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좌제. 죄를 지은 당사자뿐 아니라 가족·친지까지 함께 벌주는 제도다. 지배자 처지에선 연좌제가 아주 효율적이다. 자신이 직접 나서지 않아도, 피지배자들이 가까이 있는 사람을 의심하고 감시하게 만든다. 피지배자는 주변에 폐를 끼치는 게 두려워 행동을 망설이게 된다.
대한항공엔 얼마 전까지 ‘팀 연좌제’가 있었다. 누군가 산업재해보상보험을 신청했을 때 본인뿐 아니라 함께 일하는 팀원 10~15명의 인사평가 점수가 함께 깎였다. 팀에서 한 명이라도 산재 신청자가 나오면 팀원 모두의 진급과 호봉 승급이 어려워졌다.
그런데 산재 신청은 죄가 아니다. 노동자의 정당한 권리다. 일하다 다치거나 병든 노동자라면 누구든 자유롭게 근로복지공단에 보험급여를 신청할 수 있고, 이를 승인받으면 요양비와 치료비를 받으며 쉴 수 있다. 거꾸로 산재 신청자에게 불이익을 주는 게 죄다. 하지만 대한항공은 법의 처벌 규정이 미비하다는 점을 악용해 공식적으로 산재 불이익을 줬다. ‘산재 은폐 공화국’인 대한민국의 민낯을 잘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취재 결과, 대한항공이 과거 산재보험을 신청한 직원과 해당 직원이 속한 팀에 인사상 불이익을 준 사실이 내부 문건으로 드러났다. 업무 중 다쳐도 산재 대신 개인 휴가, 병가, 휴직을 쓸 수밖에 없었다는 직원들의 말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증거다. 또한 현재까지 산재 불이익이 이어지고 있다는 증언도 나왔다. 조직적 산재 은폐는 형사처분 대상으로 볼 수 있다는 지적이 뒤따른다.
산재 신청하면 팀 전체 불이익
이번에 입수한 증거 자료는 2015년 이전 대한항공이 사내 인사평가시스템(KALPAS)과 온라인 게시판에 공지한 내용 중 직원들이 갈무리(캡처)해 보관한 일부다. 2주 전 대한항공 객실승무원으로 일하다 백혈병에 걸린 K씨의 이야기(제1216호 표지이야기 ‘KAL의 황유미’ 참조)가 보도된 뒤 제보가 여러 건 들어왔다.
주목해서 볼 점은 개인과 팀 성과평가 기준표에 각각 ‘공상/산재 실적’이 포함된 점이다. 공상은 산재 대신 그에 준하는 요양비·치료비를 회사가 사적으로 보상하는 제도다. 대한항공은 노동자가 공상/산재를 사용한 횟수와 기간에 따라 평가점수를 달리했다.
한 예로 2011년 개인 성과평가 기준표를 보면 ‘비행손실 방지(25)’ 항목의 세부 항목으로 ‘공상/산재 실적(10)’이 있다. 괄호 안의 숫자는 해당 항목에 배당된 점수다. “평가 기간 중 본인의 공상/산재 발생 실적에 의거 산정”이라고 적힌 안내문 밑에는 표가 있다. “12(S):발생 건수 0건, 10(A):발생 건수 1건, 발생 일수 30일 미만의 공상, 8(B):발생 건수 1건, 발생 일수 30일 이상의 공상, 6(C):발생 건수 1건, 발생 일수 30일 이상의 산재, 4(D):발생 건수 2건 이상”.
개인 성과평가 총점 100점 중 산재 1건으로 깎이는 점수는 6점에 불과하지만 그 차이는 크다. 대한항공에서 30년간 객실승무원으로 일하며 라인팀장(중간관리자)을 맡았던 ㄱ씨는 6월 초 과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산재/공상으로 깎이는 점수는 인사에 거의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다. 승무원은 업무의 질을 정량화하기 힘든 탓에 주로 고객 불만·칭송과 근태관리에서 점수가 갈린다. 5점 깎이면 다른 데서 아무리 잘해도 뒤집기 힘들다. 사실상 진급이나 호봉 승급이 어려워진다.”
진급이나 호봉 승급 어려워져
팀 성과평가에도 산재/공상 실적이 있었다. 2013년 팀 성과평가 기준표를 보면 ‘공상/산재’의 비중은 10점이고 “평가 기간 중 전 팀원(R/S 포함)의 공상/산재 발생 실적에 의거 절대평가”라고 적혀 있다. 역시 산재 발생 횟수와 기간에 따라 평가점수가 달라졌다. “12(S):발생 건수 0건, 10(A):발생 건수 1건(발생 일수 30일 미만), 8(B):발생 건수 1건(발생 일수 30일 이상), 6(C):발생 건수 2건, 4(D):발생 건수 3건, ※발생 건수 4건 이상은 0점 처리.”
