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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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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은 사라졌지만…

‘김장겸 해임’ 이후 다시 던지는 ‘공영방송 정상화’의 의미…

언론 환경 변해 ‘재건’ 녹록지 않을 듯
등록 2017-11-20 17:18 수정 2020-05-02 04:28
파업 중인 전국언론노동조합 KBS본부 조합원들이 11월14일 고대영 KBS 사장의 퇴진을 요구하며 명지대 앞에서 집회를 열고 있다. 한겨레 박승화 기자

파업 중인 전국언론노동조합 KBS본부 조합원들이 11월14일 고대영 KBS 사장의 퇴진을 요구하며 명지대 앞에서 집회를 열고 있다. 한겨레 박승화 기자

‘악당’이 사라졌다. 김장겸 MBC 사장이 결국 해임됐다. ‘국회에서 방송법을 개정하면’이란 조건을 내걸었지만 고대영 KBS 사장의 운명 역시 벼랑 끝이다. 순리는 거슬러지는 것이 아니고 시간도 더 이상 ‘악당’들의 편이 아니다. 그래서 다시 근원적인 질문을 던진다. ‘공영방송이 정상화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한국 사회는 지금 오래되고 복잡한, 그래서 간단치 않은 질문 앞에 서 있다.

‘공영방송 정상화’는 문재인 대통령의 공약이자, 지난겨울 촛불의 요구였다. 하지만 그 정상화가 무엇인지에 대한 합의는 단 한순간도 구체적으로 이뤄진 적이 없다. 막상 당선된 뒤 청산해야 할 적폐가 너무 많아 취임 6개월여가 지났지만 ‘국정원 적폐’ 외엔 뚜렷한 진도를 못 빼고 있다. 그래서였을까, 공영방송 정상화 움직임이 시작되는 데 적잖은 시간이 걸렸다.

‘노장’ PD의 외침 “김장겸은 물러나라”

적막을 깬 이는 김민식 MBC PD였다. 그가 문 대통령이 당선되고 한 달여 만에 침묵을 깨고 “김장겸은 물러나라”라고 외쳤다. 그가 처음 서울 상암동 MBC 사옥에서 외로운 외침을 시작했던 게 6월2일이었다. 페이스북 라이브 방송으로 전파된 이 외침은 신선하고 울컥했다. 전국에 있는 수많은 시민들이 ‘좋아요’를 눌렀다. 그 ‘좋아요’는 공영방송 정상화의 도화선이 됐다.

8월30일 MBC 노동자들이 ‘유배지’ 폐쇄를 선언했다. 그리고 KBS와 MBC 양대 공영방송이 9월4일 0시부터 동시 파업을 시작했다. 시기도, 명분도, 결의도 모두 충만한 정의로운 파업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의 반응은 예상보다 차가웠다. 지지는 광범위했지만, 생각만큼 뜨겁지 않았다. 몇몇 언론학자들은 ‘정권이 바뀌었다고 바로 사장을 내쫓는 모양새’에 우려를 표했다.

지난 이명박·박근혜 정부 때 이뤄진 폭력적인 언론 장악이 남긴 뜻하지 않은 ‘트라우마’였다. 자유한국당은 MBC와 운명 공동체임을 선언하며 문재인 정부의 언론 정책 자체를 ‘방송 장악’으로 규정하고 의사 일정을 거부했다. 물론 이 적반하장은 적폐 잔존 세력의 몸부림이다.

하지만 이는 공중파가 압도적인 영향력을 자랑하던 미디어 환경이 이미 끝났음을 알리는 변화이기도 했다. 사람들은 더 이상 공영방송에 목말라하지 않는다. 10년 전 MBC가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기는 페이스북도 트위터도 없던 시대였다. ‘레거시 미디어’(전통 미디어) 외엔 지배적 플랫폼이 없던 저널리즘 환경이었다.

그사이 매체 환경의 지각변동은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을 정도다. ‘지상파와 그 밖의 방송’으로 구성되던 한국적 상황은 유달리 그로 인한 충격을 크게 맞고 있다. ‘재벌 방송’이라고 비난받던 JTBC는 이제 대한민국에서 압도적인 신뢰도 1위를 달리고 있다. CJ E&M의 예능·오락 콘텐츠는 지상파의 영향력을 넘어선 지 오래다. 지난겨울 광장에서 촛불을 들었던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는 를 신뢰하지 못한다.

