06-15 14:40 수정 2020-05-07 13:36
❶ 1959년 YWCA 총무 시절. ❷ 1939년 이화고등여학교 친구들과.(맨 오른쪽)❸ 1947년 서울대학교 면학동지회 결성 직후 김구 선생과.(앞줄 왼쪽 둘째)❹ 1956년 미국 유학 시절.(앞줄 앉은 이)❺ 1960년대 여성문제연구회 회원들과.(왼쪽 둘째)

❶ 1959년 YWCA 총무 시절. ❷ 1939년 이화고등여학교 친구들과.(맨 오른쪽)❸ 1947년 서울대학교 면학동지회 결성 직후 김구 선생과.(앞줄 왼쪽 둘째)❹ 1956년 미국 유학 시절.(앞줄 앉은 이)❺ 1960년대 여성문제연구회 회원들과.(왼쪽 둘째)

1989년 12월19일 국회에서 가족법 개정안이 통과됐다. 상속 때 여성과 남성 사이 차별적 요소를 없애고, 이혼 때 자녀 친권을 어머니 쪽도 공평하게 주장할 수 있도록 했다. 이날 개정은 1956년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 반세기 가까이 한국 여성운동의 큰 줄기로 이어져온 가족법 개정 운동의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야당 총재로 복귀한 김대중 전 대통령이 이룬 성취다. 이희호 김대중평화센터 이사장은 자서전에서 “가장 기뻐한 이가 남편이었을 것”이라며 “남편은 모든 선거에서 가장 앞선 여성 정책을 제시한 페미니스트 후보”라고 기록했다. 이 이사장이 자서전에서 이날 풍경을 개인적인 기쁨을 발산하며 기억한 반면, 김 전 대통령은 민주주의와 연결지어 다소 건조하게 당시 법 개정 상황을 설명한다. 같은 시점을 풀어내는 두 사람의 대조는 자못 상징적이다. “나는 정치에는 전혀 개입하지 않았지만 여성 문제에 한해서는 발언을 했다”고 한 이 이사장의 뒤이은 조심스러운 설명도 사적인 것과 여성운동과 정치의 구분과 위계가 엄격했던 시대, 정치라 불리는 것들의 격랑 한가운데에서 여성운동가로 살았던 삶을 어느 정도 요약한다.

이 글은 ‘여성운동가’ 이희호 이사장의 부고다. 2008년 나온 그의 자서전 <동행>에 대부분 내용을 빚졌다. 책에서 직접 인용한 부분은 굵은 글씨로 적었다.

❻ 1962년 김대중 전 대통령과 결혼.❼ 1973년 납치된 지 닷새 만에 돌아온 김 전 대통령과.❽ 1976년 3·1 민주구국선언 재판 때 다른 피고인 가족들과.

❻ 1962년 김대중 전 대통령과 결혼.❼ 1973년 납치된 지 닷새 만에 돌아온 김 전 대통령과.❽ 1976년 3·1 민주구국선언 재판 때 다른 피고인 가족들과.

2019년 6월10일 밤 11시37분 이희호 이사장이 타계했다. 향년 97. 일제강점기(1922년)에 태어났지만 유년 시절은 따숩고 행복했다. “여자도 공부를 해야 한다.” 딸의 공부를 지지하고 독려했던 어머니가 1940년 세상을 떠났다. ‘결혼하지 않는다’ ‘공부를 많이 하자’ 자신에게 다짐했다. 그것이 어머니의 뜻을 이루는 길이라고 믿었다. 1942년 이화여자전문학교에 입학했다.

의식은 개혁적으로, 방법은 온유하게

상처도 있었다. 이화여전에 입학한 첫해 여름방학, 우연히 큰오빠가 아버지에게 쓴 편지를 읽었다. ‘아버님, 계집애를 전문학교 공부를 시켜서 뭐하시려고…’ 이 말에 지독히 모멸감을 느꼈다.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조용히 기숙사를 나와 입주 가정교사로 들어가 공부를 이어갔다. 되도록 스스로 힘으로 공부하려고 했다. 해방 뒤(1946년) 서울대학교에 다시 입학했다.