팀 점수는 팀원 개개인의 성과평가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 한 예로 라인팀장의 경우, 개인 성과평가 중 팀 점수가 차지하는 비중이 45%에 이른다. 이 만난 대한항공 직원들은 “팀 점수가 깎여서 산재보험을 거의 신청할 수 없었다”고 입을 모았다. 객실승무원 ㄴ씨는 딱딱하고 미끄러운 업무용 하이힐의 영향으로 여러 번 발을 다쳤다. 하지만 병가나 병휴(휴가)로 쉰 적이 있다. “산재를 썼을 때 내 점수만 깎이면 괜찮은데, 모든 팀원에게 피해를 주는 게 무섭죠. ‘너 때문에 진급 못했다’ 원성이 돌아오는 게 싫어 휴가를 썼어요.” 물론 치료비는 자신이 부담했다.
인턴과 낮은 연차 승무원들은 더욱 산재를 쓰기 힘들다. B씨는 “다쳤을 때 대놓고 산재를 쓰지 말라는 선배는 드물지만, ‘네 인사평가에 불이익이 간다’며 후배들을 위하는 척 말하는 선배들은 있었어요. 사실은 본인 인사평가에도 불이익이 가거든요.”
대한항공은 산재 불이익이 있다는 내용을 직원들에게 주지시키기 위해 시험을 보기도 했다. 6개월에 한 번씩 보는 사내 시험의 한 문제로 낸 것이다. 한 예로 2012년 하반기 ‘업무지식 테스트’ 중 인사관리-15번 문항을 보면 “2012년 하반기 KALPAS 개인 성과평가 항목 중 공상/산재가 (4)건 이상일 경우 0점 처리된다(숫자 1자)”고 돼 있다. 직원들은 각자 괄호 안의 숫자 4를 써서 제출해야 했다. 대한항공 객실승무원 ㄷ씨는 “예상 문제를 미리 나눠주고 오픈북 형태로 시험을 봤는데, 100점을 못 받으면 팀 점수가 깎였다”고 말했다.
산재 불이익, 내부 시험에도 출제
대한항공도 산재 불이익이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사 쪽은 의 서면질의에 “과거 개인 및 팀 평가 항목에 공상/산재 발생이 반영됐다”고 답했다. 다만 “승무원의 귀책사유가 없는 건은 제외하고 안전규정을 준수하지 않는 사유가 있는 건에 한해 반영됐다”며 “공상/산재 관련 평가 항목은 2015년부터 개인 및 팀 평가에서 제외됐다”고 밝혔다.
승무원의 귀책사유가 있으면 산재 불이익을 줘도 되는 걸까. 김승현 노무사(노무법인 ‘시선’)는 “산재는 무과실 책임주의”라고 반박했다. “노동자의 과실이 전혀 없는 사고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산재보험을 적용할 때 노동자의 책임을 묻지 않는다. ‘어떤 사업장이든 고유한 위험이 있으니까, 설령 노동자에게 과실이 있더라도 사용자에게 100% 책임을 묻는데, 그 부담이 크니 공공부조로 해결하자.’ 이게 산재보험을 만든 취지다. 산재 불이익은 산재의 역사성을 부정하는 행위다.”
사 쪽은 2015년부터 산재 불이익이 없었다고 하지만, 일부 직원들은 여전히 불이익이 있다고 주장한다. 대한항공에서 장기간 근무한 객실승무원 ㄹ씨가 말했다. “지금도 산재/공상을 쉽게 못 써요. 승무원들은 성과평가 결과를 제대로 알기 힘들어요. 산재/공상을 쓰면 점수가 깎이는지, 깎인다면 몇 점이 깎이는지 알 수 없죠. 일하다 다치면 눈치 보다 병가나 병휴(휴가)를 쓰는 사람이 많아요.”
이런 증언은 수치로도 뒷받침된다. 이 국회 더불어민주당 강병원 의원실을 통해 2008년부터 2017년까지 대한항공의 산재 처리 현황을 입수한 바에 따르면, 2015년 전후로 산재 신청 건수가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산재 불이익이 있었던 2012~2014년 3년 평균 18건에서, 2015~2017년 3년 평균 22건으로 조금 늘었을 뿐이다. 실제 산재 발생이 크게 늘지 않았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지만, 회사가 불이익을 주지 않는다고 밝힌 뒤에도 여전히 자유롭게 산재를 신청 못하는 상황일 수 있다.
대한항공은 2017년에 객실승무원 중 산재 23건, 공상 102건, 병가 1636건, 병휴 250건이 있었다고 6월 초 에 밝힌 바 있다. 여전히 산재/공상보다는 병가/병휴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다. 김승현 노무사는 “대한항공에서 일하다 다치거나 병든 사람을 여러 명 상담했다. 명백하게 산재인데도 회사 분위기가 무서워 산재 신청을 못한 사례들이 있었다. 근골격계 부상의 경우 초기에 치료했으면 금방 나았을 텐데 쉬지 못해 증상이 악화된 경우도 있었다”고 말했다.
