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2005년 처음 찾았을 때만 해도 우토로는 격렬한 거주권 투쟁의 현장이었다. 이곳에 뿌리내린 조선노동자와 그 후손들은 ‘땅을 무단 점거하고 있다’며 이들을 쫓아내려는 개발업자와 법원을 상대로 힘겹게 싸웠다. 소식을 들은 한국 시민들이 들불 같은 모금운동을 일으켰고, 그 성과로 마을 땅 3분의 1을 살 수 있었다.
13년 만인 올해 4월22일 다시 찾은 우토로 마을은 평화로웠다. 주택 철거 뒤 오랜 공사 끝에 새 아파트 입주 기념행사가 열렸다. 13년 새 주민 수는 200명에서 160명으로 줄었다. 40명이던 조선인 1세대 가운데 살아서 다시 손님을 맞은 이는 1명이었다. 기억과 흔적은 빠르게 사라지고 있었다. 우토로는 이제 눈에 보이지 않는 ‘기억 투쟁’의 현장이 됐다.
소고기 두 점이 낡은 숯불화로에 올랐다. 치이익. 젓가락을 든 이들은 입가에 웃음을 띠었다. 구름 한 점 없는 마을회관 앞마당에 촘촘하게 놓인 화로 수십 개가 뜨거운 잔치 분위기를 더욱 달궜다. 불마다 삼삼오오 나눠 앉은 150여 명은 섭씨 29℃의 초여름 날씨에도 아랑곳없었다. 에루화(‘좋다’의 우리말 감탄사)라고 이름 붙은 마을회관은 온통 고기 굽는 연기로 뒤덮였고, 흰 연기는 하늘 높이 치솟았다. 드넓은 오사카 평야 한복판 작은 마을에서 일본 전역으로 피워올린 봉화처럼.
유일한 생존자 강경남 할머니4월22일 우토로 마을의 흰 연기는 긴 싸움의 끝을 상징했다. 우토로에 동원된 조선노동자들은 땅 주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1945년부터 여러 차례 쫓겨날 뻔했으나 그때마다 버텼다. 2004년 토지 주인이 강제철거를 추진하며 결정적 위기를 맞았으나 이 소식이 한국에 알려져 2005~2007년 대대적인 모금운동이 벌어졌다. 한국 정부와 시민들의 돈으로 우토로 땅 일부를 사들였고 여기에 일본 정부가 ‘1기 우토로 시영주택’을 지어 올해 1월 39가구가 입주했다. 이날은 우토로 주민들이 입주를 기념해 그동안 함께 싸워준 한국과 일본 손님들에게 ‘야키니쿠’(한국식 고기구이)를 대접하는 날이었다.
고기 한 접시 먹는 동안 풀 수 없는 긴 이야기다. 조선노동자와 그 아들딸, 손자손녀는 멀게는 73년간, 가까이는 14년간 일본 땅에서 생존을 위해 몸부림쳤다. 그들을 쫓아내려는 미군과 싸우고, 재개발에 저항하고, 일본 사회의 차별에 맞서며, 침수 피해도 온몸으로 견뎠다. 그리고 결국 버텨냈다. 주민들이 바라던 것처럼 원래 살던 집에 계속 머물 순 없었지만, 강제철거를 피하고 새로운 집(시영주택)을 얻는 ‘차선책’ 수준에서 마무리됐다.
한국에서 건너온 1세대 중 현재 유일한 생존자인 강경남(94) 할머니는 에루화 앞에 홀로 앉아 손님들을 물끄러미 지켜봤다. 그러다 간간이 민요를 한 곡조씩 뽑았다. “진주 남강에~” 고향인 경남 사천에서 8살 때 일본으로 건너와 평생 고향 땅을 밟지 못한 할머니의 사연은 2015년 MBC 예능 프로그램 을 통해 시청자의 눈물샘을 자극했다.
할머니는 “에서 왔다”고 하니 기자의 손을 꼭 잡고 놔주질 않았다. 은 2005년 5월부터 약 1년간 우토로 마을 이야기를 연재하며 우토로국제대책회의, 아름다운재단과 함께 전 국민 모금운동을 주도한 바 있다. 주민들은 ‘한겨레’라는 말에 반가움부터 표했다. 강경남 할머니는 당시 15만 명이 참여한 모금운동으로 우토로를 떠나지 않을 수 있었다며 “고마워서 눈물이 나오데요”라는 말을 여러 차례 반복했다.
