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성애 때문에 에이즈(AIDS)가 얼마나 이 나라에 퍼져 있는지 아느냐. 1만4천여 명의 에이즈 환자가 생겨났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유병률 1만 명당 2명</font></font>홍준표 자유한국당 대선 후보가 지난 4월25일 JTBC·중앙일보·한국정치학회 주최 대선 후보 TV토론회에서 한 말이다. 홍 후보의 발언은 편견에 기초한 말이 어디까지 폭력적일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에이즈에 대한 사회적 낙인으로 극우보수층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자극할 수 있는지 입증해 보였다.
물론 홍 후보는 기본적인 사실관계부터 틀렸다. 에이즈에 이르게 하는 HIV(Human Immunodeficiency Virus·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 감염과 동성 사이의 성관계는 동일선상에 있지 않다. 에이즈는 성정체성과 관련된 질병이 아니다. 동성이든 이성이든 성관계를 맺는 상대가 HIV 감염인이면 감염될 확률이 있다. 질병관리본부가 2016년 8월 내놓은 ‘2015 HIV/AIDS 신고 현황’을 보면, 2015년 현재 내국인 HIV 감염인 1018명 가운데 ‘이성 간 성 접촉’이 원인이라고 답한 이는 364명, ‘동성 간 성 접촉’이 원인이라 답한 사람은 288명이었다(무응답 366명). 합계도 틀렸다. 현재 한국 내 HIV 감염인 수는 1만502명이다. 홍 후보가 말한 수는 사망자까지 포함한 누적 수치에 가까우며, 에이즈 환자가 아닌 HIV 감염인을 말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홍 후보는 토론회 이후 “동성애는 하나님의 뜻에 반한다”며 동성애와 에이즈를 묶어 혐오발언을 이어갔다. 표를 위해서라면 물불 가리지 않고 대중을 선동하겠다는 지독한 ‘혐오정치’다.
홍 후보의 발언은 에이즈가 ‘죽음의 병’이라는 고정된 인식에 기반했다. 에이즈라고 부르지만 이는 바이러스 감염 이후 여러 증상이 나타나는 경우를 지칭하는 것이다. 그 때문에 정확히는 ‘HIV 감염’이라고 해야 옳다. 감염인은 2015년 기준으로 전세계 3670만 명 정도다. 2015년 현재 새롭게 감염된 이는 210만 명, 숨진 이는 110만 명이었다. 사망은 10년 전인 2005년보다 45% 감소했다. 신규 감염이나 감염으로 숨진 수 모두 추세적으로 줄고 있다.
한국의 1만502명은 2005년 3108명과 비교할 때 3배 정도 늘어난 수치다. 증가세가 가팔라 보이지만, HIV/에이즈 치료 체계가 자리잡으면서 적극적으로 항바이러스 치료를 받는 감염인이 대폭 늘었고, 그 결과 공식적으로 파악된 감염인이 증가했다는 게 중론이다. 걱정할 정도는 아니다 HIV 유병률(어느 시점에 해당 지역에서 나타나는 인구 대비 환자 비율)만 봐도 약 1만 명당 2명으로 매우 낮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소문 두렵다’ 79%, ‘괴롭힘 두렵다’ 39%</font></font>낮은 유병률과 떨어진 전파력, 길어진 생존 기간 등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회에서 HIV/에이즈는 여전히 공포와 혐오·경멸의 단어다. 이 병이 의학의 범주를 벗어나 사회학적 질병이란 뜻이기도 하다. 사회의 편견으로 인해 감염인은 정작 질병이 아닌 사회적 관계 탓에 정상적 생활이 힘들다.
2006년부터 유엔에이즈(UNAIDS)에서 개발된 ‘HIV 낙인지표조사’가 지난해 처음 이뤄졌다는 사실은 한국 사회가 가진 편견의 정도를 보여준다. 지난해 꾸려진 ‘한국 HIV 낙인지표조사 공동기획단’은 3~5월 감염인 15명이 현장 조사원으로 합류해 104명의 감염인을 만나 설문조사를 했다. 참여자 104명 가운데 남성이 102명, 여성이 1명, 트랜스젠더가 1명이었다. (이번 조사는 예산이나 인력 면에서 한계가 분명하다. 서울 시내에 거주하는 감염인에 한정해 자료가 수집됐고, 남성 동성애자 이외의 인구집단을 충분히 포함하지 못했다.)
기획단이 공개한 자료를 보면, 감염인들이 느끼는 차별은 지표조사의 제목처럼 ‘낙인’과 그로 인한 사회적 배제, 고립이 주를 이룬다. 참여자 104명 가운데 지난 12개월을 기준으로 25%가 ‘자신에 대한 소문이 돌고 있음을 인식’했으며, 13.5%는 ‘폭언·모욕·협박 등을 경험했다’고 답했다. ‘사교모임 배제’(7.7%)나 가족 활동에서 배제(6.7%) 등을 경험한 이도 있었다. ‘강제 시술과 검진을 받았다’는 감염인이 7명이었고, ‘보험 가입을 거부’당한 이는 13명이었다. ‘구금이나 격리 조치를 경험’한 이도 2명이었다. 사회로부터 격리 경험이 낮은 이유는 지난 12개월의 경험만을 물었다는 한계 때문이란 지적이 조사 주체로부터 나왔다.