산재 은폐 교사 및 공모 형사처벌 대상
만약 현재도 산재 불이익이 있다면 형사처분 대상으로 볼 수 있다. 임자운 변호사(반올림 상임활동가)는 산재를 썼을 때 개인/팀의 인사 점수를 깎는 것은 “사실상 산재 신청을 못하게 한다는 점에서 산재 은폐로 볼 소지가 있다”고 말했다. 2017년 개정된 산업안전보건법 제68조에 따르면 “산업재해 발생 사실을 은폐한 자 또는 그 발생 사실을 은폐하도록 교사하거나 공모한 자”는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1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고 돼 있다.
이뿐만 아니다. 산재/공상을 쓴 직원에게 실제 인사상 불이익을 줬다면 처벌 대상이다. 2016년 신설된 산업재해보상보험법 제111조의 2(불이익 처우의 금지)에 따르면 “사업주는 근로자가 보험급여를 신청한 것을 이유로 근로자를 해고하거나 그 밖에 근로자에게 불이익한 처우를 하여서는 아니 된다”고 명시한다. 이를 위반한 사업주는 제127조에 따라 “2년 이하의 징역 또는 2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고 돼 있다. 류하경 변호사(법률사무소 ‘휴먼’)는 “산재로 불이익을 준 사례는 각자 별개 건으로 모두 처벌할 수 있다”고 했다. 대한항공 쪽은 “공상/산재 직원은 사내 진급/호봉승급 대상에서 제외되지 않는다”고 밝혔다.
이번에 입수한 자료에선 대한항공이 무재해 달성, 안전장려금 제도를 산재 은폐에 활용한 정황도 드러났다. ‘무재해 달성’은 안전보건공단이 일정 기간 산재가 일어나지 않는 사업장을 뽑아 산재보험료 인하 등 인센티브를 주는 제도다. 안전장려금은 대한항공이 1997년에 도입한 내부 인센티브 제도로 매년 정비, 운항 등 분야별 안전기준을 자체 평가해 1천 점 만점에 700점을 넘을 경우 각 직원에게 기본급 100%를 지급한다.
두 제도를 만든 취지는 좋지만, 현실에선 산재를 덮는 도구로 쓰이곤 했다. 앞서 KALPAS에 올라온 개인성과평가 기준표를 보면 “Turbulence(터뷸런스·난기류), Firm Landing(펌 랜딩·충격을 받으며 착륙)에 의한 사유 중 무재해 달성, 안전장려금 제도에 영향이 없는 경우는 제외”라고 적혀 있다. 이는 거꾸로 말하면 무재해 달성, 안전장려금 제도에 영향이 있는 경우 점수를 깎았다는 뜻이다. 직원들에게서 노무팀이 두 제도를 내세워 산재를 못 쓰게 했다는 증언도 나왔다.
2016년 대한항공을 퇴사한 전 객실승무원 이은영씨는 2014년 무렵 기내에서 사기그릇이 바닥에 떨어져 발을 다쳤다. “산재를 쓰겠다고 했더니 그룹장한테 전화가 왔어요. ‘우리 그룹이 무재해 달성을 해서 조현아 본부장께 보고를 올렸는데, 네가 산재를 쓰면 다시 보고해야 한다. 그런데도 네가 산재 신청을 해야겠냐.’ 산재 신청을 하지 말란 이야기였죠. 결국 개인휴가 썼습니다.” 당시 세 바늘을 꿰맸는데, 지금도 흉터가 남아 있다.
‘무재해 달성’의 진짜 의미
몇 해 전 퇴사한 ㅁ씨는 20년 전 비행기가 활주로에서 급정거하며 몸이 튕겨나가 좌석에 부딪혔다. 목디스크, 허리디스크, 전신타박, 뇌진탕 등 크게 다쳤다. 산재 신청(재요양)을 했는데 노무 담당 부서에서 “지금 산재를 신청하면 다른 직원들이 안전장려금을 못 받는다”며 기다리라고 했다. ㄹ씨는 “아파서 죽을 지경이라고 싸운 끝에 산재를 받았다. 나한테만 그런 게 아니라 공상, 산재 내는 사람한테 다 그랬다”고 했다.
대한항공은 “무재해 달성, 안전장려금 제도는 승무원 안전규정 위반으로 발생한 공상/산재 실적을 반영하여 목표 달성 여부를 판단하게 된다”며 “동 기준을 준용하여 승무원 안전규정 미준수 여부를 확인하기 위한 문구”라고 해명했다.
장기간에 걸친 산재 은폐를 통해 회사가 누린 이득은 상당할 것으로 보인다. 산재가 많이 발생할수록 산재보험료가 올라간다. 한국은 산재 발생률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의 5분의 1에 불과하다. 그런데 산재 사망률은 OECD 평균의 3배 수준이다(2017년 기준 1위). 노동자가 죽기 전까지 산재는 보고되지 않는다. 강병원 의원은 “그동안 은폐된 산재로 수많은 노동자가 고통받는 동안 회사는 많은 이익을 보았을 것”이라며 “이제라도 철저히 조사해 진상을 밝혀야 한다”고 말했다.
변지민 기자 dr@hani.co.kr전화신청▶ 1566-9595 (월납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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