이날 오후 3시에 시작한 마을회관 앞 잔치는 해가 지평선에 걸릴 때까지 계속됐다. 부산민예총 소속 소리꾼 양일동씨의 판소리가 울려퍼졌다. 한쪽에선 사물놀이패가 꽹과리와 장구를 치며 흥을 돋웠다. 참여정부 대통령비서실장으로 우토로에 대한 정부 지원을 이끌어냈던 문재인 대통령도 축하 편지를 보내왔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스스로의 존엄을 지키며 희망을 만들어오신 우토로 주민회 여러분이 자랑스럽습니다”라는 메시지가 담겼다. 우토로 주민들은 콩나물과 김치 등 밑반찬을 준비했고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총련)의 ‘청년 일꾼’ 10여 명은 천막을 치고 숯불을 나르며 힘쓰는 일을 묵묵히 도맡았다.
“작은 통일은 우리가 만든다”사실 ‘투쟁’과 ‘해결’이라는 단어는 ‘땡볕’과 ‘숯불화로’처럼 썩 가깝지 않은 조합이다. 사회적 차별을 겪는 재일조선인에겐 더욱 그렇다. 조선학교를 무상화 교육 대상에서 제외한 일본 정부에 맞서 재일조선인들이 줄기차게 싸우고 있지만, 해결의 실마리는 보이지 않는다. 그만큼 우토로의 사례는 예외적이고 소중하다. 대한민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일본이라는 국경과 정체성을 뛰어넘어 재일조선인이 받는 차별과 고통에 공감하는 시민들이 힘을 합친 결과물이다.
‘작은 통일’이 보여준 엄청난 힘과 가능성. 김수환 미나미야마시로 동포생활센터 대표는 우토로의 특별함을 이렇게 설명했다. 그는 8년 동안 우토로 주민들과 연대해온 활동가로 재일조선인 3세다. 단적으로 2005~2007년 우토로 성금 모금에 참여한 단위는 이날 마을잔치에 참여한 구성원만큼 다양했다. 한국 시민 9억3천만원, 한국 정부 30억원, 재일조선인 1세들(익명) 4억원, 총련과 일본 시민, 우토로 주민회 3억6970만원 등이다. 이 돈으로 우토로 땅 3분의 1을 샀다. 여기에 일본 정부와 지자체가 31억엔(약 306억원)을 들여 아파트 건물과 상하수도, 도로 등 인프라를 설치했다.
남북 정상회담으로 화해·평화 분위기가 퍼져가는 지금 우토로가 ‘희망의 상징’으로 이용되길 바라는 이도 있었다. 재일조선인 3세인 곽진웅 코리아NGO센터 대표는 “남북관계가 좋아져도 우리 마음속엔 보이지 않는 벽이 남아 있다. 우토로와 연대하며 재일동포 사회 내부 (남·북·일 정체성을 가진 이들 사이의) 마음의 벽이 조금은 허물어졌다”고 말했다. 김수환 대표는 “통일은 요원한 길이지만, 작은 통일은 우리가 만들 수 있다”고 했다.
현재 우토로에 완공된 시영주택은 40가구가 들어갈 수 있는 규모다. 이 중 절반인 20가구는 방 2개(20평·67m²), 나머지 20가구는 방 3개(21평·69m²)로 이뤄졌다. 엄명부 우토로주민회장은 “몸이 아픈 고령자분들이 편히 살 수 있는 집이 지어졌다는 점이 좋다”고 했다. 예전 집과 달리 상하수도가 온전히 갖춰지고 태풍에 침수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됐다는 점도 큰 변화다. 주민들은 소득 수준에 따라 우지시에 수십만원의 월세를 낸다. 두 번째 아파트 16가구는 현재 터만 닦아놓았고 앞으로 공사가 진행될 예정이다. 엄 회장과 다른 주민들은 “오늘의 우토로가 있게 된 것은 독자를 비롯한 한국 시민들이 많이 응원하고 도와주신 덕분”이라고 감사를 표했다.
