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KBS 구성작가협의회 누리집에는 KBS 간판 예능프로그램 가운데 하나인 에서 일할 사람을 구한다는 구인 광고가 올라왔다. 제작사는 ‘KBS 본사’, 근무 형태는 ‘주5일 상근’이었다. 해야 하는 일은 ‘VCR 리서치’였는데, 놀랍게도 ‘페이’ 기준이 ‘상품권 지급’이었다(아래 사진 참조).
구인광고에 버젓이 상품권 지급 명시KBS 프로그램에서 일한 경험이 있고, 그때 상황을 잘 아는 한 예능 작가는 “KBS는 신입 작가를 ‘자료 조사원’이나 ‘지원 작가’ 같은 이름으로 부르는데, 실제 하는 일은 타 방송사의 막내작가 업무이다. VCR 리서치는 기존 코너 말고 기획 코너를 준비하며, 거기에 필요한 자료 조사를 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KBS도 버젓이 ‘2~3년차 작가님들 중 가운데 쉬고 있는 분’의 지원을 요구했다.
이는 예외적인 일이 아니다. 2016년 KBS 본사가 제작하는 도 3개월 이상 일할 구성작가를 ‘아르바이트’로 구하며 고료를 “회사 내규에 따라 백화점 상품권으로 매주 10만원 지급”이라고 고지했다. 회사 내규로 임금을 상품권으로 지급한다는 사실을 천연덕스럽게 고지한 것이다.
이 제1195호 표지이야기(‘열심히 일한 당신 상품권으로 받아라’)를 통해 방송계의 불법 관행인 ‘상품권 페이’ 문제를 폭로한 뒤, 기사의 주요 사례로 등장한 SBS뿐 아니라 KBS 등 공영방송에도 똑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제보와 증언이 쏟아지고 있다.
지난해 시작한 KBS 예능프로그램에서 작가로 일했던 A는 “구인을 할 때부터 고료를 문상(문화상품권)으로 준다고 했다. KBS에서 막내 작가를 구하며 (임금을) 문상으로 주는 게 워낙 흔한 일이어서 특별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문상을 주기 위해 막내 작가 밑에 아예 인턴 작가를 뒀던 KBS 프로그램도 있었다”고 말했다.
KBS 에서 스타일리스트로 일했던 B의 증언도 비슷하다. 그는 “아나운서 의상을 주로 담당하며 임금을 상품권으로 받았다. 많을 때는 주당 20만원, 적을 때는 10만원을 상품권으로 받았다”고 말했다. 그는 “나만 그렇게 받았거나 그 프로그램만 그랬으면 부당하다고 생각했을 텐데, KBS의 거의 모든 프로그램에서 스타일리스트들이 상품권으로 임금을 받았다”고 지적했다. 그는 보도를 본 뒤에야 “2~3개월 뒤에 정산을 하고, 상품권을 바꾸는 수수료를 내가 감당했던 일이 억울한 일임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그 밖에 방송계 비정규직들이 모인 ‘방송계갑질119’ 오픈채팅방에는 KBS 프로그램인 , 파일럿으로 제작됐던 등에서 일했던 방송노동자들이 “페이를 상품권으로 받았”다는 증언이 이어지고 있다. 상품권으로 받은 금액은 단기 아르바이트는 주당 10만~30만원, 한 달 120만원까지 다양했다.
그 많은 상품권은 어디서 온 것일까. 이와 관련해 방송사의 고위 관계자는 과 한 통화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상품권 협찬은 보통 방송 맨 뒷부분에 판넬(패널) 광고 형태로 나가는 업체들이 하는 것이다. ‘프로그램에 도움을 주고 참여한 분들에게 사례’로 나가야 하지만, 실제 운용은 다르게 되고 있다.” 지급된 상품권은 한 프로그램이 끝날 때 “프로그램에 도움을 주신 분께는 ○○○○에서 백화점 상품권을 드립니다”라는 코멘트에서 언급된 그 상품권이라는 얘기다. 이 상품권의 경우 광고주가 방송사에 일종의 ‘변형 광고’를 하며 ‘현물 협찬’ 형태로 보내온 것으로 당연히 방송사가 직접 돈을 주고 산 것은 아니다.
‘판넬 광고’ 혹은 ‘대판’이라고 하는 이런 협찬 고지는 방송통신위원회 규칙 제4호 ‘협찬 고지에 관한 규칙’에 따른 것이다. ‘방송 제작에 관여하지 않는 자로부터 방송프로그램 제작에 직간접적으로 필요한 경비·물품·용역·인력 또는 장소 등을 제공’받았을 때, ‘프로그램 종료와 함께 그 협찬주의 명칭 또는 상호 등을 고지’해야 하는 것이다. 이 규칙에 따라 방송사는 ‘방송프로그램의 제작에 직간접적으로 필요한 경비·물품·용역·인력 또는 장소’를 협찬주로부터 제공받을 수 있는데, 이를 현물이 아닌 ‘상품권’으로 받는다.