공영방송의 위기를 상징하는 것은 MBC 에 대한 한국 사회의 태도다. 2012년 있었던 MBC 170일 파업 때는 결방이 한국 사회를 뒤흔드는 엄청난 뉴스였다. 이번주에 을 하느냐 안 하느냐가 인터넷 언론의 주요 ‘어뷰징’ 대상이었다. 하지만 이제 우린 이 한국 예능의 ‘절대 강자’가 아닌 시대에 살고 있다. 오히려 나영석 PD 등 공중파 출신 인재들이 바깥에 차린 플랫폼이 더 각광받는 시대다. 종합편성채널은 진보와 보수 양쪽 모두에서 이미 공영방송의 역할을 잠식했다. 모바일로 뉴스를 소비하는 시민들은 더 이상 ‘누가 뉴스를 만드느냐’를 따지지 않는다.

‘약발’ 떨어진 공영방송 영향력

이 차이는 향후 공영방송 정상화 국면 전체를 지배할 수 있는 거대 이슈다. 오랜 투쟁에서 승리한 MBC 구성원들이 공영방송 재건을 자신할 만큼 상황은 녹록지 않다. 지난 10여 년간 사람들이 공영방송이 사실상 제기능을 하지 않는 세상을 충분히 경험했다. 방송이 사회의 민주적 구성과 운영을 위한 필수적 공기(사회 구성원 전체가 이용하는 도구)라는 인식은 낡은 것이 됐다. 사람들은 더 이상 (공영)방송이 국가 정치를 견제하고, 시민 주권에 복무하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한국 사회의 지난 10년을 돌이켜보면 공영방송은 ‘열린 사회의 적’이었고, 시민 민주주의와 불화하던 대표적 집단이었다. 사람들이 기억하는 공영방송의 모습은 권력 논리에 충실하고, 기업의 입장을 대변하며, 상업주의적 판단으로 중요한 것을 그르치던 것이었다. 어제의 용사들이 “이런 뉴스 못하겠다”고 외쳤지만, 사람들은 이미 화려했던 공영방송의 전성기를 잊었다. 또 20대들은 이를 아예 경험하지 못했다. 그래서 공영방송 정상화는 과거의 어느 날로 돌아가겠다는 선언으론 어림도 없다. 김장겸이 없으니 김재철이 사라졌으니, 뭔가 할 수 있으리란 의지는 존중할 수 있지만 낭만적이다.

공영방송 정상화는 보수정권이 검게 물들인 방송판의 실체를 낱낱이 드러내는 것에서 시작돼야 한다. 단순히 몇몇 문제적 인물을 거세하거나 내쫓는 것으로는 불충분하다. 쫓겨난 시사보도 프로그램 기자, PD들이 원직 복귀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긴 하지만 최종 목표는 아니다. 기계적 공방과 양비론 보도가 방송 뉴스의 문법으로 상존하고, ‘시청자가 그것을 원한다’는 논리로 연성 뉴스가 보도국을 지배하는 공영방송 정상화는 의미가 없다.

후임 MBC 사장에 쏠리는 세간의 관심

이제 세간의 관심은 김장겸이 물러난 뒤 누가 MBC 사장이 될 것이냐에 집중돼 있다. 여러 이름이 차기 MBC 사장으로 거론된다. MBC 관리·감독 기구인 방송문화진흥회의 한 이사는 “자천, 타천으로 거론되는 이만 30여 명”이라고 말할 정도다. 앵커로 직접 나서며 오늘의 JTBC를 만든 손석희 사장, 김어준의 을 기획하며 라디오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프로그램을 만들어낸 정찬형 TBS(교통방송) 대표, 영화 을 연출한 탐사보도 저널리스트 최승호 전 MBC PD 등이 MBC 사장 후보에 이름이 오르내린다. 전임 사장들에 비할 바 없이 모두 훌륭한 이름들이지만, 공영방송 정상화는 ‘깃발’을 드는 것만으로는 달성되지 않는다. 그래서 다시 묻는다. 공영방송 정상화란 무엇인가.

김완 기자 funnybo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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