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29일 0시23분.
북한이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화성-14’를 발사한 직후 딱딱하게 굳은 표정의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도쿄 지요다구 총리 관저에 모습을 드러냈다. 북한이 7월4일에 이어 두 번째로 미국 본토를 타격할 수 있는 ICBM을 발사한 것은 전날인 28일 밤 11시42분이었다. 아베 총리는 북한의 미사일 발사 뒤 31분 만에 총리 관저로 황급히 복귀해 “북한이 다시금 탄도미사일 발사를 강행했다는 제1보를 받았다. (일본의) 배타적경제수역(EEZ) 안에 떨어졌을 가능성도 있다. 국민의 안전 확보를 제일 우선으로 생각하며 (대책 마련에) 만전을 기하겠다”고 말했다.
북한이 미 본토 전역을 타격하는 미사일 발사 능력을 확보했음을 어느 정도 입증하면서 미국의 두 동맹국 한국과 일본의 향후 대응에 관심이 집중된다. 그동안 한국과 일본은 독자적인 핵무장을 포기하고 미국이 제공하는 ‘핵우산’에 기대 자국 안보를 유지해왔다. 북한의 ICBM 발사는 동북아시아의 안보 구도를 흔들 ‘게임체인저’가 될 것인가.
극우세력의 자체 핵무장론북한의 ICBM 발사에 일본이 얼마나 당황했는지는 일본 총리 관저의 기민한 움직임을 보면 알 수 있다. 아베 총리의 짧은 기자회견이 끝난 직후인 오전 0시34분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이 다시 한번 기자회견을 열어 현재까지 파악된 정보를 공개했고, 10분 뒤인 0시44분 국가안전보장회의(NSC)를 열었다. 이후 아베 총리는 오전 1시42분, 오후 2시에 각각 기자회견을 열어 “국제사회의 강한 항의와 경고를 무시하고 이뤄진 이번 ICBM 발사로 인해 일본이 중대하고 현실적인 안보 위협을 받게 됐다”고 말했다.
북한의 ICBM 발사 이후 일본 내에선 극우 성향의 일부 군사평론가를 중심으로 “자체 핵무장을 준비해야 한다”는 주장이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그러나 정부 각료, 주요 정치인, 주요 언론 등에선 핵무장 관련 발언이 거의 나오지 않는다.
대표적 예는 이나다 도모미 전 방위상이다. 일본의 대표적 극우 정치가인 이나다는 민주당 집권기인 2011년 3월 우익 월간지 과 대담에서 “일본이 독자적으로 핵을 보유하는 것을 국가 전략으로 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방위상이 된 뒤 이뤄진 국회 공방에선 “현재 핵 보유는 전혀 생각하고 있지 않다”(2016년 10월5일 참의원 예산위원회)며 한발 물러섰다. 어설픈 야당 의원 시절엔 핵무장을 쉽게 입 밖에 냈지만 실제 방위상직에 오르고 보니, 이 주장이 얼마나 비현실적인지 깨달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일본은 냉전이 한창이던 1960년대 중반, 자체 핵무장을 진지하게 고민한 적이 있다. 일본 「NHK」는 2010년 10월 간판 다큐멘터리 「NHK 스페셜」을 통해 사토 에이사쿠 정부가 1964년 중국의 핵실험 성공 뒤 독자적인 핵개발 계획을 추진한 사실을 당시 외무성 담당자 무라타 요헤이의 증언 등을 통해 입증했다. 일본 내각조사실은 한발 더 나아가 핵물리학자와 안전보장 전문가들을 모아 ①핵폭탄 제조법 ②미사일 제조법 ③유도장치 개발 ④플루토늄 생산 방법 등을 검토한 뒤 일본이 “소수의 핵무기를 만드는 것은 가능하며 비교적 용이하다”는 결론의 보고서를 완성했다. 그러나 사토 총리는 일본이 독자적 핵개발을 추진할 경우 미-일 관계가 파탄 나는 것은 물론 국내에서도 감당하기 힘든 반핵 투쟁이 발생할 것을 우려해 “미국의 핵우산 아래 안전을 확보”하는 길을 택한다. 이후 1968년 12월 ‘핵을 갖지도 만들지도 들이지도 않는다’는 비핵 3원칙을 발표했다.