역사적 맥락 사라진 아쉬움아쉬움도 남는다. 지극히 평범하고 단순한 구조의 아파트로 건설된 탓에 우토로의 역사적 맥락이 완전히 사라졌다. 주민 사이의 교류도 어려워졌다. 강경남 할머니는 아파트 생활에 적응하지 못했다. “집 밖에 나와도 아무도 없재. 만나도 말 안 하재. (기존 주택에 살 때는 옆집에) 들어가고 싶으면 ‘곤니치와!’ 하고 들어갔거든. 들어가면 앉아서 또 얘기도 하고. 그래 또 시간이 간께. 여 와갖꼬 몇십 년을 같이 살다본께 가족이랑 한가지거든.”
끈끈한 주민 커뮤니티는 우토로의 자랑이었다. 마을회관을 중심으로 동네 좁은 골목 곳곳에 웃음꽃이 피었다. 우토로를 함께 방문한 오신욱 라움건축 대표는 “동일한 부지와 재원으로도 주민들이 어우러져 살게 할 수 있었을 거다. 길을 중심으로 낮은 주택들을 배치하는 등 기존 마을의 흔적과 기억이 남도록 말이다. 집중화되고 수직으로만 올려서 안타깝다”고 말했다.
거주권 투쟁을 함께한 조선인 1~2세 상당수가 최근 몇 년 새 고령으로 숨져 시영주택 입주를 못 본 것도 아쉬운 대목이다. 엄명부 회장도 쓸쓸한 기색이 역력했다. 얼마 전 과 한 인터뷰에서 “지난 몇 년 동안 나를 응원해줬던 선배들이 앞다퉈 세상을 떴다. 혼자 남겨진 듯한 느낌이다. 뒤에서 나를 힘껏 밀어주던 얼굴들이 없어져 주민회를 이끌어갈 자신이 없어졌다. ‘여러분, 나를 따라와달라’고 말하는 것도 오래된 방법 같은 느낌이 든다”고 밝혔다.
평화기념관 건립 위한 모금 활동우토로의 ‘거주권 투쟁’은 마무리됐지만 ‘기억 투쟁’은 이제 시작이다. 주민들이 살던 집은 현재 절반 가까이 남아 있고, 커뮤니티의 중심인 마을회관과 함바(조선노동자 합숙소)까지 보존돼 있다. 주민들이 투쟁하며 그렸던 그림과 구호, 낮은 지대의 집이 침수돼 기둥이 젖은 흔적까지 고스란히 남았다. 하지만 머잖아 모든 게 사라질 예정이다. 재일조선인 문제에 오랫동안 관심을 가져온 다나카 히로시 히토쓰바시대학 명예교수는 “일본인들은 전쟁에서 (히로시마 원폭 등) 피해 받은 역사를 주로 기억하지 자신들을 가해자로 인식하는 경우가 드물다. 우토로는 일본 땅에선 드물게 ‘가해의 역사’를 기록하는 장소로 의미가 있다”고 지적했다.
지난 1월 ‘우토로 평화기념관을 위한 시민모임’(이하 시민모임)이 결성됐다. 우토로의 역사를 기억하기 위해 시영주택 옆에 ‘평화기념관’을 짓자는 움직임이다. 터는 이미 마련됐고, 건축·전시 비용 2억엔(약 19억7200만원)이 필요하다. 2005~2007년 모금 때 적립해둔 2600만엔(약 2억5600만원)이 있지만, 턱없이 부족하다. 배지원 시민모임 사무국장은 “시민들과 한국 정부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말했다. 시민모임은 아름다운재단 등과 함께 오는 7월부터 모금을 시작할 계획이다. 오신욱 대표는 “우토로 마을이 곧 사라진다는 아쉬움에 4년 전부터 동아대 학생들과 함께 이곳을 방문해 함바 등 120여 건축물의 정보를 모두 디지털화해뒀다”며 “평화기념관이 건립되면 제공하고 싶다”고 말했다.
주오사카 대한민국 총영사관은 “기념관 설립은 의미 있는 일”이라며 “총영사관은 이 사업이 우토로 주민의 의견을 충분히 수렴하고 일본 지역사회와 협력해 진행되기를 희망하며, 필요한 협력과 지원을 제공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교토(일본)=글 변지민 기자 dr@hani.co.kr사진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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