해방 공간의 일상은, 심지어 대학에서마저 이 이사장에게 참을 수 없는 것들로 가득 차 있었다. 여학생들은 빈 교실을 찾아 조용히 도시락을 먹고, 신입생 환영회에서 고개를 잘 들지도 못했다. 남학생들은 술을 먹고 호연지기를 뽐냈다. 이 불공평을 참을 수 없었다. 여학생들에게 당당하게 고개 들라고 주문했다. 모임에서는 여학생이 마실 수 있는 사이다도 준비할 것을 요구했다. 대신 교재를 베껴 적어 배포하는 일, 칠판 지우는 일에 남성들보다 솔선수범했다. 남학생들의 저항감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의식은 개혁적이었지만 방법은 가장 온유하기로 했다. 글로리아 스타이넘이 페미니즘 잡지 를 창간(1972년)하고 여성해방을 주창하려면 20여 년을 더 기다려야 했던 때다.

당대에 아무렇지 않은 말버릇으로 여겨졌던 여성 비하는 물론, 지금까지 이어지는 우리말 속 차별에 대해서도 이 이사장은 예민했다. 그는 유독 ‘그녀’라는 말에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켰다. ‘그남’은 없는데 왜 ‘그녀’라고 하는지. 우리말에 자리잡은 남성들의 우월의식을 연구해 책을 내려고 한 적도 있다. 1957년 미국 유학 중 한 번 만난 적이 있는 엘리너 루스벨트가 ‘세계인권선언 1장’(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로우며 그 존엄과 권리에 있어 동동하다)에 남성만을 지칭한다고 오해를 살 수 있는 ‘men’이 아니라 인류를 지칭하는 ‘human being’을 새겨넣은 세심함에 탄복했다.

❾ 1979년 김 전 대통령 가택연금이 해제된 날. ❿ 1981년 청주교도소에서 김 전 대통령 면회.⓫ 1987년 이한열 열사 장례식에 참석.⓬ 1998년 제15대 대통령 취임식.

❾ 1979년 김 전 대통령 가택연금이 해제된 날. ❿ 1981년 청주교도소에서 김 전 대통령 면회.⓫ 1987년 이한열 열사 장례식에 참석.⓬ 1998년 제15대 대통령 취임식.

정치인의 아내로 중단된 꿈

김 전 대통령과 관계에서도 여성 문제를 두고는 잴 것 없이 직진했다. 1967년 요정 정치 반대 운동을 벌이며 남편에게 대놓고 물었다. “남자들은 요정이 아니면 정치를 못하나요?” “당신도 알다시피 나는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언젠가 남자들 큰코다칠 겁니다.” 취한 모습을 별로 보이지 않는다는 그(김 전 대통령)의 말도 사실인지라 그쯤에서 그쳤다. 이 이사장에게도 여성운동은 단지 대의와 누군가를 위한 운동이 아닌 내 일상 속 참을 수 없는 것들에 목소리 내는 것이었다.

‘나는 여성운동이 하고 싶다.’ 한국전쟁 속에서 이 이사장은 생각했다. 전쟁에서조차 남성의 희생은 고귀한 반면, 후방의 피해자인 여성들에게는 불명예와 수모만 있다는 것을 절감했다. 미국 유학에서 돌아와 다짐을 지켰다. 교수가 되는 길을 포기하고 대한와이더블유시에이(YWCA) 총무를 맡았다. 여성단체협의회 이사, 여성문제연구회 회장을 지냈다. 직함만 구한 것이 아니다. 이 시기 축첩 반대 운동, 가정법원 설치 같은 가족 내 성평등을 지향하는 활동은 훗날 가족법 개정으로 이어졌고, 여성문제연구회에서 매달린 여성노동 실태조사는 여성노동 운동의 씨앗이 됐다. 이슈를 중심으로 단체를 모아 함께하는 활동 방식 역시 지금은 익숙해진 ‘연대’라는 시민운동 방식을 한국 사회에 전하는 계기가 됐다. 당시 함께 활동했던 차경애 YWCA 복지사업단 이사장은 “한국 사회에서 일어난 여러 굵직한 여성운동 줄기를 타고 올라가 시작점을 찾다보면 결국 이 이사장이 보인다”고 설명했다.

이렇듯 이 이사장이 여성의 인권을 바로 세우는 일에 본격적으로 나서서 활동한 때는 1960년대 10년간이다. 김대중의 아내가 아닌 독자적인 이희호로 활동한 마지막 시기이기도 하다. 독재정권 아래서 중앙정보부의 미행, 이 이사장이 속한 단체에 대한 불이익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여성운동가’는 언제나 그 앞에 붙어 있던 수식어이지만 중단된 꿈으로 남았다. 탄압받는 야당 정치인의 아내로 때로는 입에 검은 테이프를 붙이고, 때로는 남편의 수인 번호를 달고 거리로 나서야 했다. 영부인이 되고 나서는 권력 남용과 구설을 경계했다. “내가 존경하는 엘리너 루스벨트는 퍼스트레이디 시절 정부 정책과 다른 의견을 과감하게 개진하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의 문화는 그와 많이 다르다는 걸 나는 잘 알고 있다.”

