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툰 <며느라기>를 알려준 것은 또 다른 며느리였다.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에 올라온다는, 누가 그리는지 몰라도(<3그램>과 <스트리트 페인터>의 수신지 작가라는 사실은 나중에 알았다) 입소문이 자자하다는 이 만화에 대한 얘길 듣다가 실제 작품을 보고 감탄해 박수를 쳤다. 시어머니 생일 아침상을 차리느라 새벽부터 혼자 종종대던 며느리가 식후 과일까지 깎아 내오고 바쁘게 설거지하는 사이 남은 것은 사과 두 쪽뿐. 그 순간 무심히 “아까우니까 너랑 나랑 한 개씩 먹어치우자”고 말하는 시어머니의 대사가 이어진다. 완벽한 하이퍼 리얼리즘이었다. <며느라기>는 당연한 듯 착취당하고 자연스레 말석을 배정받으며 누구에게도 존중받지 못하는 ‘며느리’라는 신분을 ‘막장’이 아닌 ‘모범적’으로 단란한 가족의 풍경 속에서 정확히 포착하는 데 성공하고 있었다.
명절 앞둔 SNS에 감도는 전운
지난 1월 개봉한 다큐멘터리 《B급 며느리》의 며느리 김진영씨도 일찌감치 이 풍경의 이상함을 깨달았다. 영화 첫 장면에서 그가 “시어머니와 한바탕하는 바람에 명절에 시댁에 가지 않았어요. 완벽한 명절을 보냈죠”라며 활짝 웃으면, 뒤이어 세상이 무너진 듯 속상해하는 시어머니 조경숙씨가 등장한다. 그리고 김씨의 남편이자 이 영화의 감독 선호빈씨는 독백한다. “나는 이상한 여자와 결혼했다.”
하지만 ‘며느리’ 김씨가 제기한 의문들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다. (영화 속 선호빈씨가 처제에게 자연스레 반말을 하는 것과 달리) 왜 나이 어린 시동생에게 ‘서방님’이라는 존칭과 존댓말을 써야 할까? 시어머니는 왜 내 양육 방식을 일일이 지적하지? 명절에 시가에 가면 왜 여자들만 부엌에서 복닥거려야 할까? 내가 왜 잘 알지도 못하는 시할아버지 제사에 아침부터 가 있어야 하지?
<며느라기> 속 민사린의 위화감, 《B급 며느리》에서 김진영씨가 던지는 질문은 동시대 여성들의 목소리와 정확히 겹친다. 가족 모임이 많은 5월이 싫다던 선호빈씨를 비롯한 세상의 많은 사위들은 알고 있을까. 가정의 달은 물론 명절을 앞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와 온라인 여성 커뮤니티에 감도는 비릿한 전운을. “어버이날 갔더니 시부모님이 피임하지 말고 빨리 애 낳으래요.” “차례 지내고 친정 가기로 해놓고 시외가부터 가자는 남편 때문에 너무 화나요.” “추석에 시가 먼저 갔으니 설에는 친정 먼저 가자고 한 게 잘못인가요?” 무슨 ‘날’이 아니어도 며느리들의 고민은 1년 365일 진행 중이다. “시부모님이 매주 안부 전화 안 한다고 혼내셨어요.” “시가 단체 카톡방에서 나오고 싶은데 눈치 보여요.” “시가 김장에 제가 빠지면 형님이 서운해하시겠죠?” “제사 때문에 연차 내고 오라는데 어떻게 하죠?”
어쩌면 사소해 보이는 일, 하루이틀 고생하면 몇 달 넘길 수 있는 일, 모두들 “네가 조금만 참고 양보하면 된다”는 수많은 일은 ‘며느리 노동’의 영역을 끝없이 확장한다. <B급 며느리>속 김씨의 시어머니가 가장 중요하게 꼽은 며느리의 ‘일’은 “집안 대소사 참여”였다. 결혼과 동시에,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남편 집안의 공공재이자 윤활유이며 활력소로 우선 기능할 의무를 지는 여성들은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착취와 억압이 발생할 때마다 자신을 의심하고 책망한다. 내가 이기적이라서, 너무 예민해서, 기본 도리도 못하면서 괜히 불만을 갖고 자꾸 부딪히는 걸까?
