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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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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지국가는 ‘약자 정치’의 결과물

비례대표제는 사회·경제 약자를 정치 강자로 만드는 비결…

비정규직·소상공인·청년 대변 정치세력 국회와 행정부에 입성케 해
등록 2017-08-29 17:36 수정 2020-05-03 04:28
2016년 6월 독일 의회의 모습. 독일은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실시하는 대표적인 국가로 사회적 약자를 위한 여러 복지 정책을 실행하고 있다. EPA

2016년 6월 독일 의회의 모습. 독일은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실시하는 대표적인 국가로 사회적 약자를 위한 여러 복지 정책을 실행하고 있다. EPA

스웨덴·덴마크·노르웨이·핀란드·독일·네덜란드·오스트리아·벨기에, 이른바 ‘세계 8대 선진 복지국가’라는 나라들이다. 앞의 네 나라는 사민주의, 뒤의 네 나라는 기민주의 방식의 복지국가로 분류되지만, 8개국은 공히 세계 최고의 보편주의 복지국가 체계를 수십 년 동안 안정적으로 운영해오고 있다. 모두 유럽에 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공통점은 ‘약자를 위한 정치’를 제대로 할 줄 아는 나라라는 것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안정적 복지국가는 오직 ‘약자 정치’가 활성화한 곳에서만 발전할 수 있다. 복지국가는 약자 정치의 결과물인 것이다.

국민의 압도적 다수는 약자

우리나라 국민의 압도적 다수는 약자다. 그들은 시장에서 돈을 충분히 벌지 못하고 국가에선 제대로 도움을 받지 못해 대체로 하루하루 불안하고 구차하게 살아간다. 어떻게 세계 12위권 정도의 경제력을 가졌다는 민주국가에서 그 나라의 주인인 국민의 대다수가 못살 수 있을까? 민주화 이후 수십 년 동안 사회·경제적 양극화가 해소되기는커녕 갈수록 악화하는 이유는 뭘까? 약자의 정치가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형식상) 대의제 민주주의 국가다. 주인인 국민이 선거로 대리인을 뽑아 그들을 통해 나라를 운영하는 것이다. 그러니 나라가 주인을 잘 섬기지 못하면, 그것도 계속 그 모양이라면 필경 선거제도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선거제도가 대의제 민주주의의 본령에 따라 제대로 설계됐다면 주인을 잘 모시는 사람들이 선거에서 대리인으로 뽑혀야 한다. 물론 예외나 사고가 가끔 있겠지만 대체적으로 그래야 마땅하다. 주인을 제대로 모시지 않거나 모시지 못하는 대리인이 오히려 더 많이 혹은 더 자주 뽑힌다면, 그래서 나라가 제구실을 못한다면 선거제도가 잘못됐다고 봐야 한다. 선거제도가 나쁘면 좋은 대리인을 뽑고 싶어도 그럴 수 없지 않은가. 이 경우 선거제도를 고칠 수밖에 없다. 약자들이 대리인을 제대로 뽑을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 그러면 약자 문제는 시간이 가면 대부분 해결될 수 있다. 선한 대리인들이 자신의 주인인 약자를 위한 정치를 제대로 펼칠 것이기 때문이다.

명심해야 한다. 사회·경제적 약자라고 해서 정치적으로도 약자일 필요는 전혀 없다. 선거제도만 제대로 만들면 사회·경제적 약자는 정치적으로 오히려 강자가 될 가능성이 크다. 대의제 민주주의의 선거는 1인 1표 원칙에 따라 치러지는데 어느 나라에서나 약자 수가 강자보다 압도적으로 많기 때문이다. 그러니 선거제도만 개혁하면 약자는 정치적 힘을 충분히 가져 그 힘으로 자신에게 필요한 정책·제도·법을 (대리인을 통해) 만들어낼 수 있다. 유럽의 노동자, 중소 상공인, 청년 등의 약자는 그렇게 지금의 저 복지국가를 건설해냈다.

