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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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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에서 대화로?

북한의 평창올림픽 평화공세에 미묘하게 방향 선회한 미국의 대북정책
등록 2018-02-26 14:24 수정 2020-05-02 04:28
김여정 북한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1부부장(뒷줄 오른쪽)과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뒷줄 가운데), 마이크 펜스 미국 부통령(앞줄)이 2월9일 평창겨울올림픽 개막식을 지켜보고 있다. 연합뉴스

김여정 북한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1부부장(뒷줄 오른쪽)과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뒷줄 가운데), 마이크 펜스 미국 부통령(앞줄)이 2월9일 평창겨울올림픽 개막식을 지켜보고 있다. 연합뉴스

평창겨울올림픽을 한반도 상황을 대반전시킬 수 있는 계기로 삼겠다는 한국 정부의 구상은 지난해 말까지 워싱턴에서 그다지 ‘현실적인 계획’으로 여기지 않았다. 북한이 미국 전역을 사정권에 넣을 수 있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급 화성 15형까지 시험발사한 만큼, 북한의 핵능력이 미국의 ‘생존 위협’(existential threat)으로 대두됐다는 데 이론의 여지가 없었다. 백악관에서는 전쟁 불가피론이 계속 흘러나왔다.

김정은 신년사가 불러온 ‘반전’

대화파인 렉스 틸러슨 국무장관이 조건 없는 북-미 대화를 제안하자마자 백악관의 공개 반박이 이어졌고, 틸러슨 장관은 경질설에 시달려야 했다. 북한이 ‘로켓 무기체계 개발 완료’를 선언한 사실을 두고 미국과 대화에 나설 명분을 쌓고 있다는 관측이 제기됐으나, 이마저도 대화파들의 희망적 사고로 치부됐다. 북한이 핵과 미사일 도발을 멈추고 진정성을 담은 비핵화 조처를 내놓아야 한다는 미국의 태도가 워낙 확고해 보였기 때문이다.

반전은 올해 1월1일 김정은의 신년사에서 시작됐다. 북한의 이른바 ‘올림픽 평화공세’(Olympic Charm Offensive)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두고 보겠다’고 반응한 것이다. 자신의 핵 버튼이 김정은의 핵 버튼보다 더 크다는, 치기 어린 발언으로 미국 언론의 조롱을 받았지만, 핵심은 핵전쟁 불사 레토릭을 거침없이 내뱉던 트럼프 대통령의 시선이 대화로 옮겨갔다는 점이다. 트럼프 백악관의 속살을 폭로한 책 의 연초 발간으로 백악관의 치부가 드러나면서 또다시 정치적 수세에 몰렸던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의 올림픽 평화공세를 자신이 주도한 대북 최대 압박의 전리품으로 간주하기 시작했다.

‘적절한 시기와 상황’에서 북-미 대화에 나서겠다는 1월10일(현지시각) 백악관의 성명은 오바마 행정부의 모호하고 소극적인 북-미 대화 조건과 뭐가 다르냐는 비판을 받았지만, 대화와 전쟁 사이를 시계추처럼 왔다 갔다 했던 트럼프 대통령의 레토릭이 다시 대화로 돌아서고 있다는 신호였다. 제한적인 대북 예방 타격인 ‘코피 전략’의 실행 가능성을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은 매우 어려운 포커 게임을 하고 있다”는 말로 대신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1월30일 국정연설과 주한 미국대사로 내정됐던 빅터 차 조지타운대 교수 낙마 소식은 이런 텍스트 읽기에 찬물을 끼얹을 만했다. 트럼프 때리기에 골몰한 미국 언론과 지식인들은 트럼프 대통령이 국정연설에서 코피 전략의 명분 쌓기를 시도했고, 코피 전략에 반대한 빅터 차 교수를 낙마시킴으로써 대북 예방 타격 이행 의지를 분명히 드러냈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트럼프의 국정연설은 미국인을 향한 메시지였다. ‘대통령답게’ 지난 1년간의 미국 우선주의 정책의 성과를 과시하고 ‘국민 통합의 지도자상’을 제시한다는 게 연설의 골자였다. 북한 문제 역시 그 연장선상에서 다뤘다. 잔악한 북한 정권이 핵무기로 곧 미국 본토를 위협할 수 있다면서도 트럼프 대통령은 ‘최대 압박’에서 멈췄다. 연설 내내 줄곧 굳은 표정으로 앉아서 불만을 나타내던 민주당 의원들마저 모두 일어나 초당적인 지지와 박수를 보낼 수밖에 없는 키워드만 말한 것이다. 오토 웜비어(북한에 억류됐다가 의식불명 상태로 풀려나 숨진 미국 대학생)의 부모와 탈북자 지성호씨를 초대손님으로 불러 기립박수를 받게 한 것은 이런 메시지의 하이라이트였다.

