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나는 싱가포르에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을 직접 만났다. 매우 생산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만남이었다. 우리는 한반도의 비핵화를 추구하는 것이 두 나라 모두의 이익이라는 데 동의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 9월25일 유엔 총회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어 “그 만남 이후 우리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거의 아무도 상상할 수 없던 여러 가지의 고무적인 조처들을 목격했다. 아직 할 일이 많이 남았지만, 김정은 위원장의 용기와 그가 취한 조처들에 감사한다”고 덧붙였다. 1년은 얼마나 긴 세월인가?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해 유엔 총회 연설에서 ‘북한 완전 파괴’ 발언을 해 ‘한반도 위기설’을 극한까지 끌어올렸다.
트럼프도 문재인도 격세지감“지난 1년 한반도에선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다. 역사상 처음으로 북한의 지도자가 군사분계선을 넘어 판문점에 내려왔다. 싱가포르 센토사섬에선 역사적인 북-미 정상회담이 열렸다.”
9월26일 유엔 총회 연설에 나선 문재인 대통령의 모습도 1년 전과 크게 달라졌다. 말투뿐이 아니었다. 연설문 내용도 1년 전과 견주기 어려울 정도다. 문장마다 정세를 주도하고 있다는 자신감이 묻어났지만, 여느 때처럼 공은 남에게 돌렸다. 문 대통령은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은 평화를 바라는 세계인에게 감동과 희망을 주었다”며 “한반도와 북-미 관계에서 새로운 시대를 만들고 있는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의 용기와 결단에 경의와 감사를 표한다”고 강조했다.
“나는 전쟁 중에 피란지에서 태어났다. 내전이면서 국제전이기도 했던 그 전쟁은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파괴했다. 3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고, 목숨을 건진 사람들도 온전한 삶은 빼앗겼다. …그 전쟁은 아직 완전히 끝나지 않았다. 세계적 냉전 구조의 산물이었던 그 전쟁은 냉전이 해체된 이후에도, 정전협정이 체결되고 64년이 지난 지금에도, 불안정한 정전체제와 동북아의 마지막 냉전 질서로 남아 있다. 북한 핵과 미사일 문제로 동북아의 긴장이 고조될수록 전쟁의 기억과 상처는 뚜렷해지고 평화를 갈망하는 심장은 고통스럽게 박동치는 곳, 그곳이 2017년 9월, 오늘의 한반도 대한민국이다.”
지난해 9월21일 문재인 대통령의 유엔 총회 연설에선 절박함이 느껴졌다. 문 대통령은 ‘평화’와 ‘촛불’을 열쇳말 삼아, 한반도 긴장 국면이 우발적인 군사적 충돌로 이어져선 안 된다는 점을 여러 차례 강조했다. 문 대통령이 연설문에서 ‘평화’란 단어를 무려 30번이나 언급할 정도로 당시 정세가 급박했던 탓이다. 문 대통령은 “민주주의 위기 앞에서 대한민국 국민들이 들었던 촛불처럼, 평화의 위기 앞에서 평창이 평화의 빛을 밝히는 촛불이 될 것이라고 믿고 있다. 여러분과 유엔이 촛불이 되어달라”고 호소했다. 1년은 얼마나 긴 세월인가?
문 대통령은 지난해 연설에서 “평창이 또 하나의 촛불이 되기를 염원한다”고 말했다. 실제 남과 북은 2018년 2월 평창겨울올림픽을 지렛대 삼아 한반도 정세의 불안정성을 걷어내고, 평화와 화해로 나아가는 문을 열었다.
읍소에서 자신감으로이후 이어진 남북 정상회담 세 차례와 북-미 정상회담 한 차례를 통해 남북관계도, 북-미 관계도 전에 경험하지 못한 단계로 접어들었다. 지난해 문 대통령 연설에서 등장했던 ‘염원’과 ‘갈망’ 등의 표현이 올해 연설에선 ‘기대’와 ‘확신’으로 탈바꿈한 것도 역시 바뀐 정세의 힘이다. 문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한반도는 65년 동안 정전 상황이다. 전쟁 종식은 매우 절실하다. 평화체제로 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다. 앞으로 비핵화를 위한 과감한 조처들이 관련국 사이에서 실행되고 종전선언으로 이어질 것을 기대한다. 어려운 일이 따를지라도 남·북·미는 정상들의 상호 신뢰를 바탕으로 한 걸음씩 평화에 다가설 것이다. …국제사회가 길을 열어준다면, 북한이 평화와 번영을 향한 발걸음을 멈추지 않으리라 확신한다.”
북-미 협상이 다시 본궤도에 오른 만큼, 이제 미래를 향한 비전을 말해도 좋겠다. 지난해 연설에서도 문 대통령은 북핵 문제 해결 원칙으로 ‘다자주의’를 강조했다. 문 대통령은 “북핵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선 유엔 헌장이 말하고 있는 안보 공동체의 기본 정신이 한반도와 동북아에서도 구현돼야 한다”며 “동북아 안보의 기본 축과 다자주의가 지혜롭게 결합돼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다자주의 대화를 통해 세계 평화를 실현하고자 하는 유엔 정신이 가장 절박하게 요청되는 곳이 바로 한반도”라고 강조했다.
달라진 정세에 힘입어 올해 연설에선 좀더 나아갔다. 문 대통령은 연설에서 “한반도의 비핵화와 평화 정착 과정은 동북아 평화와 협력 질서를 만들어가는 과정”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동북아는 세계 인구의 5분의 1이 살고, 세계경제의 4분의 1을 떠받치고 있는 지역이지만, 갈등으로 인해 더 큰 협력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며 “한반도에서부터 동북아의 갈등을 풀어나가겠다”고 덧붙였다.
봄에 판문점에서 처음 만난 남과 북은 가을에 평양에서 다시 만났다. 판문점선언에 이어 평양선언까지, 남과 북은 이미 합의사항 이행에 들어갔다. 비무장지대에서 지뢰를 제거하고, 끊어진 철도와 도로를 연결하기 위한 준비도 시작됐다. 북-미 협상의 끝자락에 한반도 비핵화 완성과 평화체제가 놓여 있다. 그리로 가는 길에 숱한 어려움을 만나게 될 게다. 마침내 목적지에 닿았을 때, 우리는 어떤 세상을 꿈꿀 수 있을까?
한반도의 미래문 대통령은 지난 광복절 연설에서 제안했던 동북아 6개국과 미국이 함께하는 ‘동아시아철도공동체’를 다시 꺼내들었다. 1년은 얼마나 긴 세월인가? “오늘의 유럽연합(EU)을 만든 ‘유럽석탄철강공동체’가 살아 있는 선례다. ‘동아시아철도공동체’는 향후 동아시아 에너지공동체와 경제공동체, 더 나아가 동북아 다자평화안보체제로 이어지는 출발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전화신청▶ 1566-9595 (월납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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