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여자 아이스하키 단일팀 선수들이 2월20일 스웨덴과의 경기가 끝난 뒤 서로 격려하고 있다. 연합뉴스
아이스하키는 한국에서 인지도가 낮다. 이 종목 선수들은 야구·축구·농구 등 주요 프로스포츠나 ‘메달 박스 효자 종목’ 선수와 같은 부와 명예를 기대하기 어렵다. 남녀 통틀어 2018 평창겨울올림픽 이전에는 올림픽 본선 무대를 밟아보지 못했다.
남자 아이스하키는 대학 5개 팀(경희대·고려대·광운대·연세대·한양대)과 실업 3개 팀(강원 하이원·대명 킬러웨일즈·안양 한라)이 있어 그나마 형편이 낫다. 아이스하키 특기생으로 대학도 가고 졸업 뒤 연봉을 받으며 운동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자 아이스하키는 사정이 다르다.
여자 아이스하키는 국내 ‘상설 팀’이 없다. 초등학교부터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 실업을 통틀어 여자 아이스하키 선수들만을 위한 팀은 없다. 그렇기 때문에 대한아이스하키협회는 대한체육회의 지원으로 여자 아이스하키 대표팀을 운영해왔다. 대표팀에 속하지 못하면 선수들이 훈련이나 경기를 치를 수 없기 때문이다.
아이스하키로 대학에 진학하거나 직장을 구할 수 없는 여자 대표팀 선수들은 많은 것을 희생하며 대표팀 생활을 해왔다. 오직 올림픽만 바라보고 일상을 포기했다. 여자 대표팀은 지난해까지 서울 태릉 실내빙상장에서 훈련했다. 일과는 오후 5시 지상훈련부터 시작한다. 저녁 식사와 아이스 훈련으로 이어지다 밤 10시면 마친다. 경기도 안양, 고양, 성남 등에서 학교를 다니는 고등학생 선수들은 날마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태릉선수촌까지 숨이 차오르게 뛰어와야 한다. 집에 돌아가면 밤 12시 가까이 된다. 강도 높은 훈련에 지친 몸을 누인 뒤 다음날 등교를 위해 새벽같이 눈을 떠야 한다. 직장생활? 턱도 없는 소리다. 1년에 국외 전지훈련과 국제대회 참가를 위해 3개월 가까이 자리를 비워야 하는데, 이를 허용할 수 있는 직장은 대한민국에는 없다. 파트타임 일을 구하기도 쉽지 않다.
단일팀 결성이 논란을 일으킨 것은 이렇게 쉽지 않은 대표팀 생활을 해온 선수들에게 피해를 줄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팀 케미스트리’가 어느 종목보다 강조되는 아이스하키의 특징을 고려해봐도 대회 1개월도 남지 않은 시점에 새 선수가 합류하는 것은 득보다 실이 많아 보였다. 합류하는 선수가 힐러리 나이트(미국), 마리-필립 풀린(캐나다) 같은 초특급 에이스라면 얘기가 다르겠지만, 북한 여자 아이스하키 랭킹은 25위로 우리(22위)보다 낮고, 최근 두 차례 맞대결에서도 우리가 쉽게 승리한 터였다. 북한 선수들의 합류로 전력 상승을 기대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남북 단일팀 선수들이 1월25일 충북 진천군 국가대표선수촌 앞에서 처음 만났다. 공동취재사진
많은 논란 속에 남북 여자 아이스하키 단일팀이 현실이 됐다. 국제아이스하키연맹(IIHF)과 국제올림픽위원회(IOC)는 단일팀에 한해 대회 로스터(팀 멤버)를 기존 23명에서 35명으로 증원을 허용했다. 그러나 경기 출전 로스터는 다른 팀과 동일하게 22명으로 제한했다.
