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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 관계 지속되면 위력도 지속적으로 작용”

‘안희정 1심 판결’에 관한 직장 성폭력 피해 여성 네 명의 대담…

“‘절대 을’ 위치에 있는 피해자 쉽게 ‘노’ 못해″
등록 2018-08-29 12:31 수정 2020-05-03 04:29
지난 8월18일 ‘제5차 성차별 성폭력 끝장집회’에 참가한 시민들이 안희정 전 충남지사와 사법부를 규탄하며 서울 종로구 신문로 서울역사박물관을 출발해 행진하고 있다. 한겨레 이정아 기자

지난 8월18일 ‘제5차 성차별 성폭력 끝장집회’에 참가한 시민들이 안희정 전 충남지사와 사법부를 규탄하며 서울 종로구 신문로 서울역사박물관을 출발해 행진하고 있다. 한겨레 이정아 기자

지난 8월22일 오후 서울 마포구 공덕동 회의실에 안희정 1심 판결과 관련해 ‘할 말 많은’ 여자 네 명이 모였다. 김선영(이하 모두 가명·28)씨는 대기업에 다니며 임원 술시중을 강요받다 퇴사했다. 대학원생 이진희(31)씨는 교수가 불러서 나간 술자리에서 원치 않는 신체 접촉을 당했다. 강민희(32)씨는 일본계 은행에서 술시중 강요를 받고 상사에게 성추행을 당했다. 박지수(33)씨는 상사와 단둘이 한 공간에서 일하는 작은 회사에 다니다 성추행을 당했다. 직장 내 성폭력 문제로 수년간 민형사 소송을 겪을 만큼 겪었고 이겨도 보고 져도 본 여성들의 경험은 특별했지만, ‘직장 여성 성폭력 수난사’와 맥을 같이한다는 점에서 상당한 보편성을 띠었다.

네 사람은 직장에서 ‘위력’에 의한 성폭력의 작동 원리와 피해자의 심리를 누구보다 잘 알고 공감할 수밖에 없는 처지다. 네 사람은 네 시간에 걸쳐 때론 안희정 사건을, 때론 자기 사건을 언급하며 열변을 토하고 서로 맞장구치다가 눈물을 터뜨리고 깔깔거리기를 반복했다. 안희정 사건을 언론으로만 봤기 때문에 유·무죄 자체에 대해서는 말을 아꼈지만, 1심 재판부의 주요 무죄 판단 근거에 대해서는 “위력에 의한 성폭력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며 여러 차례 핏대를 세우고 가슴을 쳤다.

“강제로 밀어붙이는 것만 위력이 아니에요”

‘위력이 존재하나 행사되지는 않았다’는 재판부의 판단을 어떻게 생각하세요?

박지수(이하 박) 판사님들이 종이로 보는 세상이랑 실제 세상은 달라요. 한국 사회의 성범죄 인식이 얼마나 바뀌었는데, 1990년대 개정된 법으로 판결하는 것부터가 구시대적이에요.

이진희(이하 이) 약자가 돼보지 못한 분들이라… 재판부가 위력의 뜻을 모르는 것 아닐까요. 위력은 점이 아니라 선이에요. 안희정이라는 사람이 피해자인 비서한테 어느 시점엔 위력 있고 어느 시점엔 위력이 없는 게 아니에요. 상하 관계가 지속되는 한 위력은 지속적으로 작용하고 계속 존재하는 거예요. 대선 캠프 때는 위력이 작용했을 수 있고, 충남도청에서는 위력이 작용할 수 없다는 것은 재판부가 너무 쓸데없는 해석을 한 것 같던데요.

강민희(이하 강) 권위나 권세 그 자체가 압력 행사가 되는 상황에서 ‘절대 을’의 위치에 있는 피해자가 쉽게 ‘노’라고 말할 수 있었을까 의문이 들어요. 외국계 은행에서 근무한 저도 상사가 회식에 참석할 것을 요구하고 술시중을 강요했을 때, 적극적으로 거절한다는 것은 불가능했거든요. 제대로 거절하거나 반항하지 못한 피해자의 잘못이 아니라, 직장 상사인 가해자가 어느 경우에도 절대로 상황을 성적인 분위기로 몰고 가지 말아야 했다는 점에 초점을 맞추어 재판부가 이 사건을 살펴봐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심지어 가해자는 한 나라의 대권 주자이자 도지사였어요.

