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과 북이 ‘9월 평양공동선언’으로 다시 물꼬를 튼 북-미 협상이 예상보다 빠르게 흘러가고 있다. 미국 국무부는 10월3일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이 네 번째 방북(10월7일) 계획을 발표하면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면담 일정까지 공개했다. 지난 8월 예고한 네 번째 방북을 ‘비핵화 진전이 더디다’는 이유로 갑자기 취소했던 점에 비춰, 폼페이오 장관의 방북 계획 자체가 ‘의미 있는 진전’이라는 말과 같다. 이번 방북길엔 김 위원장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두 번째 북-미 정상회담도 논의될 게다. 지금부터가 중요하다.
3년1개월여 전쟁까지 벌인 사이다. 화해로 가는 지름길은 없다. 폼페이오 장관의 네 번째 방북을 앞두고 잠시 숨을 고를 필요가 있다. 최근 북한이 관영매체를 통해 내놓은 두 가지 입장에 관심이 가는 것도 이 때문이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폼페이오 4차 방북, 북한의 변화</font></font>“최근 미국의 이른바 조선 문제 전문가들 속에서 미국이 종전선언에 응해주는 대가로 북조선으로부터 핵 계획 신고와 검증은 물론 영변 핵시설 폐기나 미사일 시설 폐기 등을 받아내야 한다는 황당무계하기 짝이 없는 궤변들이 나오고 있다.”
폼페이오 장관의 방북 계획이 발표되기 전날인 10월2일 은 ‘종전은 누가 누구에게 주는 선사품이 아니다’란 제목의 논평을 내어 이렇게 주장했다. 통신은 논평에서 “종전은 정전협정에 따라 이미 반세기 전에 해결됐어야 할 문제로서, 미국도 공약한 새로운 조(북)-미 관계 수립과 조선(한)반도의 평화체제 수립을 위한 가장 기초적이고 선차적인 공정”이라고 강조했다. 논평은 이렇게 이어진다.
“조-미가 6·12 조-미 공동성명에 따라 새로운 관계 수립을 지향해나가는 때에 조-미 사이의 교전관계에 종지부를 찍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미국이 종전을 바라지 않는다면 우리도 구태여 이에 연연하지 않을 것이다. …그 누구든 진정으로 조선반도의 핵문제 해결에 관심이 있다면, 조선반도 핵문제 발생의 역사적 근원과 그 본질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가지고 문제 해결에 임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폼페이오 장관 방북 계획이 발표된 다음날인 10월4일엔 이 나섰다. 신문은 ‘스스로 제 앞길에 장애를 조성하는 자가당착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논평에서 “비유하여 말한다면, 비핵화는 신뢰 구축을 영양분으로 하여 자라는 조-미 관계 개선이라는 나무에 달리는 열매라고 할 수 있다”며 “신뢰 구축과 관계 개선은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비핵화 조처를 요구하는 것은 농사도 짓지 않고 열매를 거두겠다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주장했다. 신문은 이렇게 덧붙였다.
“가장 극단적인 적대관계에 놓여 있던 조-미 사이에 협력관계가 이뤄진다는 것은 사실상 기적 같은 일로서, 그 자체가 쌍방이 지난 시기의 관행과 타성에서 완전히 벗어나 신뢰 구축에 전력을 다할 것을 요구한다. 그런데 상대의 적극적인 움직임에 아무런 화답도 없이 오히려 ‘지속적인 제재 유지’라는 신중치 못한 발언으로 자극만 한다면 그것을 놓고 어떻게 대화 의지, 관계 개선 의지가 있다고 볼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개혁·개방을 위한 조건 </font></font>6·12 싱가포르 정상회담에서 합의한 공동성명에서 북-미는 크게 3가지 원칙을 제시했다. 첫째, 한반도 긴장의 원인인 적대의 역사를 청산하고 새로운 북-미 관계로 나아가기로 했다. 둘째, 한반도의 공고한 평화체제를 구축하기로 했다. 셋째,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를 실현하기로 했다. 이 세 가지의 전제는 신뢰다. 은 “기회는 아무 때나 오는 것이 아니다”라며 이렇게 강조했다.