북-미 고위급 대화는 불발됐지만…

빅터 차 교수의 낙마는, 코피 전략에 대한 이견뿐만 아니라 백악관 내부 알력 등 다른 요인들이 작용했을 수 있다는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다. 사실 미국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평창겨울올림픽을 계기로 한미 연합훈련 연기, 북한의 핵·미사일 시험 숨고르기, 남북관계 해빙 등이 연속으로 이뤄지며, 대북 군사공격의 여지가 상당히 줄어들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또 빅터 차의 낙마를 계기로 코피 전략이 워싱턴 조야에서 뭇매를 맞자 백악관은 코피 전략이란 용어 자체가 트럼프 행정부에서 쓴 적이 없다며 강력히 부인했다.

그러나 북한 인권을 매개로 한 미국의 대북 압박은 강도를 더해가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을 테러지원국으로 재지정할 때나 한국 국회 연설, 미국 국회 국정연설 등 기회가 생기면, 웜비어의 사망을 언급하며 북한의 인권 상황을 강도 높게 비판했다. 북한 인권 문제를 대북 압박의 또 다른 수단으로 적극 활용하는 모양새다. 마이크 펜스 미국 부통령과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의 친동생 김여정의 평창올림픽 개회식 참석이 결정되면서 전세계의 시선은 두 사람의 접촉 가능성에 쏠렸으나, 펜스 부통령은 평창에 도착하기 전부터 대북 제재 강화와 북한 정권의 잔악성을 줄곧 강조했다. 심지어 현재 트럼프 행정부가 북핵 문제의 외교적 돌파구를 지지하지 않으며 평창올림픽이 끝나면 남북관계의 해빙도 끝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한국이 중재한 2월10일 펜스-김여정 비밀 대화가 무산됐고, 대북 제재와 인권 압박의 고삐는 늦추지 않고 있다.

비록 청와대가 준비한 북-미 고위급 대화가 불발로 끝났지만, 트럼프 행정부는 평창올림픽을 계기로 대북 정책에서 중대한 방향 전환을 결정했다. 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은 2월2일 백악관 대화파와 강경파 참모들이 모두 모인 가운데 북한과 조건 없는, 그것도 실무급이 아닌 고위급 대화를 갖기로 했다. 틸러슨 장관의 조건 없는 대화 제안을 백악관이 공개 질타한 지 두 달도 안 돼 이런 방향 선회가 이뤄진 것이다. 김정은 위원장이 자신의 친동생을 한국에 파견했다는 사실을 백악관은 북한의 분명한 대화 의지로 받아들였다. 심지어 펜스 부통령은 고위급 대화가 불발된 직후에도 조건 없는 북-미 대화, 대북 압박과 관여 동시 진행 등 대북 정책 기조 변화를 2월11일 에 공개했다.

북한이 불과 두 시간을 남겨놓고 ‘청와대 비밀 회동’을 취소한 것에 미국 국무부는 북한이 모처럼의 기회를 놓쳤다며 유감을 표한 반면, 부통령실은 북-미 대화를 최대 압박의 한 고리로 삼겠다는 당초 계획이 성공했음을 뜻한다고 각각 논평했다. 트럼프 행정부에서 대화파와 강경파의 갈등은 북한의 이니셔티브(주도권)로 일단 봉합됐다. 그러나 이런 엇갈린 반응은 갈등이 언제든 재현될 수 있음을 암시한다. 북한의 변화를 이끌어내려면 코피 전략 카드를 완전히 버려서는 안 된다는 인식도 워싱턴에 뿌리 깊게 자리잡고 있다.

한반도 해빙 분위기 이어지려면…

북한이 대륙간탄도미사일 시험발사를 재개하면 미국의 잠재적 ‘레드라인’을 건드릴 가능성 또한 남아 있다. 게다가 트럼프 대통령은 여전히 예측 불가능하다. 언제 또다시 ‘시계추 레토릭’을 가동해 북-미 대화의 필요성을 한순간에 일축하는 트위터 메시지를 올릴지 모른다. 현재의 한반도 해빙 분위기를 이어갈 수 있는 북한의 움직임이 필요한 이유다. 미국은 아마 억류 미국인들의 석방과 핵·미사일 시험 모라토리엄(중단)을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김연호 존스홉킨스 국제대학원(SAIS) 한미연구소 선임연구원 ·《USKI 워싱턴 리뷰》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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