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79시간 노동이 52시간 된 마법

12월31일 주52시간제 처벌 유예기간 종료…

노동시간 단축에 저항하는 꼼수 백태
등록 2018-12-15 13:04 수정 2020-05-03 04:29
정부세종청사 고용노동부 직원들이 퇴근하고 있다. 연합뉴스

정부세종청사 고용노동부 직원들이 퇴근하고 있다. 연합뉴스

7월1일부터 종업원 300명 이상 사업장을 대상으로 시작된 ‘주 52시간 근무제’의 처벌 유예기간(6개월)이 12월31일로 끝난다. 새해부터는 300명 이상 기업 가운데 주 52시간을 넘겨 일하는 노동자가 회사를 고용노동부에 신고할 경우 ‘2년 이하 징역 또는 2천만원 이하 벌금’이라는 형사처벌을 받을 수 있다.

정부가 처벌 6개월을 유예한 것은 이 시간 동안 유연근로제 도입, 인력 충원, 장시간 근로 체계 개편 등 대책을 마련하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6개월이 다가오자 처벌 유예를 연장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재계와 일부 언론에서 나오고 있다. 게다가 유연근로시간제도인 탄력근로제·선택적근로시간제의 단위기간을 늘려 특정 기간에 노동자가 최대 64시간까지 일할 수 있게 해달라는 요구가 쏟아졌다. ‘저녁이 있는 삶’을 향한 먼 길에 이제 첫발을 내디뎠을 뿐인데 이런 주장이 나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기에는 업무 특수성을 이유로 여전히 노동 생산성 향상이나 근무시스템 개편보다 ‘장시간 노동’이라는 쉬운 선택지를 놓지 않으려는 일부 기업의 시각이 자리잡고 있다.

신규 인력 채용보다 근무시간 관리에 몰두

‘부바부’. 직장인들 사이에서 통용되는 말로 ‘부서바이부서’, 부서에 따라 상황이 다르다는 뜻이다. 대부분 기업들이 주 52시간 노동 시행 뒤 큰 혼란을 겪지 않았지만 여전히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는 기업과 부서는 존재한다. 대한상공회의소(대한상의)가 주 52시간 근무제 대상인 대·중견기업 317개사를 대상으로 진행해 12월11일 발표한 실태조사(10월29일~11월22일 조사) 결과를 보면, “주 52시간 초과근로가 아직 있다”고 답한 기업이 24.4%로 집계됐다. 경제단체들이 통계청 경제활동인구 조사를 분석한 결과(10월 기준) 300명 이상 사업장에서 주당 52시간 이상 일하는 취업자 수는 약 19만 명(7.6%)으로 추산된다. 대한상의 조사에서 주 52시간 시행에 따른 대응 방안으로 기업들은 ‘근무시간 관리 강화’(59.3%), ‘유연근무제 도입’(46.3%), ‘신규 인력 채용’(38.2%), ‘자동화 설비 도입’(19.5%) 순으로 꼽았다(복수 응답). 대한상의는 “당장 바뀐 법을 준수하고 단기간에 업무 효율을 높이기 위한 조처를 먼저 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당장 바뀐 법을 지키기 위해 기업들은 주로 근무시간 관리 강화와 법에 규정된 유연근무제를 도입했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 여전히 장시간 노동에 신음하는 노동자가 있는 것은 일부 기업이 법을 형식적으로 지키되 ‘꼼수’를 쓰며 ‘무늬만 주 52시간 노동’을 시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장 대표적인 방식은 ‘휴게시간’(비근로시간)을 활용한 주 52시간 ‘끼워맞추기’다. 제도 도입 초기인 7월 초 SK하이닉스(하이닉스) 사내 게시판에는 주 6일 동안 79시간이 넘도록 회사에 머물렀는데, 52시간 노동을 맞추기 위해 하루 3~4시간을 비근로시간으로 처리하게 했다는 내부 고발글이 올라왔다. 고발 당사자는 하이닉스 공정(제조기술) 업무 직군에 속한 노동자로 알려졌다. 장시간 노동으로 ‘죄조기술’(전생에 지은 죄가 많아 제조기술 직군이 됐다는 뜻)로 불리는 직군이다. 6개월이 지난 지금도 강도만 약화됐을 뿐 일부 직군은 비근로시간 입력으로 주 52시간 노동을 맞추고 있다.