김선영(이하 김) 내 인사권, 평가권을 다 쥔 사람이 부당한 요구를 해요. 이 직장을 잃으면 생계까지 영향을 받게 할 수 있는 그런 권력을 쥔 사람한테 ‘노’라고 말해버리면, 당장 다음날 제 업무에 혹은 평가에 혹은 사회생활 전반에 문제가 될 것 같다는 굉장히 큰 불안감과 두려움이 밀려와요. 그런 것까지 모두 감수하고, 피해자가 생업을 담보로 ‘노’라는 의사표현을 해야만 피해자로 인정해줄 수 있다는 건가요! 꼭 성적인 문제가 아니더라도 남자분들도 군대에서 회사에서, 물리력을 동원하지 않더라도 부당한 요구에 상명하복할 수밖에 없는 ‘위력’을 느껴본 적 있지 않나요?

재판부는 안희정 사건 피해자가 출장 때 지사 룸에 들어간 게 문제라고 판단했는데, 출장 가서 상사가 밤에 ‘보고서 마무리’ 좀더 해야 한다고 오라는데, “못 가요” 할 수 있나요? 상사가 오라고 지시하는 것 자체가 위력이에요. 꼭 소리를 지르고 밀치고 강제로 밀어붙이는 것만 위력이 아니거든요.

저는 술시중 회식에 가기 싫다고 말한 뒤부터 제가 결재받으러 가면, 상사가 “너 내 말 듣지도 않을 거면서 왜 나한테 결재받으러 오냐”고 비아냥댔어요.

추행하지 말라고 했더니, 다음날 바로 평소에 생전 안 하던 업무 질책을 하더라고요. 그 ‘느낌’이 있는데 법적으로 문제가 된 뒤에, 그럴 의도가 아니고 단순히 업무적으로 그런 거라잖아요.

그 인과관계를 설명할 방법이 없잖아요. 일 못해서 지적한 거지 성추행 거절해서가 아니라는데.

보통은 성추행을 당해도 찰나이고 놀라고 당황해서 “왜 이러시냐, 하지 마라!” 바로 얘기 못해요. 저도 일본인 출장자가 회식 끝나고 엉덩이를 더듬는데 말 못했어요. 생각할수록 기분이 나쁜 거예요.

저도 말 못하다가 퇴사하려고 하니까 그때부터 말이 술술 나오더라고요.

역시 내가 가진 걸 다 내려놔야 ‘노’가 가능해요.

바로 전 직장인 은행에서 신입 오제이티(OJT·직장 내 직원 교육훈련) 때 지점장 양옆에 저랑 다른 여직원을 앉히더라고요. 그날 손에 손잡고 회식했어요. 다들 즐거운 분위기인데 저는 충격과 공포였죠. 이틀 만에 퇴사했는데, 그때 바로 퇴사할 수 있었던 건 다른 회사에 합격한 상태였기 때문이에요. 다른 선택지가 있었기 때문이지, 그때랑 이번이랑 성적 자기결정권과 관련한 제 태도에 일관성이 없었던 게 아니에요.

재판부가 판단하는 피해자 같지 않은 행동

피해자는 피해를 당한 뒤 일상적인 업무를 수행했고 가해자나 동료들에게 별일 없는 듯 메시지를 남긴 기록도 있어요. 재판부는 이런 행동을 ‘피해자 같지 않은 행동’으로 판단했는데요.

모든 피해자가 각자 성격이 다르고 사람이 다 다른데 어떻게 똑같은 피해자 반응이 나오겠어요. 게다가 가해자의 위력이 작용되는 한 ‘괜찮은 척, 좋은 척’해야 하는 부분이 있어요. 그런데 ‘괜찮은 척했다’는 것이 가해자한테 유리한 증거로 작용해요.

재판부 판단대로 피해자가 피해 다음날 안희정이 좋아하는 순두부를 찾으러 다녔다고 쳐요. 그건 성폭력 피해자답지 않은 게 아니라 업무적으로 프로페셔널한 거예요. 저는 밤 11시10분에 택시 안에서 성추행당하고 다음날 아침에 출근했어요. 다른 팀원들 휴가라 가해자랑 둘만 일하는 날인데도, 제가 빠지면 업무가 안 돌아가니까 출근한 거예요. 경찰에 신고했더니 가해자 쪽에서 다음날 출근은 왜 했으며, 그날 왜 업무 다 처리하고 갔냐, 왜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자기랑 얘기했냐는 거예요.