“우리가 제재에 못 견디어 대화에 나왔다고 하는 미 고위 정객들의 사고는 더욱 아연함을 금할 수 없게 하고 있다. 미국의 대조선 제재는 어제, 오늘이 아니라 장장 70여 년이나 지속되어왔다. …제재 문제로 말하면 조-미 협상의 진전과 조선반도 비핵화를 바라는 미국이 알아서 스스로 처리해야 할 일이다. 미국이 제재로 얻을 것은 하나도 없으며 불리해질 것은 다름아닌 그들 자신이다. 이것이 바로 제재 문제에 대한 우리의 원칙적 입장이다.”
과 의 논평은 리용호 북한 외무상이 9월29일 유엔 총회 연설에서 싱가포르 북-미 공동성명 이행을 강조하며 내놓은 발언과 정확히 맥을 같이한다. 대미 협상에 임하는 북쪽의 공식적 입장으로 봐도 좋겠다. 특히 ‘미국이 바라지 않는다면 우리도 연연하지 않을 것’(종전선언)이라거나, ‘미국이 알아서 스스로 처리애햐 할 일’(제재)이라고 언급한 것은 눈여겨볼 만하다. 협상에 앞서 원칙을 강조하면서도, 이를 이유로 협상을 엎지는 않을 것임을 내비친 셈이다. 다시 평양을 향하는 폼페이오 장관은 이에 호응할 준비가 돼 있을까?
‘김정은의 북한’은 ‘김정일의 북한’과 다르다. 북한은 4·27 남북 정상회담을 일주일 앞둔 지난 4월20일, 노동당 제7기 중앙위원회 3차 전원회의를 통해 ‘돌이킬 수 없는 방식’으로 비핵화와 개혁·개방을 안팎에 선언했다. 북한이 이미 완성했다는 ‘국가 핵무력’을 내려놓기 위해선, 김정은 위원장의 표현처럼 “핵무기도 핵위협도 없는 한반도”가 만들어져야 한다. 북한이 느끼는 ‘미국의 핵위협’이 사라져야, 북한의 비핵화도 가능하다는 말이다.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체제는 북한 개혁·개방의 전제이기도 하다.
“북한 쪽이 IMF(국제통화기금)와 세계은행 등 국제기구 가입을 통해 개혁·개방을 추진할 의지가 있음을 확인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9월25일 미국외교협회(CFR)와 아시아소사이어티 등이 공동 주최한 토론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적대관계 청산과 대미관계 정상화를 통한 국제금융기구 가입은 개혁·개방으로 가는 유일한 통로다. 앞서 개혁·개방으로 나아갔던 중국과 베트남의 사례가 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1970년대 초반부터 미국과 관계 정상화를 추진하기 시작한 중국은 1978년 12월 공산당 제11기 중앙위원회 제3차 회의(11기 3중전회)에서 개혁·개방을 공식화했다. 이어 1979년 3월 미국과 대사급 외교관계를 맺었고, 이듬해인 1980년 4월17일 IMF 회원국 지위를 대만으로부터 되찾았다.
베트남의 경로도 엇비슷하다. 전쟁으로 끊겼던 미국과 베트남의 외교관계는 베트남의 개혁·개방과 함께 복원의 길로 접어들었다. 베트남은 1986년 12월 제6차 공산당 대회에서 ‘새롭게 한다, 쇄신한다’는 뜻을 지닌 도이머이 정책을 채택하고, 본격적인 개혁·개방의 길로 나아갔다. 베트남과 미국은 1990년 초부터 외교관계 복원 노력에 들어가, 1995년 대사급 외교관계를 부활시켰다. 이후에야 베트남은 IMF를 통해 개혁·개방의 종잣돈을 조달할 수 있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1997년에 IMF 접촉 </font></font>북한은 과거에도 국제 금융기구 참여로 개혁·개방을 모색한 바 있다. 가장 적극적이었던 때는 아시아개발은행(ADB) 개발을 추진한 1997년 4월이다. 미국과 일본의 반대로 무위에 그쳤지만, 이 과정에서 유엔 주재 북한대사관과 IMF 쪽이 접촉했다. 이를 통해 IMF는 그해 9월6일 마거릿 켈리 아시아·태평양 담당 선임보좌관을 비롯한 대표단 3명을 평양에 파견하기도 했다. 당시 대표단을 만난 북한 쪽은 개혁·개방에 필요한 자금·기술·인력을 지원받기 위해 IMF 가입을 강력히 희망한다는 뜻을 밝힌 것으로 전해진다. 사상 첫 남북 정상회담에 이어 북-미 관계가 급진전하면서 찾아왔던 ‘역사적 기회’는 조지 부시 행정부 출범과 함께 사라졌다.