제조기술 직군인 ㄱ씨는 여전히 밤 10시께 퇴근할 때가 부지기수고 토요일에 회사에 나갈 때가 많다고 했다. 한때는 70시간 가까이 회사에 머무르기도 했다. 반도체 제작 시설인 ‘펩’(Fab)에서 일할 경우 장비에 문제가 생기면 밤이라도 바로 대응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노동시간은 평균 주 52시간으로 기록됐다. 노동자가 직접 자신의 근무시간을 입력하는데 여기에 하루 2시간 이상 비근로시간을 입력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비근로시간 항목은 ‘티타임’ ‘흡연’ ‘헬스장’ ‘병원’(공장 부지 안에 헬스장과 병원이 있음) ‘기타’ 등이다. 고용노동부가 근로기준법에 근거해 흡연이나 커피를 사러 다녀오는 시간을 ‘대기시간’으로 보고 근로시간에 포함된다고 해석한 것과 어긋난다. ㄱ씨는 비근로시간 입력에 대해 “인생을 포기하는 시간”이라고 말했다. “빨리 일 마치고 퇴근하고 싶지, 누가 그렇게 휴식시간을 가지며 회사에 오래 남고 싶겠어요.” 주 52시간 근무제 도입 초기에 노동시간을 출퇴근 시간에서 5분씩 뺀다거나, 회사 출입구에서 퇴근 카드를 찍고 (출퇴근 카드를 찍지 않는) 장비 출입구로 들어가 일할 때보다는 그나마 지금이 나아졌다고 한다.

비근로시간으로 둔갑하는 근로시간
경기도 이천에 있는 SK하이닉스 공장 전경. 한겨레

경기도 이천에 있는 SK하이닉스 공장 전경. 한겨레

하지만 ㄱ씨는 자신의 노동시간을 ‘자발적’으로 관리한다. 하이닉스는 주 52시간 도입에 맞춰 노사 간에 선택적근로시간제를 도입하기로 합의했다. 1개월 이내에서 2주 또는 4주 단위로 노동자가 하루의 근무시간을 선택할 수 있는 제도다. 첫주에 60시간을 일했다면 다음주에는 44시간을 입력해 주 52시간을 맞추면 된다. 하지만 ㄱ씨와 전국화학섬유식품산업노동조합(화섬노조) SK하이닉스기술사무직지회의 설명에 따르면, 2주 평균 노동시간이 주 52시간을 넘을 경우 최근 일주일 노동시간에서 비근로시간을 늘리는 방식으로 수정해 시간을 맞추는 것으로 나타났다. 하이닉스 기술사무직 노조가 지난 10월 초 공개한 ‘근로환경 실태조사 결과’(종업원 1012명 조사)를 보면 응답자의 38.8%가 “실제 휴게시간보다 과다하게 비근로시간을 입력했다”고 답한 것(“그런 사실 없다”는 61.2%)으로 집계됐다. 비근로시간 입력에 대해 응답자의 76.3%가 ‘책임을 개인한테 떠넘기는 불합리한 제도를 폐지해야 한다”고 했다(“업무 특성상 어쩔수 없다”는 18%).

ㄱ씨는 “근로시간이 넘으면 회사에서 부서장들에게 경고가 내려온다. 그럼 시간을 넘기지 않겠다는 사유서를 써야 한다”며 “회사는 장비를 쉬는 시간 없이 최대한 돌려야 수익이 난다. 장비가 선택을 안 하는데 어떻게 내가 선택적 근로를 할 수 있겠나. 지금의 장시간 노동이 달라질 기미가 안 보이는 게 제일 답답하다”고 했다. 하이닉스 회사 쪽은 제도 시행 초기 구성원들이 선택적근로시간제를 숙지하지 않아 시행착오가 있었으나 현재는 그런 경우가 있는지 확인이 안 된다고 했다. 덧붙여 “지속적으로 (노동시간) 모니터링을 하며 주 52시간 근무제를 준수할 계획”이라고 했다.

주 52시간이 초과될 경우 근로시간 입력 시스템이 멈추는 ‘꼼수’도 있다. 이정미 정의당 의원이 10월 국정감사에서 공개한 사례를 보면, 온라인게임 개발·서비스 업체 스마일게이트는 52시간 노동을 초과하는 경우 ‘코어타임’(의무근로시간)대에도 시스템이 멈추는 것으로 나타났다. 초과노동은 기록되지 않는 것이다. 게임업체 넥슨도 52시간을 초과하는 경우 근로시간 입력 시스템이 비활성화되는 방식으로 주 52시간 노동을 맞췄다. 두 업체 모두 고용노동부로부터 근로감독을 받고 최근 근로시간 입력 시스템을 개선하기로 했다. 배수찬 회섬노조 넥슨 지회장은 “문제가 생긴 뒤 입력 시스템이 바뀌었다. 현재는 주 52시간 넘게 일하는 직원이 거의 없다. 과도기적 상황 같다”며 “한 달 단위로 운영되는 선택적 근로시간제를 제대로만 지켜도 충분히 (노동자나 회사에 모두) 탄력적이다. 시간을 넘겨 일한다고 품질이 올라가는 것이 아니다. 주 52시간 노동을 지켜도 게임을 만드는 데는 문제가 없어야 한다”고 말했다.

