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계엔 비정규직과 프리랜서 비율이 높다. 일부 정규직을 제외한 방송노동자 상당수가 열악한 노동환경에서 일한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최근 이들의 분노가 카카오톡 오픈채팅방 ‘방송계갑질119’에서 폭발적으로 분출하고 있다. 방송계갑질119를 둘러싼 뜨거운 논란은 그동안 억울한 일을 당해도 말할 공간이 없고 대변해줄 단체가 부족했다는 것을 방증한다.
방송노동자 위한 제보센터 운영방송노동자가 마음 편히 자신들의 열악한 노동 여건을 말하고 이를 해결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이하 한빛센터)가 1월24일 출범한다. 한빛센터는 방송노동자가 좀더 사람답게 일하기를 원했던 고 이한빛 PD를 기리기 위해 세워진 공간이다. 방송노동자를 위한 제보센터가 운영되고 법률 상담과 대응이 이뤄진다. 방송노동자를 한데 묶을 수 있는 소모임과 노동조합 결성 지원, 강연·교육 등의 역할도 한다. 한빛센터는 1월 중순쯤 누리집을 열어 정기후원 회원을 모집할 계획이다. 한빛센터 설립을 위한 모금이 1월24일까지 스토리펀딩 페이지(https://storyfunding.daum.net/project/18346)에서 진행되고 있다.
이한빛 PD는 CJ E&M 채널 tvN의 드라마 조연출로 일하다 2016년 10월26일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는 방송계에서 이뤄지는 장시간 노동 관행과 직장 내 괴롭힘 등으로 힘들어했고, 자신의 신념에 반하는 비정규직 계약 해지 업무를 맡아 괴롭다는 유서를 남긴 채 숨졌다. 이 PD의 죽음 이후 2017년 4월 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 만드는 법’, 다산인권센터 등 35개 시민사회단체가 연대해 대책위원회를 꾸리고 CJ E&M을 상대로 투쟁을 벌였다. 그 결과 회사 쪽은 이 PD의 죽음에 대해 사과하고 재발 방지 약속을 하는 것은 물론, 방송 노동환경 개선을 위한 법인 설립에 기금을 내기로 했다.
기금을 종잣돈 삼아 유가족과 대책위는 2017년 12월 사단법인 ‘방송노동환경 개선을 위한 한줄기의 빛, 한빛’을 세웠다. 그리고 그 밑에 한빛센터를 마련했다. 한빛센터의 공동대표로 이 PD의 부친인 이용관씨와 김환균 전국언론노조 위원장이 취임했다. 이용관씨는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정책실장, 참교육연구소 소장 등 교육운동을 해온 교사기도 하다.
은 지난해 9월부터 한빛센터 창립을 주도한 이한솔(28·사진) 한빛센터 이사를 1월10일 오후 인터뷰했다. 이한솔 이사는 “1월 말부터 드라마 현장 개선 프로젝트를 진행할 것이다. 장기적으로는 방송노동자들이 자신의 권리를 스스로 지킬 수 있도록 노동조합을 조직하고 지원하는 사업에 주력하겠다”고 밝혔다. 이 PD의 동생이기도 한 그는 “부끄럽지 않게 한빛센터 설립을 마무리해 형에게 떳떳하다”고 말했다. 아래는 이한솔 이사 인터뷰다.
“위로금 개인적으로 쓰지 말자”방송노동자를 위한 인권센터를 만들자는 아이디어는 처음 어떻게 나오게 됐나.CJ E&M에 책임 인정을 요구하며 싸울 때부터 가족 사이에 공감대가 있었다. 만약 위로금 이야기가 나오더라도 개인적으로 쓰지 말자, 형이 숨진 의미를 잘 살릴 수 있게 방송 종사자들을 지원하는 재단을 만들자고 가족 내부에서 의견을 정했다. 2017년 6월 CJ E&M에서 유가족에게 위로금을 주겠다고 했다. 우린 재단이 운영될 수 있을 만큼 달라고 역제안을 했다. 결국 보통의 위로금보다 꽤 많은 금액을 받는 대신 사회공헌 목적으로 쓰기로 합의했다.
센터 설립을 기획할 때 참고한 다른 단체는?2012년 대학을 잠시 쉬며 이한열기념사업회에서 1년간 일한 경험이 있다. 고인을 추모하는 사업회가 어떻게 운영되는지 다행히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었다. 비정규노동자 쉼터인 ‘꿀잠’이나 ‘인권재단 사람’을 보며 법률 상담과 대응, 노조 조직 지원, 휴게 공간 대여 등의 사업을 생각했다. 영화산업노조에서 운영하는 신문고(제보센터)도 참고했다. 방송노동자에게 필요한 사업이 뭔지 알기 위해 현직에 있는 분들을 만났다. 조소담 대표, 권성민 MBC PD, CJ E&M 내부 인력 등 연이 닿는 사람들을 만나며 큰 틀을 짰다. 그다음부턴 준비모임·자문그룹 10여 명과 함께 회의하며 구체화했다.
준비모임에는 누가 들어왔나. 대학에서 총학생회 활동을 했던데, 그쪽 지인들인가.그렇다. 감사하게도 형과 나의 지인 등 주변에 도와주겠다는 분이 많았다. 추모공연 기획, 법인 설립 행정절차, 디자인 등을 맡아줄 분과 외주제작사의 현실을 잘 아는 분들이 각자 역할을 맡아 준비모임에 합류했다.