저도 제 행동이 ‘피해자 행동이 아니었다’고 해서 어이가 없더라고요. 저랑 상사랑 둘이 일하는데, 불편한 관계에서 어떻게 일을 해요. 성추행을 당했어도 퇴사 전까지는 웃으면서 일하고 싶어서 업무적으로 좋게 좋게 대하려고 했던 건데. 가해자는 ‘추행’이 ‘스킨십’이었다고 진술했어요. 검사는 저한테 왜 거부 의사를 표현하지 않았는지 묻지도 않았어요. 몇 번 참다가 나중에 제가 “추행하지 마세요”라고 거부한 것은 인정도 안 됐어요. 가해자가 제출한 카카오톡 문자는 앞뒤 내용이 전혀 고려되지 않았는데, 검사가 ‘서로 친근했다’며 증거불충분으로 무혐의 처분했죠. 저는 사건 종결된 뒤 불기소사유서를 보고서야 그 사실을 알았어요. 가해자가 사과한 문자도 수없이 많았는데, 왜 가해자 진술만 듣고 피해자에게는 반박할 기회조차 안 준 건지 너무 억울해요.

사회적으로 피해자에게 완전무결이 요구되는 분위기라 피해자가 자기검열을 하다가 자포자기하게 돼요. 회식 자리에서 술시중드는 게 수치스러웠으면 즉시 불쾌감을 표현하거나, 그게 어려우면 따로 상사에게 고충을 털어놓거나, 다음 번엔 무슨 일이 있어도 따라가지 말았어야지 왜 상황을 여기까지 끌고 와서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느냐는 비난에 직면할 것 같은 생각이 들어요. 그런 ‘뒷담화’나 댓글을 너무 많이 봐서 학습효과가 생겨서 그래요. 저 역시 술시중 회식 때 찍은 기념사진에 웃고 있는 모습이 있었어요. 수치스러웠던 그날의 기억을 설명한들 제3자가 믿어줄까 싶은 걱정이 생겼어요.

피해 사실을 밝히는 순간 일단 ‘진짜 피해자 맞아?’ 의심부터 깔려요.

피해자가 증거 제출을 못하면 증거가 없어서 안 된대고, 피해자가 녹음·녹취록을 제출하면 ‘거봐 준비했네, 의도 있었네, 꽃뱀이네’ 식이에요.

피해자의 구체적 진술이 나중에 나왔다고 신빙성 없다고 하잖아요. 저도 소송 과정에 질문을 받으면서, 구체적 진술이 나중에 생각난 게 있었어요.

피해자도 처음엔 그게 결정적인 건지도 몰라요. 그러다 나중에 생각나서 말하면….

일관성 없다고 하죠. 불기소 되니까 없던 얘기 붙여서 거짓말한다고.

가해자를 제대로 수사하고 재판해야 하는데, 거꾸로 피해자 진술이 일관성 없고 행실이 어떻고 하면서 자꾸 피해자답지 못함을 강조해요. 그런데 왜 피해자 진술이 일관성 없다는 것은 결정적인 문제고, 가해자 진술이 일관성 없는 건 그렇게 관대하게 판단해주나요?

“성적 자기결정권, 피해자가 침해받지 말아야 할 권리”

피해자가 전문직이라 단기간에 쉽게 ‘그루밍’(길들이기)되기 어렵고, 성적 자기결정권을 스스로 행사할 수 있었다는 판단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여기 계신 분들 다 전문직이고, 이른바 명문대 나오시고 유학 다녀오신 분도 있는데….

아니 재판부는, 고학력에 대통령까지 하시겠다는 분이 상대방 의사도 안 묻고 성폭력 저지른 것을 물어야지, 왜 피해자가 성적 자기결정권이 있었네 없었네를 물어요!

성적 자기결정권은 피해자가 행사해야 하는 권리가 아니라 침해받지 말아야 할 권리예요. 안희정 사건의 경우 위력이 작용하는 상황에서 피해자가 성폭행을 당해 이 권리를 침해당했다고 피해를 호소하고 있잖아요. 피해자가 없던 일을 만들어낸 것이 아닌 이상, 직원을 간음의 대상으로 삼는 비상식적이고 폭력적인 선택을 한 상대방에게 엄중한 책임을 물어야 해요. 판결은 시대를 반영하고 판례는 사회를 바꾼다고 생각해요. 법원의 현명한 판단을 기대해요.