비핵화와 북-미 관계 정상화로 가는 길도 멀지만, IMF 가입과 개혁·개방 추진으로 가는 길도 험난하다. 북한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긴 기간 미국의 봉쇄에 시달렸던 쿠바 사례가 이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브루노 로드리게스 쿠바 외교장관은 2013년 10월 유엔 총회에 참석해 “미국의 반세기 이상 이어진 봉쇄 조처로 인한 경제적 손실은 1조1260억달러에 이른다”고 주장했다.
미국과 쿠바의 악연은 1959년 1월1일 피델 카스트로가 이끄는 혁명군이 아바나에 입성하면서 시작됐다. 혁명정부는 이듬해인 1960년 미국계 기업과 은행을 비롯한 자국 주재 국외 자산 몰수를 선언했다. 미국은 1961년 4월17일 카스트로 정권 전복을 목표로 중앙정보국이 훈련한 쿠바 망명자 1400명을 투입한 피그만 침공으로 응수했다. 케네디 행정부가 쿠바 전면 봉쇄 정책을 발표한 것은 1962년 2월7일이다.
지미 카터 행정부(1977~80년) 시절 잠시 훈풍이 불기도 했다. 두 나라는 외교관계 복원을 위한 초기 단계로 미국은 아바나 주재 스위스 대사관에, 쿠바는 워싱턴 주재 체코슬로바키아 대사관에 각각 이익대표부를 설치했다. 하지만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 들어 양국 관계가 다시 어긋나면서, 미국은 1982년 3월 쿠바를 테러지원국으로 지정하는 등 경제제재를 더욱 강화했다.
2008년 2월 피델 카스트로가 동생 라울에게 국가평의회 의장직을 넘긴 이후 쿠바의 개혁·개방 정책이 본격화했다. 때맞춰 등장한 버락 오바마 행정부는 쿠바 여행 제한을 일부 해제하고, 쿠바계 미국인이 본국으로 제한 없이 송금할 수 있도록 했다. 2014년엔 오바마 대통령과 라울 카스트로 국가평의회 의장이 외교관계 복원에 착수할 것임을 공식화했다.
미 국무부는 2015년 5월29일 쿠바를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뺐고, 두 달여 뒤인 7월20일 마침내 두 나라는 대사급 외교관계를 복원했다. 이듬해인 2016년 3월21일 오바마 대통령은 미국 대통령으로는 90여 년 만에 처음으로 쿠바를 방문했다. 세상이 바뀐 듯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쿠바의 길을 가지 않으려면 </font></font>하지만 아니었다. 적대와 불신, 제재와 반목의 역사가 지나치게 길었다. 중국과 베트남에서 통했던 ‘공식’은 쿠바에선 들어맞지 않았다. 미국과 외교관계를 정상화했음에도 쿠바는 여전히 IMF에 가입하지 못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해 6월16일 쿠바에 대한 여행·사업 제한 조처를 부활시켰다. 두 나라는 여전히 온전한 화해를 하지 못했다. 쿠바와 긴밀한 관계를 이어온 북한도 이를 잘 알고 있을 터다. 지금부터가 중요하다. 서두르지 말아야 한다. 화해로 가는 지름길은 없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전화신청▶ 1566-9595 (월납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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