공간은 어디에, 어떻게 마련할 계획인가.1월3일 박원순 서울시장을 만났다. 한빛센터 공간 마련 등 협조를 요청했고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는 답을 들었다. 한빛센터의 성격상 많은 종사자들이 근무하는 현장인 서울 마포구 상암동 디지털미디어시티(DMC) 부근으로 가기를 바라고 있다. DMC에 방송사들이 자리잡으면서 질 낮은 일자리가 크게 늘었다. 서울시 차원에서도 노동조건을 향상시키는 여러 지원사업 중 하나로 한빛센터를 충분히 포함시킬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미디어 분야 노동자를 위한 조직으로 방송작가노조, 영화산업노조, 한국독립PD협회 등이 있다. 이들 단체와 어떻게 차별화할 것인가.아직 차별화할 필요는 느끼지 못한다. 빈 부분을 채우려 한다. 방송작가노조에서 조명팀 스태프의 권리까지 보장하긴 어려울 거다. 모든 직종의 노동자가 노조를 가지게 되면 그다음부턴 노조를 뒷받침하는 일을 할 것이다. 하지만 현재는 방송업계의 여러 노동자들을 위한 활동이 필요하다.
“방송노동자 조직 만드는 게 중요”한빛센터는 1월10일 센터 소장으로 탁종열 활동가를 선임했다. 그는 미디어 분야에서 잔뼈가 굵은 베테랑 활동가다. 1991년 노동운동을 시작해 서울지역인쇄노동조합 위원장, 전국언론노조 조직쟁의실장, 경영기획실장 등을 거쳤다. 한빛센터가 출범 초기부터 노동문제를 집중적으로 파고들려 한다는 의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최근 자고 나면 새로운 이슈가 나오는 상황이다. MBC 다큐프로 폭언 사태, tvN 드라마 스태프 추락 사고, SBS 예능프로 외주제작진 임금 상품권 지급 등이 연달아 불거졌다. 방송계에선 뜨거운 현안이 쏟아지는 시기에 출범하는 한빛센터에 거는 기대가 커지고 있다.
한빛센터 출범 초기 어떤 일을 할 건가.다른 단체들과 함께 ‘드라마 현장 개선 프로젝트’를 이슈화할 계획이다. 우선 1월 말에 기자회견을 열고, CJ E&M 드라마 제작 현장 실태부터 조사한다. CJ E&M과도 논의가 된 사안이다. 궁극적으로는 지상파와 종합편성채널을 포함한 전체 드라마 제작 현장의 조사로 확대하는 게 목표다. 이를 위해 최근 ‘방송프로그램 외주제작시장 불공정관행 개선 종합대책’을 발표한 5개 부처 합동 태스크포스팀을 압박할 계획이다. 더 나아가 국회에서 법안이 마련되도록 해야 한다.
장기적으로 생각하는 주력사업은 뭔가.노동조합을 조직하고 지원하는 사업이 돼야 할 것 같다. 방송종사자들이 스스로 권리를 보장받을 수 있는 조직을 만들고 시스템을 구성하는 게 중요하다. 사실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이 가는 사업은 휴게 공간 대여다. 서울시가 검토 중인 공간이 넉넉하다면 진행할 계획이다. 종사자들이 찾아와 여유를 가지고, 의지할 수 있는 공간이 되었으면 한다.
개인적으로 마음 가는 건 추모사업이라고 할 줄 알았는데.물론 많은 이들이 형을 기억해줬으면 좋겠다. 그건 많은 사람이 찾아오면 자연스레 해결된다.
사건 발생부터 치면 꼬박 1년 넘게 이 일에 매달렸다. 한빛센터 설립을 눈앞에 둔 지금 감회는 어떠한가.긍정적인 감회는 형한테 떳떳한 것. 적어도 부끄럽지 않게 일을 마무리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었는데…, (눈시울을 붉히며) 떳떳함이 있다. 그게 가장 중요하다. 부정적인 감회는 섬뜩하다는 거? 대학 총학생회나 시민단체 활동을 할 때도 청년노동 문제는 이야기했지만, 실제 보니 그 처참함에 소름이 끼쳤다. 진짜 열악하구나.
대학 마지막 학기다. 졸업하고 앞으로 계획은?청년주거복지를 위한 시민단체 ‘민달팽이유니온’에 들어갈 계획이다. 대학생 때 민달팽이유니온 위원장으로 활동한 경험이 있다. 한빛센터 운영진도 겸하며 ‘투잡’을 뛸 것 같다.
“형은 운동의 시발점 된 사람”지난 1년의 경험이 계획에 영향을 미쳤나.원래 공익적인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다. 지난 1년 동안 그것이 좀더 확고해졌다. 그리고 현장으로 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을 직접 만나니까 느낌이 달랐다. 현장에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엄청 많다는 걸 느꼈다.
형이 어떻게 기억됐으면 좋겠나.사람을 기계 부품처럼 보지 않고 사람으로 존중했던 사람, ‘원래 그런 것’들을 다르게 보고 구조에 편승하지 않으려던 사람, 운동의 시발점이 됐던 사람.
글 변지민 기자 dr@hani.co.kr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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