KBS PD “구성작가는 노동자 아냐”필요한 제작 경비의 일부를 협찬받는 것이지만 이는 변형된 형태의 ‘광고 영업’이다. 한 방송업계 관계자는 “협찬이지만 사실상 광고다. 지상파 방송의 경우 아침 방송이나 전국을 도는 프로그램에 이런 광고들이 많다. 광고주 입장에서 이런 식의 협찬은 가성비가 좋다”고 말했다. 직접 광고를 제작하려면, 상당한 비용이 들지만, 판넬은 따로 광고를 만들지 않아도 되고, 업체 이름이 음성으로 나가 비용이 저렴하다는 것이다. 시청률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판넬 광고는 50만원에서 많게는 500만원 이상의 금액대를 형성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 프로그램이 서너 개의 판넬 광고를 유치하면 매회 상당한 액수의 상품권이 협찬되는 셈이다.
현행 방송법상 KBS는 광고 영업을 코바코(한국방송진흥공사)를 거쳐 대행 영업해야 하지만, 이렇게 받는 협찬 상품권은 사실상 예외로 인정돼 방송사의 수익이 된다. 방송계 경력이 수십 년차에 이르는 현장 스태프들조차 상품권의 출처와 규모를 정확히 알지 못하는 것은 방송사가 쉬쉬하며 이렇게 받는 상품권의 실상을 정확히 공개하지 않기 때문이다. KBS 프로그램 제작에 참여했던 다수의 비정규직 스태프들은 “KBS의 경우 에 워낙 많은 상품권 협찬이 들어와 이를 다른 프로그램들 스태프들의 인건비로 쓴다”고 말했다.
방송사 정규직 제작PD들은 방송 스태프들에게 통화(돈)로 지급되어야 하는 임금을 상품권으로 주는 현실에 별다른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듯 보였다. 비정규직 스태프에게 문화상품권으로 임금을 준 KBS의 김아무개 PD는 에 보낸 ‘항의성 메일’에서 “‘방송사 갑질’에 관한 근래의 문제의식에 대해서는 상당 부분 공감”한다면서도 “상품권 대체 지급은 방송사 제작 현장의 구조적인 문제에 따른 오랜 관행”인데, 상품권을 임금으로 지급한 자신의 사례가 “방송사 갑질 기사로 인용되어, 매우 충격을 받은 상태”라고 항변했다. 그는 임금을 상품권으로 준 현실에 대해 ‘방송 제작 시점에 이미 메인 작가와 협의했고, 지급 시점 역시 정상적이었으며, 임금을 대체하는 상품권 지급은 제작비가 부족한 상황에서 어쩔 수 없는 관행’이었다며 “구성작가는 근로자가 아니므로 근로기준법 적용 대상이 아니라는 판결”을 근거로 “작가료를 임금이라고 보고 근로기준법 위반을 언급하는 것은 잘못된 보도”라고 지적했다.
KBS “실상 파악에 시간 걸릴 것”한 사람의 노동자성을 확인하려면 사안별로 해당 PD가 작가의 업무 수행 과정에 지휘·감독을 하는지 등 사용-종속 관계를 따져봐야 한다. 그리고 사용-종속 관계가 인정된다면, 어떤 형태의 계약을 맺었는지와 관계없이 근로기준법 적용 대상이 된다.
KBS는 방송사에서 제작하는 다수 프로그램에 만연한 상품권 페이와 관련한 실태를 묻는 에 “제작 현장의 문제라 관련 내용을 전혀 알지 못하며, 실상을 파악하는 데 시간이 걸릴 것 같다”고 답했다.
김완 기자 funnybone@hani.co.kr전화신청▶ 02-2013-1300 (월납 가능)
인터넷신청▶ http://bit.ly/1HZ0DmD
카톡 선물하기▶ http://bit.ly/1UELpok
한겨레21 인기기사
한겨레 인기기사
‘미국 최고 의사’ 84살 김의신 “암에 좋은 음식 따로 없어, 그 대신…”
“명태균에 아들 채용 청탁…대통령실 6급 근무” 주장 나와
“대통령 술친구 이긴 ‘김건희 파우치’…낙하산 사장 선임은 무효”
관저 유령건물 1년8개월 ‘감사 패싱’…“대통령실 감사방해죄 가능성”
법원, KBS 박장범 임명 효력정지 가처분신청 기각
김정숙 여사, 검찰 소환 불응하기로…“무리한 정치탄압”
다 ‘내가 했다’는 명태균, 이번엔 “창원지검장 나 때문에 왔는데…”
탄두가 ‘주렁주렁’…푸틴이 쏜 ‘개암나무’ 신형 미사일 위력은
‘야스쿠니 참배’ 인사 온다는 사도광산 추도식…‘굴욕 외교’ 상징될 판
“영화계 집안사람으로서…” 곽경택 감독 동생 곽규택 의원이 나선 이유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