5개월 안에 핵폭탄 제조 가능일본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핵무장을 할 수 있다는 것은 국제정치학에선 상식에 속한다. 미국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산하 핵이슈프로젝트(PONI)는 일본이 ‘드라이버를 돌리기만 하면 될 정도’로 가까이 다가갔다는 견해를 내놓았다. 일본에는 약 6천 발 분량의 핵무기를 제조할 수 있는 플루토늄(47.9t, 2015년 12월 현재), 핵탄두 제조 기술, 2017년 1월 현재 32번 발사해 31번 성공(성공률 96.9%)한 H2A라는 놀라운 성능의 로켓도 있다. 조 바이든 전 미국 부통령은 2016년 6월23일 미 공영방송 「PBS」인터뷰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에게 “일본이 내일이라도 핵을 보유하면 어떻게 할 것이냐. 그들은 하루 만에 핵을 만들 능력이 있다”고 말한 적이 있음을 공개했다. 국제정치학에선 일본처럼 완벽한 핵잠재력(Nuclear Latency)이 있으면서 핵보유를 하지 않는 선택을 ‘일본 옵션’(Japan Option)이라 부른다.
만약 일본이 진지하게 핵무장을 결심한다면 얼마나 빨리 달성할 수 있을까. 동아시아 군사전문가 이언 이스턴은 2015년 3월 미국의 핵비확산정책교육센터(NPEC)의 의뢰를 받아 쓴 보고서 ‘일본의 전력무기 계획과 전략’에서 일본 핵개발의 3개 시나리오를 제시했다. 이 가운데 가장 소극적인 핵개발 시나리오만 봐도 “가능한 한 빨리 ‘핵억지력’을 개발해야 한다는 결정이 내려지면, (일본은) 5개월 안에 1700lb(771kg) 중량에 11킬로톤(히로시마 원자폭탄과 비슷한 위력)인 핵폭탄을 만들 수 있다. 그리고 20개월 안에 F-2와 F-35에 장착할 35개의 핵무기를 만들 수 있다”는 견해를 밝혔다.
미-일 동맹 속 핵무장 불가능그렇지만 일본 군사전문가들은 핵무장론에 회의적 견해를 밝히는 편이다. 일본이 자체 핵무장을 감행한다면 미-일 동맹의 존립이 위태로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대표적 지일파 학자인 조지프 나이 하버드대학 석좌교수는 일본 언론인 스노하라 쓰요시와 진행한 대담집 「일-미 동맹 vs 중국·북한」(2010)에서 “일본은 핵확산금지조약(NPT) 체제의 지도적 위치에 있는 국가다. 일본이 핵무장을 선언하면 바로 NPT 체제는 붕괴된다”고 말했다. 이는 미국이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시나리오다. 이런 논리의 연장선상에서 오가와 가즈히사 시즈오카현립대학 특임교수는 “미-일 동맹의 해체를 의미하는 일본 핵무장론은 결국 책상 위 공론”이라고 결론 내린다.
그럼에도 일본이 자체 핵무장을 추진한다면?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을 활용한 영국형 핵보유 방식을 선택할 가능성이 높다. 좁은 국토를 가진 일본에서 적의 1차 핵공격을 받고 살아남을 수단이 잠수함밖에 없기 때문이다. 오가와 특임교수는 일본이 영국처럼 뱅가드급 잠수함(SSBM) 4척과 트라이덴트Ⅱ미사일(SLMB) 225기를 유지할 경우 건조 비용으로 약 3조엔(약 30조원), 운영비용으로 매년 3천억엔이 들 것으로 추산했다. 여기에 미-일 동맹이 해체돼 일본이 감당할 천문학적 비용이 추가된다.
일본의 핵무장은 현시점에서 진지하게 우려할 시나리오는 아니다. 물론 전제가 있다. 나이 교수는 앞선 대담에서 “만약 미국이 다시 고립주의에 빠져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하와이 정도까지 철수하면 (핵무장을 포기한) 일본의 의견도 바뀔지 모른다. 일본이 중국과 북한의 핵위협에 노출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했다. 일본이 자체 핵무장을 결단하는 것은 미국의 쇠퇴로 더 이상 미-일 동맹의 핵우산을 신뢰할 수 없을 때뿐이다. 이는 한국의 국운을 결정할 수 있는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파괴적이고 고통스러운 재편을 의미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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