고학력 전문직 여성들은 많이 배웠기 때문에 잃을 게 너무 많아서 오히려 더 ‘노’를 못하는 경우도 많아요. 이 직장, 이 커리어를 만들려고 너무 많은 ‘인풋’(투입)이 됐고, 내가 ‘노’라고 하는 순간 다 빼앗길 것 같은 두려움이 컸어요. 싫다는 말을 하기가 굉장히 힘들더라고요. 게다가 안희정 사건 피해자의 경우, 안희정에 대한 나쁜 말을 했을 때 안희정만 타격을 받는 게 아니잖아요. 피해자 커리어뿐만 아니라 함께 일하던 동료들의 커리어도 망가지죠. 동료들에게 피해를 준다는 생각이 분명히 들었을 텐데, 정상적인 직장인이 거기서 어떻게 안희정에 대해 나쁜 말을 할 수 있어요. 생업을 포기하겠다고 결심하기 전엔 어려운 일이에요. 저도 술시중이 팀 전체의 문제여서 분위기 망치기 싫어서 나갔는데… 나중에 ‘너도 좋아서 갔으면서’라는 얘기가 들리더라고요. 머리끄덩이 잡혀서(위력 행사로) 끌려나간 게 아니라는 거죠.

“네가 못 가겠다고 했으면 안 데려갔을 텐데”라는 식이에요. 저희 은행 경영진도 여직원들을 술시중에 데려가고 좌석배치표까지 만들었으면서, 강요한 적 없다며 “자의적으로 갔다”고 발뺌하더라고요.

바로 그게 위력이에요. 거절 못할 거 알고 데려간 것.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도 위력

피해자로서 소송 과정에서 법률이나 법률 전문가들의 문제점을 느끼신 적이 있나요?

회사 감사 때 피해자 조사가 아니라 가해자 인터뷰를 하더라고요. 가해자가 기억 안 난다고 하니까 감사 종결. ‘이 회사에 날 도와줄 사람 하나도 없네’ 그러면서 퇴사했어요. 회사 상대로 소송하려고 변호사를 만났는데 변호사들도 “도움 못 준다, 상대방이 대기업이고 우리 로펌과 관계가 있어서 나쁜 관계 만들 수 없다”고 했어요. 변호사들이 맨날 하는 말이 이거잖아요. “증거 있어요? 녹취 있어요? 증인 세울 수 있어요?”

일동 맞아, 맞아.

대부분 피해자가 처음 겪는 일이라 어떤 행동도 못하고 증거를 못 남겨요. 변호사들은 “무고죄로 역고소당한다. 치료받고 조용히 삭이시라”고 해요.

저는 대형 로펌이 회사 쪽 법률대리를 맡았어요. 제가 병원에 있을 때 회사 쪽 변호사가 아버지한테 전화로 협박했어요. 제가 여성계에서 굉장히 유명한 변호사를 찾아갔는데, 법조계가 좁아서 이미 회사 쪽 담당 변호사가 누군지도 다 알더라고요. “그 변호사님이요? 절대로 그럴 리(협박) 없는 분”이라는 식이에요. 그러는데 어떻게 제 일을 맡겨요. “그냥 똥 밟았다고 생각하라”며 잡사건으로 보더라고요. 변호사들이 “저도 사회생활 많이 해봤는데, 툭툭 털고 일어나라”면서 오히려 조언인 듯한 상처를 줘요.

변호사가 “술자리 가라고 때렸어요? 폭행당했나요? 직원들 보는 앞에서 수치심 일으킬 수 있는 모욕적인 욕설이나 소리 지름이 동반되었나요?”라고 묻더라고요. 셋 다 아니고 가해자가 이런저런 말을 했다고 하니 “피해자분한테는 굉장히 큰일일 수 있지만 입증되기 어렵다”며 “웬만하면 상담치료 받으시고 새로운 직장을 얻으시라”고….

수사나 재판 과정에서 제가 낸 증거는 증거가 아니에요. 증인이 말 바꾼 부분이 있어서 재판부에 전화통화 기록 좀 확인해달라고까지 했는데 안 해주시더라고요.

1차 성폭력도 권력이 작용하고, 2차적으로 수사기관과 법정에서도 권력이 작용해요.