단일팀에 합류할 북한 선수 12명이 1월25일 충북 진천선수촌에 도착했다. 가장 시급한 것은 의사소통 문제였다. 여자 아이스하키 대표팀 감독이 캐나다 출신의 세라 머리인 탓도 있지만, 국내에선 아이스하키 용어 대부분을 원어 그대로 쓴다. 북한 선수들과 훈련하려면 용어 정리가 우선이었다. 남북 코칭스태프가 머리를 맞댄 결과, 남과 북의 아이스하키 용어를 정리한 ‘남북하키용어집’이 탄생했다. 우리가 쓰는 원어식 표현에 해당하는 북한 아이스하키 용어를 표로 정리해놓은 것이다. 머리 감독과 재외동포 선수들을 위해 북한 용어 발음을 알파벳으로도 병기했다. 예를 들어 ‘패스(PASS)-연락-Yeol Lak’의 식이다. 인쇄된 남북하키용어집은 코칭스태프 사무실과 선수 로커 등에 게시됐다. 남북하키용어집에 오른 75개 용어 가운데 남과 북이 똑같이 쓰는 말은 3개였다. 축구의 공에 해당하는 퍽(Puck)과 스케이트(Skate), 그리고 아이스하키의 가장 기초적 룰인 아이싱(Icing)이다.
단일팀 결성으로 대표팀의 모든 훈련 스케줄이 바뀌었다. 35명이 동시에 훈련하는 것은 불가능해서, 지상훈련과 빙상훈련 모두 팀을 두 개로 나눠서 소화했다. 연습게임으로 ‘옥석 가리기’도 시도했다.
언론을 비롯한 일반의 접근이 철저히 통제되던 단일팀은 2월4일 인천선학국제빙상장에서 열린 스웨덴과의 평가전에서 첫선을 보였다. 한반도기가 새겨진 단일팀의 올림픽 경기복도 이날 처음 공개됐다. 단일팀의 인적 구성이 윤곽을 드러냈다. 머리 감독은 포워드 1라인(박종아-이진규-최유정)을 제외한 2·3·4라인에 북한 선수를 한 명씩 포함시켰다. 당초 북한 선수들로 한 라인을 구성해 활용하는 방법이 예상됐지만, 머리 감독은 북한 선수와 기존 선수들의 시너지를 기대하는 듯했다. 스웨덴전에서 확인된 단일팀의 경기력은 나쁘지 않았다. 지난해 7월 스웨덴을 상대했을 때보다 나아진 모습을 보였고, 점수 차도 1-3으로 줄였다.
2월10일 관동하키센터, 역사적인 여자 아이스하키 단일팀의 올림픽 데뷔전이 치러졌다. 상대는 2014 소치겨울올림픽에서 동메달을 딴 강호 스위스. 대표팀은 고전을 면치 못했다. 한수진의 날카로운 슈팅이 골대를 때리는 불운으로 선제골 기회를 놓쳤고, 알리나 뮐러에게 숏핸디드골(페널티로 인한 수적 열세 상황의 득점)을 허용하며 균형이 무너진 뒤 급격히 흔들렸다. 개인기와 조직력에서 한 수 위인 상대팀보다 선수들을 압박한 것은 경기장 분위기였다. 세계적 이슈로 떠오른 상황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김여정 북한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제1부부장, 토마스 바흐 IOC 위원장 등 고위 인사들이 경기장을 찾았고, 북한 응원단의 함성이 좁은 하키센터를 뒤흔들었다. 선수들은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초반에 대량 실점을 하자 발걸음을 떼기도 힘들어 보였다. 2피리어드 2분 피비 스텐츠에게 다섯 번째 골을 내주며 이미 승부는 끝났다. 스위스 선수들은 무자비했다. 끝까지 단일팀을 몰아붙였다. 0-8 완패. 스위스가 52개의 유효샷을 날리는 동안, 우리는 단 8개의 유효샷에 그쳤다.
단일팀은 스웨덴과의 2차전에서도 0-8로 졌다. 희망적인 변화라면 전반적인 경기력에서 스위스전보다 나아졌다는 것. 그리고 선수들이 경기장 분위기에 조금씩 적응하면서 준비한 플레이가 나오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파워 플레이 찬스에서 엄수연의 포인트샷-최지연의 팁인과 박종아와 한수진의 백도어 플레이 등 약속된 플레이가 나왔다는 점에서 무기력했던 스위스전보다는 높은 점수를 줄 수 있는 경기였다.
단일팀 선수들이 스웨덴전에서 골을 넣은 뒤 기뻐하고 있다. 연합뉴스
조별리그 마지막 경기는 숙적 일본을 상대로 펼쳐졌다. 2경기 연속 0-8 대패로 심리적 압박이 극심하고, 체력적으로도 힘든 상황에서 라이벌 일본과 경기를 치른다는 것은 설명할 수 없을 만큼 큰 부담이었다. 경기 초반 2골을 연달아 내주면서 앞선 2경기의 악몽이 되살아나는 듯했지만, 1피리어드 중반 이후 선수들의 조직력이 조금씩 살아났고, ‘이대로 물러설 수 없다’는 강인한 정신력이 선수들의 지친 육체를 지배하기 시작한 듯 보였다.