만약 한국에서 제사가 사라진다면
<며느라기>의 민사린이 “며느리로서 어찌어찌해야만 할 것 같은 마음”인 ‘며느라氣’를 받아, “시댁 식구에게 예쁨받고 싶고 칭찬받고 싶은 시기”로서의 ‘며느라期’를 지나며, ‘며느라기’이기를 거부하기까지의 과정이 답답하고 혼란스러운 것은 당연하다. 평생 며느리 노릇으로 고생한 친정엄마를 보며 저렇게 살지 않겠다고 다짐하다가도, “네가 잘못하면 다 엄마 아빠 흉 되는 거 알지?” 같은 기대가 살며시 어깨를 짓누르는 것을 뿌리치긴 힘들다. 여성 대상 자기계발서는 시어머니를 직장 상사로 생각하며 섬기는 ‘현명한 여자’가 될 것을 주문한다.
며느리들의 희생적인 삶을 딛고 유지돼온 세상은 며느리들의 편이 아니다. 집안의 ‘어르신’인 시아버지가 방관하고, 인생의 파트너인 남편이 우물쭈물하거나 툴툴대는 동안 가부장제의 견고한 질서에 홀로 부딪혔다가 상처투성이가 된 김씨 역시 결국 폭발하고야 만다. “이 결혼생활에 뛰어들기 전에 내가 얼마나 건강하고 행복한 사람이었는지, 지금 내 모습이 너무너무 비참해. 오빠가 영화랍시고 이거 찍는 동안 나는 이 집에서 병들고 늙어가고 있다고!” 이쯤 되면, 아니 사실은 이 지경이 되기 전에도 알 수 있다. 이상한 것은 이 ‘여자’가 아니라는 것을.
‘처월드’ 운운, 사위들 명심하라
물론 이 막막한 미로 속에서 며느리 혼자서는 출구를 찾을 수 없다. “이게 나와 시어머니의 일 같지만, 결국은 그 집에서 손발 멀쩡히 움직이는 사람이 넷인데 나랑 어머니 둘이서 ‘네가 했네, 내가 했네’ 싸우고 있다는 게 정말 이상한 일이거든”이라는 김진영씨의 지적은 정확하다. 수많은 주말 가족드라마의 소재이기도 한 ‘고부갈등’이라는 표현은, 이 문제가 마치 두 여성 간의 감정싸움인 것처럼 본질을 흐리고 가부장제의 수혜자인 남성들의 존재를 뒤로 감춘다. 민사린의 손윗동서 정혜린이 제사 준비를 며느리끼리 나누어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불참을 미안해하지 않는 것처럼, 이 오래된 부조리를 해결해야 할 책임을 가진 이들은 분명하다. 제삿날 혼자 고생한 민사린에게 남편 무구영이 “나라고 편하게만 있은 줄 알아?”라며 책임을 회피했듯, 선호빈씨가 자신을 어머니와 아내 사이에서 ‘등 터진 새우 꼴’이라고 표현했듯, 수많은 한국 사회의 남편들은 ‘나도 힘들다’고 배우자에게 투정한다. 그러나 이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용기와 양심이다. 남편들은 자신이 선택해 이룬 부부라는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자신이 원래 속했던 가족과 어른답게 맞서고, 전통이라는 이름의 불평등한 관습에서 벗어나야 한다. 만약 한국에서 제사가 사라진다면 부부 갈등의 몇 퍼센트가 감소할지, 나는 늘 궁금하다.
올해 초 한국여성민우회에서는 2018년 변화를 여는 열 가지 선언 중 첫 번째로 ‘딸이라는 역할은 없다’를 내놓았다. 가족 안에서 차별받아온 여성들이 딸이라는 이유로 가사노동에 이어 돌봄노동까지 자연스레 떠맡는 현실에 대한 문제제기다. 마침 설을 앞두었으니 새삼스럽지만 하나 더 되새기는 게 좋을 것 같다. 며느리라는 역할은 없다. 며느리라서 당연한 도리는 없다. 명절에 ‘처월드’에서 어색하게 ‘앉아’ 있는 것이 힘들다는 사위들부터 명심하길 바란다.
최지은 <괜찮지 않습니다>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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