위력에 의한 성폭력 특징이에요. 위력에 의해 성폭력을 당해서 갔는데 수사와 재판 과정에 또 위력이 있어요. 고위직 가해자들의 말은 일단 신뢰해요.

변호사나 검찰의 논리는 이 정도 추행은 인정받은 판례가 없다는 거예요. 아니, 법률 전문가라면 새로운 판례를 만들어야지, 앞선 판례가 없어서 피해자만 다칠 거라며 피해자를 움츠러들게 하는 게 말이 되나요.

안희정 사건은 굉장히 큰 사건이고 앞으로 다른 사건들의 중요한 판단 기준이 되고 좋은 선례가 되어야만 하는 사건인데, 지금도 분명히 굉장히 많은 분이 권력형 성폭력을 당하실 텐데 ‘용기 내려다가 괜히 나도 이 꼴 나겠다’ 하며 꾹 참게 되겠죠.

가해자들에겐 ‘이래도 되네’ 학습효과가 생기겠죠. 이번 기회에 위력에 의한 성폭력 뿌리를 뽑아줘야 하는데 가지를 쳐준 셈이에요. 피해자가 지나온 인생, 지금 인생은 물론 앞으로의 인생까지 걸고 문제제기한 그 용기를 판사님들이 무력화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피해자들 향한 의혹의 시선
지난 8월14일 서울 마포구 서울서부지법에서 열린 1심 선고공판에서 안희정 전 충남지사가 위력에 의한 간음 등 10개 혐의에 모두 무죄를 선고받자, 여성단체 회원들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 한겨레 김성광 기자

지난 8월14일 서울 마포구 서울서부지법에서 열린 1심 선고공판에서 안희정 전 충남지사가 위력에 의한 간음 등 10개 혐의에 모두 무죄를 선고받자, 여성단체 회원들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 한겨레 김성광 기자

위력에 의한 성폭력 피해자들에게 ‘꽃뱀’이라거나 ‘음모’가 있다는 의혹의 시선이 있기도 하잖아요.

유학 다녀와서 취업 3일 만에 스킨십이 시작됐어요. 마우스를 쓰는데 제 손 위에 가해자가 손을 올리면 이론적으론 성추행인 거 알아요. 하지만 막상 제가 당하고 보니 ‘격려인가? 성추행인가?’ 헷갈리고, 나쁜 사람으로 보기 싫어서 ‘격려겠지’ 참게 되더라고요. 참았더니 점점 더 심한 성추행이 쌓이고요. 누구한테 얘기했다가 제가 예민하다는 얘기를 듣는 순간 돌이킬 수 없으니까 말도 안 하게 되고. 가해자가 저한테 무릎 꿇고 울면서 미안하다고 사과까지 했는데, 형사고소했다가 무혐의 처분됐어요. 근데 올해 #미투 운동으로 인터넷에 제 이야기를 적었거든요. 다른 피해자들한테, 성추행당한 것도 어이없지만 형사고소 과정에서 편파 수사를 받을 수 있고 결과도 안 좋을 수 있다는 걸 알리려고요. 그런데 가해자가 그 글을 봤나봐요. 허위사실 유포라면서 저한테 2천만원을 청구했어요. 민사 소장 받아보면 아시겠지만, 엄청난 게 집으로 와요. 소장 보니까 근무할 때 사이좋게 카카오톡으로 대화하고 그러지 않았냐, 제가 마치 꽃뱀인 것처럼.

그 얘기 꼭 나와요. 아니, 그럼 회사에서 웃으면서 일하지 화내면서 일해요? (일동 웃음)

나는 성추행을 당한 것이 맞는데 입증할 증거도 많이 있었는데, 민사 소장에는 유부남이지만 둘이 감정적으로나마 사귀었다고, 제가 더 적극적이었다고. ‘꽃뱀’이라고 안 적혀 있지만 꽃뱀을 풀어서 쓴 말이 있더라고요. ‘아… 나 꽃뱀 됐구나….’ 제 어머니 문자에 죄송하다고 하고 저에게는 무릎을 꿇고 울면서 살려달라고 사과한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기가 막히는 내용을 한줄 한줄 읽으면서 심장과 손이 떨렸어요.

박지수님이 아까 얘기하신 거요. 처음에 손, 그다음에 어깨, 그러다가 어느 순간 결정적인 것까지 가는데, 안희정 사건 보면 스킨십이 계속적으로 있었다고, 그러니까 기습 추행으로 보기 어렵다고… 무죄… 하….