조사에서 가장 주목할 것은 스스로를 견뎌내지 못하는 ‘내재적 낙인’이다. 외부의 충격보다 자신이 원래 갖고 있던 HIV/에이즈의 편견으로 인한 상처가 더 크다는 것이다. 지난 12개월간 HIV 감염 사실로 느낀 감정에 대한 질문에서 응답자의 절대다수인 75%가 ‘나를 탓하기’를 경험했다. 이에 견줘 ‘타인을 탓하기’는 20.2%에 불과했다. ‘죄책감’은 64.4%, ‘자살충동’을 느낀 이는 36.5%였다.
자신에 대한 부정적 감정은 사회적 고립을 자초한다. 감염 확인 뒤 ‘가족, 친구들과 떨어져 지내기로 했다’는 39.4%, ‘일을 그만두기로 했다’는 21.2%였다. ‘결혼 안 하기로 했다’(44.2%)거나 ‘구직이나 승진 시도를 하지 않기로 했다’(21.2%)는 답변도 많았다. 또 78.8%가 ‘나에 대한 소문이 나는 것’을 두려워했다. ‘언어적 모욕, 괴롭힘, 협박을 당하는 것이 두려움’(38.5%), ‘신체적 폭행’(14.4%), ‘모욕·위협’(18.3%)의 공포도 상당했다. 내재적 낙인은 감염 사실을 안 뒤 경험한 차별과 밀접하게 관련돼 있다는 점에서 ‘외부적 요인’과 동전의 양면이다.
전세계적으로도 HIV 감염인들에게선 내재적 낙인이 확인된다. 한국은 그 정도가 유독 심하다는 게 문제다. 외국과 비교하면 거의 모든 항목에서 가장 높은 수준을 보인다. ‘나를 탓하기’는 75%로 2위 타이(42.9%)보다 무려 32.1%포인트 앞선다. ‘죄책감, 자책, 스스로 벌을 받아야 한다는 느낌, 자살 충동, 소문에 대한 두려움’ 등에서 다른 나라들보다 압도적으로 높은 수치를 보여줬다. 이와 관련해 보고서는 “(HIV 감염인이 많은 아프리카 국가들보다) 상대적으로 유병률이 매우 낮고 항바이러스 치료가 보편화된 한국과 독일의 경험을 비교해보면 그 차이는 더욱 심각하다”고 적었다. 한국 응답자들은 독일의 연구 결과보다 무려 3배 높게 죄책감을 갖고 벌을 받아야 한다는 느낌을 토로했다.
이유는 무엇일까. 이 조사의 연구책임자인 서보경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조교수는 “이런 높은 수준의 자기 부정감은 독일에 비해 HIV 감염인들이 한국 사회에서 사회적 존재로서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경험 자체를 할 수 없는 현실과 맞닿아 있다. 가족, 친구, 이웃, 노동자, 시민으로서 감염인의 사회적 상을 우리 사회가 전혀 갖고 있지 못하다”고 말했다.
HIV/에이즈에 대한 편견을 조장하고 배제를 당연시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몰고 온 주체는 누구일까. 응답자들은 ‘감염인에 대한 부정적 시선을 크게 느끼는 영역’에 대해 ‘언론 보도’(77명)와 ‘미디어 댓글’(78명)이라고 했다. 감염인들은 언론 보도에 대해 감염인을 전염 가능성이 높은 대상 혹은 배제·고립이 당연한 존재로 조장하는 측면이 강하다고 느꼈다. 또 일부 온라인 커뮤니티는 감염인들에게 ‘벌레(~충)’ 같은 경멸의 표현을 사용하는 등 광범위한 혐오표현이 만연해 있다. 이와 관련해 보고서는 “HIV/AIDS에 대한 혐오표현은 언론의 자유에 포함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질병에 대한 공포와 편견을 조장하는 행태에 대한 적극적인 규제가 이루어져야 한다. 언론 매체 및 온라인 공간에 대한 상시적 모니터링과 함께 HIV/AIDS와 감염인에 대한 편견을 조장하는 혐오표현에 대한 실질적인 처벌 규정이 마련되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낙인을 제도화하는 법</font></font>때론 제도가 편견을 공고화한다. 후천성면역결핍증예방법은 제19조에서 “감염인은 혈액 또는 체액을 통해 다른 사람에게 전파매개행위를 하여서는 안 된다”는 전파매개행위의 금지를 명문화하고 있다. 이에 대해 보고서는 감염인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침해하는 것은 물론 HIV 전염을 범죄화함으로써 낙인을 제도화한다고 지적한다. 이런 규제는 감염을 확인하기 위한 자발적 동기를 약화시켜 HIV 전염을 막는다는 예방 효과에도 부정적 영향을 끼친다.
조사팀은 감염인들에게 앞으로의 걱정거리를 물었다. ‘신체적·정신적 건강 유지’(44.2%)를 꼽는 이가 가장 많았고, ‘경제적 어려움’(29.8%), ‘연인 및 파트너 관계의 형성과 유지’(17.3%) 등이 뒤를 이었다. 감염인들이 사회에서 배제·고립되지 않도록 직업의 자유를 보장하고 치료 체계를 유지하는 게 시급한 과제임을 알 수 있다.
김완 기자 funnybone@hani.co.kr하어영 기자 hah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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