못살겠다, 노조하자

김환민 IT노조 직장갑질 TF팀장은 “근로시간 기록 시스템을 본인이 끄거나, 퇴근해 직원들이 회사 밖에 모여서 작업하거나, 퇴근 카드를 찍고 게이트가 없는 쪽으로 들어와 다시 일하는 경우가 여전히 있다. 문제는 이 모든 일이 자발적인 것으로 포장되는 거다”라고 지적했다. 직장인 익명 앱 ‘블라인드’에는 “게이트 기록을 퇴근 시간은 안 남게 변경했다” “비흡연자인데 휴게시간 입력에 흡연으로 넣는다” 등의 글이 꾸준히 올라온다.

이러한 갈등 속에 실제 노동시간 단축과 제대로 된 야근수당을 받아야겠다는 노동자들의 요구는 노동조합이 없던 회사의 노조 설립 흐름으로 이어지고 있다. 공장의 전임직(생산직) 노조 가입 대상이 아닌 4급 이상 기술사무직이 만든 SK하이닉스기술사무직 노조, 스마일게이트·넥슨 노조는 모두 9월에 설립됐다. 현재 포괄임금제(연장·야간근로 등 시간외근로 등에 대한 수당을 급여에 포함시켜 일괄 지급하는 임금제도) 폐지(또는 개선)를 요구하고 있다. 국내 최대 회계법인인 삼일회계법인에서도 11월 노조가 출범했다. 노조는 회사의 무리한 ‘근로자 대표’ 선출 과정이 노조 설립의 배경이라고 밝혔다. 주 52시간 노동에 따라 선택적근로시간제 등 유연근로제도를 도입하려면 회사 쪽과 노동자 대표의 합의가 있어야 하는데, 노동자 대표 선출 과정에서 회사 쪽이 ‘입맛에 맞는’ 후보를 무리하게 밀어붙였다는 것이다.

‘법의 정신’ 말만 하는 정부

문제는 정부의 태도다. 12월12일 임서정 고용노동부 차관은 정부세종청사 브리핑에서 “(노동시간 단축) 계도기간 연장과 관련해서는 좀더 상황을 봐야 할 것 같다. 경제사회노동위원회에서 논의가 진행될 것이다”라고 밝혔다. 연말에 입장을 발표하겠다는 것이다. 임 차관이 “기업에서 ‘기존 근로시간 그대로 가야 하는데 법이 바뀌어 지키기 어렵다’고 한다면 이것은 법의 정신은 아닌 것 같다”고 했지만, 기업들이 요구하는 탄력근로제 기간 확대가 연내 시행이 안 됐으니 처벌 유예기간을 연장해야 한다는 경영계의 목소리를 의식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7∼10월 고용노동부에 접수된 노동시간 단축 위반 관련 진정은 약 80건으로 평년과 큰 차이가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김유선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이사장은 “바꿀 때 바꿔야 기업들의 관성에 변화가 생기고 제도의 효과도 난다. 정부가 흐릿한 자세를 잡으니까 기존 관행을 안 바꿔도 되는 것 아니냐고 인식하게 된다”며 “(기업에) 기존 관행을 바꿔야 한다는 메시지를 줘야 한다”고 말했다. 강한수 건설노조 토목건축분과위원장도 “건설현장은 비교적 주 52시간 노동이 지켜지는 편이다. 문제는 정부가 명확하게 방향을 정리하고 가줘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니 기업에 ‘흐지부지될 수 있구나. (주 52시간 노동) 안 해도 되는 것 아니냐’는 희망을 심어주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

이승준 기자 gamja@hani.co.kr



독자 퍼스트 언론, 정기구독으로 응원하기!


전화신청▶ 1566-9595 (월납 가능)
인터넷신청▶ http://bit.ly/1HZ0DmD
카톡 선물하기▶ http://bit.ly/1UELpok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