여성운동가 이희호, 개인 이희호를 스스로 감췄지만 국민의 정부 들어 여성부가 신설되고, 여성 장관 4명이 배출되고, 모성보호 3법과 남녀차별금지법이 제·개정되는 과정에 이 이사장의 역할은 적지 않았다. 이 이사장을 존중하고 존경했던 남편은 그의 목소리에 귀 기울였다. 김 전 대통령은 “나는 여성정책에서만큼은 아내의 의견을 물어 정부 일을 하는 데 참고한다”고 밝힌 바 있다. 이 이사장도 1999년 <여성신문> 인터뷰에서 “여성들의 장기적이고 지속적인 발전을 위한 기반 구축을 신중히 생각하고 있다”고 조심스럽게 설명했다. “김 전 대통령도 여성주의적 정책에 대한 생각이 많았지만 이를 격렬히 추동하는 분이 이희호 이사장이었다. 내조만으로 그의 틀을 가둘 수 없다”고 김 전 대통령의 마지막 비서관이었던 최경환 민주평화당 의원이 기억했다.

⓭ 2000년 1차 남북 정상회담 때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과.⓮ 2011년 평양 금수산기념궁전에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AP 연합뉴스 제공⓯ 2013년 YWCA 한국여성지도자상 대상 수상. ⓰ 2015년 남북관계 회복 위해 북한 방문.

⓭ 2000년 1차 남북 정상회담 때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과.⓮ 2011년 평양 금수산기념궁전에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AP 연합뉴스 제공⓯ 2013년 YWCA 한국여성지도자상 대상 수상. ⓰ 2015년 남북관계 회복 위해 북한 방문.

“아직도 성평등한 세상은 멀었다”

이 이사장은 90살에 “아직도 성평등한 세상은 멀었다”(<여성신문> 인터뷰)고 짚었다. 96살에 “(미투 운동에 나선 여성들이) 대견하고 고맙다. 더 단호하고 당당하게 나갔으면 좋겠다”(<경향신문> 인터뷰)고 했다. 예쁘게만 포장하기 어려운 고생스러운 삶을 지나온 90대에 이르러서도 여성이 존중받는 개인으로 당당하길 바라는 마음은 대학 시절 때와 같았다.

“성평등하고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겠다.”(한국여성단체연합) “여성에 대한 뜨거운 사랑을 잊지 않겠다.”(YWCA연합회) “우리는 오늘 여성을 위해 평생을 살아오신 한 명의 위인을 보내드리고 있다.”(문재인 대통령) 떠나는 길, 많은 이가 이 이사장을 ‘여성운동가’로 추모했다. 이 이사장이 기도했던 다가올 딸들의 세상이 더욱 환하고 평화롭기까지 가야 할 길은 아직 멀다. 그래도 자신이 “여성의 인권을 존중하고 높이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 사람”(<한겨레> 인터뷰)으로 기억되길 바랐던 소원은 끝내, 이뤘다.

방준호 기자 whorun@hani.co.kr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한겨레21>이 후원제를 시작합니다
<한겨레21>이 기존 구독제를 넘어 후원제를 시작합니다. <한겨레21>은 1994년 창간 이래 25년 동안 성역 없는 이슈 파이팅, 독보적인 심층 보도로 퀄리티 저널리즘의 역사를 쌓아왔습니다. 현실이 아니라 진실에 영합하는 언론이 존속하기 위해서는 투명하면서 정의롭고 독립적인 수익이 필요합니다. 그게 바로 <한겨레21>의 가치를 아는 여러분의 조건 없는 직접 후원입니다. 정의와 진실을 지지하는 방법, <한겨레21>의 미래에 투자해주세요.

*아래 '후원 하기' 링크를 누르시면 후원 방법과 절차를 알 수 있습니다.
후원 하기 http://naver.me/xKGU4rkW
문의 한겨레 출판마케팅부 02-710-0543




독자 퍼스트 언론, <한겨레21> 정기구독으로 응원하기!


전화신청▶ 1566-9595 (월납 가능)
인터넷신청▶ http://bit.ly/1HZ0DmD
카톡 선물하기▶ http://bit.ly/1UELpok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