피해자가 싫다고 표현할 기회가 있었는데 안 했다고 하잖아요. 피해자가 모든 것을 내려놓고 피해 사실을 고백한 게 바로 저항이에요. 성추행·성폭행 당시 왜 저항을 안 했느냐고 물을 게 아니라, 고백하고 신고한 것 자체가 큰 저항이에요. 포도알을 보지 말고 포도를 봐달라고요.

안희정 사건 피해자가 이혼을 했다는 이유로 더 험한 말이 많았어요.

저는 완전히 다르게 생각해요. 피해자는 이혼을 해서 더 절실하게 일했다고 생각해요. 이 일을 잃을까봐 두려워서. 안희정 사건 피해자를 뒤에서 조종하는 다른 권력이 있다는 음모론도 있던데, 피해자 뒤에 정말 그 정도 힘이 있으면 그런 일을 왜 당했겠어요. 저는 가해자 처벌도 싫고 공론화도 싫고, 사람들한테 잊히고 싶어서 “아프다” 그러고 조용히 퇴사했어요. 내부고발자가 언론에 제보해서 마치 제가 제보한 것처럼 보도가 됐고, 공론화당한 경우예요. 그런데도 “회사에서 뭘 얻어내려고 제보했다” “다른 쪽에서 수주 받아서 자기 키워준 임원 밥줄 끊은 제보녀” 등 별 얘기가 다 있었어요. 안 보고 싶은데, 굳이 갈무리해서 보내주는 지인들도 있고요. (일동 웃음) 저 퇴사 전 한동안 구내식당도 못 갔던 사람이에요. 대인기피증 기본이에요. 제가 뭘 얻자고…. 피해자의 피해 상황에는 관심이 없고 ‘왜 폭로했을까?’ 그 목적에만 관심을 둬요. 피해에 대한 감정적 공감이 1%도 없는 무신경이에요.

피해 폭로 이후 다들 이렇게 힘드신데, 굳이 문제제기를 하신 이유가 있을까요?

문제제기를 한 이후에 회사 문화 자체가 굉장히 많이 바뀌었어요. 성폭력 예방 가이드라인도 만들고, 술시중도 없어지고, 회식도 크게 공지된 회식 외엔 안 한대요. 큰 소득이라 생각하고, 제가 처음부터 바랐던 거예요. 소송 시작한 김에 회식 때 자리 배치하고 술시중들게 하는 것이 성희롱이라는 판례도 받아내고 싶었어요.

저는 증거불충분으로 혐의 없음이 됐지만, 제가 가해자를 고소했던 기록이 또 다른 피해자에겐 큰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해요. 제 경우 불기소였지만 다른 피해자가 생기면 제 사례가 그분들께 유리하게 작용했으면 좋겠어요.

“1인시위 할 때 ‘내가 이겼다’ 싶었어요”

저는 “나한테 사과하고 다른 학생한테는 그러지 마” 정말 이 뜻이었는데 (가해자가) 사과를 안 하니까 여기까지 온 거예요. 피해자들이 싸워도 질 것 같으니까 싸움을 안 하고 사건을 알아서 숨겨줘요. 저는 평생 피해자로 살기 싫은 거예요. 그래서 손팻말 만들고 1인시위 했어요. 손팻말 들고 서는 순간 ‘내가 이겼다’ 싶었어요. 제가 학사모 대신 밀짚모자 쓰고 1인시위 할 때 엄마가 그 앞에 서 계셨어요. 벤치에 앉으시라고 했더니 “네가 서 있는데 내가 어떻게 앉아 있느냐”고…. (일동 눈물) 피해 사실 알렸다고 휴학 승인도 안 해주고 지도교수도 안 바꿔주던 학교에서 1인시위 하고 3일 만에 지도교수를 변경해주더라고요. 잃어버린 학습권을 되찾고 재발 방지를 위해 했던 시위 덕에 무고와 명예훼손 고소를 얻기는 했지만, (일동 웃음) 지금은 웃으면서 얘기할 수 있어요. 안희정 사건 피해자분께도 말씀드리고 싶어요. 지금 저희가 함께 걷고 있는 어두운 길의 끝은 동굴이 아닌 터널일 거예요. 터널 끝, 빛이 보이는 그날까지 우리 힘내요.

사회·정리 전정윤 기자 ggu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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