한국 여자 아이스하키의 새 역사는 2피리어드 9분21초에 만들어졌다. 뉴트럴존을 빠져나오던 박윤정이 내준 퍽을 랜디 희수 그리핀이 잡아 공격 지역 페이스오프 서클에서 슈팅을 날렸다. 블레이드에 제대로 걸리지 않은 퍽이 빙면에 바운스된 뒤, 골리 고니시 아카네의 패드에 맞고 다리 사이를 관통했다. 관동하키센터는 말 그대로 열광의 도가니가 됐다. 역사적인 단일팀의 첫 골이 된 퍽은 캐나다 토론토에 있는 국제아이스하키연맹 명예의 전당에 보관하기 위해 수거됐다.
경기는 1-4로 졌지만 무득점 사슬을 끊어냈다. 조별리그에서 가장 좋은 경기력을 보였기 때문인지 선수들의 얼굴에는 웃음이 피어났다. 3연패로 조별리그 꼴찌가 확정됐지만 감동적인 투혼을 보여준 선수들에게 팬들은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가족들을 만나기 위해 올라온 관중석에서 사진 촬영과 사인 공세가 이어졌다. 졌지만 마치 이긴 것 같은 분위기였다. 선수들은 단일팀 결성으로 이슈의 초점이 된 데서 오는 중압감을 떨쳐낸 듯했다.
모든 것을 바꿔놓은 것은 랜디 희수 그리핀의 한 골이었다. 그리핀은 대한아이스하키협회가 대표팀 전력 강화를 위해 추진한 재외동포 발굴 프로젝트로 대표팀에 합류했다. 미국 하버드대학을 졸업하고 듀크대학에서 석·박사 통합 과정을 밟는 재원이지만 어머니의 나라를 대표해 올림픽에 출전하기 위해 한국 땅을 찾았다. 하버드대 4학년 시절 팀의 주축 공격수로 활약했던 랜디 희수 그리핀이지만 대학 졸업 뒤 5년간 선수생활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긴 공백을 넘기 쉽지 않았고, 고질적인 고관절 부상으로 정상적인 훈련을 소화하는 것도 버거웠다. 올림픽을 앞두고도 고관절이 좋지 않아 스웨덴전을 걸렀고, 조별리그 1·2차전에서도 썩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는 못했다.
랜디 희수 그리핀은 일본을 상대로 역사적인 한국 아이스하키 첫 골을 터트리며 모든 마음고생에서 벗어났다. 외조부모와 부모님이 현장에서 자신이 선사한 유니폼을 입고 응원하는 가운데 뽑아낸 골이라 그의 감격은 필설로 형용하지 못할 정도로 클 수밖에 없었다.
1월 29일 생일을 맞은 북쪽 최은경 선수가 축하를 받으며 케이크를 자르고 있다. 대한체육회 제공
조별리그 최하위로 순위 결정전으로 밀려난 한국은 1라운드에서 스위스에 0-2, 7·8위 결정전에서 스웨덴에 1-6으로 패하며 승점 없이 대회를 마쳤다. 그러나 이들은 이념과 정치, 종교 등 그 어떤 장벽도 뛰어넘어 모두를 하나로 만들 수 있다는 숭고한 스포츠 정신을 실현한 영웅으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 서먹할 것이라는 당초의 예상과 달리, 남과 북의 선수들은 훈련과 대회 내내 친자매처럼 지내며 정을 쌓았다. 남의 선수들은 “짧은 시간이지만 많이 정들었다. 헤어지고 나면 생각이 많이 날 것 같다”고 작별을 아쉬워했다. 북의 선수들을 이끌고 온 박철호 감독은 훈련과 대회 기간 내내 묵묵하게 세라 머리 감독을 보좌하는 헌신적인 자세로 선수들로부터 존경받았다. 온화한 성품으로 모든 이에게 “지도자로는 물론 개인적으로도 훌륭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높았던 우려와 달리 단일팀의 32일은 평화롭고 아름다웠다. 스포츠의 힘을 전세계에 보여준, 짧지만 위대한 여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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