유럽의 선진 복지국가들은 어떤 선거제도를 가졌기에 그토록 약자의 정치를 활성화할 수 있었을까. 바로 각 정당의 득표율과 의석점유율의 비례성을 충분히 보장해주는 선거제도다. 그런 제도를 도입할 경우 우리나라에서도 약자를 위한 정치가 제대로 작동하고 그 결과물인 복지국가로 분명히 발전해갈 수 있다.

지금의 소선거구 1위 대표제를 명실상부한 비례대표제로 바꾼다고 생각해보자. 즉, 각 정당들이 전국에서 득표한 만큼 그것에 비례해 국회 의석을 서로 나눠 갖는 경우를 상정해보자. 그 경우, 예를 들어 전국에 퍼진 그 수많은 소상공인이 전체 표의 10% 정도를 못 모아내겠는가? 10%에 해당하는 표를 한 정당에 모아주면 그것만으로도 단박에 (국회 총의석의 10%인) 30석 유력 정당을 만들어낼 수 있다. 우리나라 전체 경제활동 인구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소상공인 집단의 비중을 보면, 사실 잘만 하면 30%, 즉 90석의 소상공인 정당을 만들어낼 수 있다. 그것은 비정규직 노동자도 마찬가지이고 청년들도 그러하다. 요컨대, 선거제도만 개혁하면 주요 약자 집단이 자신의 강력한 정치적 대리인을 국회 내에 확보할 수 있고 그들을 통해 경제민주화와 복지국가 건설 등에 필요한 법과 제도를 마련할 수 있다.

정당도 사회경제 집단만큼 다양화

비례대표제가 도입되면 국회에서만 약자의 정치가 강화되는 게 아니다. 결국 행정부에서도 같은 현상이 벌어진다. 우리나라와 같이 산업화를 거친 민주국가를 상정해보자. 거기에 얼마나 많고 복잡한 이해관계가 얽히고설켜 있겠는가. 얼마나 많은 사회경제 집단이 각자의 이익과 선호를 관철하기 위해 정치에 참여하려 들겠는가. 그런 나라에 비례대표제가 도입되면, 한 정당이 국회의 단독 과반수를 확보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다양한 사회경제 집단만큼 그들을 대표하려는 정당들 역시 다채롭게 생겨날 것이다. 따라서 표는 정당별로 갈가리 나뉠 가능성이 크다. 실제 비례대표제를 택한, 앞서 언급한 유럽의 선진 복지국가들에선 엄청나게 인기가 많은 제1당도 일반적으로 30%대 중·후반 득표율(따라서 의석점유율)을 가질 뿐이다. 그 밑으로 10∼20% 득표율을 확보하는 유력 정당이 여럿 존재한다.

그 때문에 비례대표제·다당제 환경 아래서 행정부는 통상적으로 연립 형태를 띠기 마련이다. 가령 제1당이 30% 의석을 가진다면 그 정당은 20%와 5% 혹은 15%와 10% 정당들과 연립해야 비로소 50%가 넘는 의석을 확보해 안정성을 가진 다수파 정부를 구성할 수 있다. 그런데 비례대표제 국가의 정당 체계에선 사회·경제적 약자를 대표하는 정당들이 진보와 중도 진영에 즐비하고, 그들은 거의 언제나 (강자 대표 정당들에 비해) 다수가 된다. 앞서 말한 대로, 압도적 다수의 유권자가 여러 유형의 약자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연립정부를 구성할 때 약자 정당이 철저히 배제되는 일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 최소 한 정당이라도 약자 대표 정당은 들어가기 마련이다. 따라서 연립정부가 어떤 정당들로 (재)구성되는지 관계없이 약자를 위한 정치는 (강약의 차이는 다소 있을지라도) 언제나 작동한다.

비례대표제는 명실상부한 시대정신

이와 같이 비례대표제 국가에선 의회와 행정부에서 공히 약자의 정치가 상시적으로 펼쳐진다. 그 결과가 복지국가의 발전이다. 우리나라에서 복지국가 건설이 시대정신으로 떠오른 지 이미 오래다. 그 시대정신은 오직 명실상부한 비례대표제의 도입으로 구현될 수 있다.

최태욱 한림국제대학원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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